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120

담양 면앙정 송순 상수리나무

담양 면앙정 송순 상수리나무 조선의 큰 선비이고 시조와 가사를 반석에 올린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송순은 1493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이름은 두모곡이었다. 송순이 대여섯 살의 어릴 때다. 문득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사는지가 궁금해 아버지께 여쭈었다.“아버님! 우리가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어요?”“우린 신평 송씨다. 시조는 구자, 진자, 송구진이시다. 우리 시조는 충청남도 신평에서 4대까지 살았다. 그리고 5대조 ‘희’자, ‘경’자, 송희경 할아버님이 전라남도 추성, 지금의 담양으로 이주해오셨다.”이날 송순은 자신이 신평 송씨 시조 송구진의 10세손이라는 것도 알았다.‘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송순은 영특했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보..

순천 송천사 김대인 멀구슬나무

순천 송천사 김대인 멀구슬나무 순천과 여수, 고흥에 첨산(尖山)이 있다. 순천 별량과 여수시 화치동, 고흥 동강의 송곳처럼 뾰족한 3개의 산이 그것이다.김대인은 조선 왜란 7년전쟁의 용장이자, 맹장이다. 순천시 별량면 첨산 아래의 송천사는 김대인, 김일손, 김치모를 배향한 사우이고 뒷산에 묘가 있는데, 들머리에 두어 아름의 멀구슬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그리고 송천사가 있는 별량의 첨산이 이 삼각형의 꼭짓점이다.김대인은 이 별량 첨산 아래에서 통덕랑 김유손의 아들로 태어났다. 또 송천사에 함께 배향된 탁영공 김일손은 작은 아버지이다. 그렇게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김대인은 어린 시절 자신이 서출이란 걸 알고 지리산 칠불사로 들어가 해공대사에게 불도와 무예를 배웠다. 신분을 속이고 무과에 응시하여..

묘향산 보현사 통일 향나무

묘향산 보현사 통일 향나무 평양북도의 묘향산은 높이 1,909m로 동쪽 금강, 서쪽 구월, 남쪽 지리와 함께 우리나라 4대 명산이다. 신기신묘 아름다우며 우람하고 웅장하다. 또 태백산, 향산이란 이름도 있다.삼국유사의 태백산 기록이다. 이곳에서 환웅이 준 신령한 쑥 한 줌과 마늘 스무 쪽을 먹고 곰이 여자가 되어 아들을 낳았으니 곧 단군이다. 여기 향로봉의 남쪽 기슭의 바위동굴이 그 단군굴이다. 단군대는 단군이 활쏘기 연습을 한 곳이고 천주대는 과녁이다.향산은 불교에서 공덕을 쌓아 공경심을 일으키는 계향(戒香), 향기를 맡듯 남의 말을 귀담아듣는 문향(聞香), 나눔의 향인 시향(施香)을 뜻한다. 이 세 향은 바람을 거슬러서도 풍기니 이 세상 으뜸 향인 묘향(妙香)이고, 그래서인지 묘향산에는 향나무와 동청..

정읍 이평 말목장터 전봉준 감나무

정읍 이평 말목장터 전봉준 감나무 전라북도의 젖줄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 서해로 들어가며 펼쳐놓은 배들평야(梨坪)는 말 그대로 지평선에 해가 뜨고 지는 곡창지대이다.1892년 4월, 그 배들이 있는 고부에 조병갑이 군수로 취임했다. 평양 기녀의 서자이나, 신정왕후 조대비 권력을 등에 업은 조병갑은 희대의 탐관오리였다. 부임하자마자 부모 불효죄, 형제간 불목죄, 잡귀를 즐긴죄, 노름죄 등의 세금으로 삽시간에 2만 냥의 돈을 착복하였다.그뿐인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정읍천의 물을 막은 만석보 아래 동진강에 또 하나의 만석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약속과 달리 물세를 거두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진황지(陳荒地)에도 토지세를 부과했다. 더하여 1841년부터 1845년까지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조..

정읍 백정기 의사 기념관 백정기 무궁화

정읍 백정기 의사 기념관 백정기 무궁화 백정기는 1896년 1월 19일, 부안읍 운기마을에서 농부인 백남일과 어머니 윤문옥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2살 때인 1907년 이웃고을 정읍시 영원면 갈선마을로 이사하였다.1914년 19살 때 상경한 뒤, 일본경찰 폭행 및 유괴죄로 일본 경무총감부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와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또 동지 4명과 함께 경성과 인천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계획하다, 일경에게 쫓기자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로 망명했다.이듬해인 1920년 겨울 다시 경성으로 와 군자금 조달 등의 활약을 하던 중, 1921년 봄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신분을 광부로 위장해 빠져나왔다.1922년 중..

나주 영모정 임제 팽나무

나주 영모정 임제 팽나무 임제는 조선의 대문호다. 조선이 북방민족의 기개를 살려 옛 고구려, 나아가 고조선의 강역을 되찾고 또 더 나아가 중원을 석권하여 패자까지 되었다면 임제 문학은 더욱 빛나는 별이었을 것이다.그 임제를 말하는 글 둘이 있다. 첫째는 물곡사(勿哭辭)이니 ‘사이팔만개호칭제(四夷八蠻 皆呼稱帝)/ 유독조선입주중국(唯獨朝鮮 入主中國)/ 아생하위아사하위(我生何爲 我死何爲)/ 물곡(勿哭)’이다. 이는 ‘중국을 둘러싼 여러 나라가 모두 제국이라 하는데, 오직 조선만 중국을 주인으로 삼고 있다. 이런 나약한 나라에서 삶과 죽음이 무슨 한이 되겠느냐, 울지 마라’ 이다.그러니까 비록 작은 나라이지만, 사대에 빠져 당당하지 못한 왕과 사대부를 싸잡아서 나무라는 글이다. 또 이 호통은 뼛속까지 친일, 친..

장흥 반계사 정경달 배롱나무

장흥 반계사 정경달 배롱나무 장흥 장동면의 반계사는 본관이 영광, 자가 이회(而晦), 호가 반곡(盤谷)인 정경달(丁景達 1542~1602)을 모신 사우이자, 서원이다. 정경달은 임란에 둔전과 염전을 관리하고, 도자기를 굽고, 피난민에게 해운업을 열어 어염, 포목 등을 확보한 조선 수군 최고의 장수이자, 병참 참모이며 선각자이다. 또, 명 장수들과 소통을 담당한 외교가였다.정경달은 장흥 장동 반산리 우리 이름으로 ‘서리’인 ‘상산’에서 태어났다. 1570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 종6품 가평현감, 정5품 형조정랑을 거쳐 1591년 6월 종3품 선산도호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왜란을 맞아 1592년 4월 15일부터 1595년 11월 25일까지, 1597년 1월 1일부터 1602년 12월 17일까지의 ‘반곡 난중..

목포 삼학도 이난영 배롱나무

목포 삼학도 이난영 배롱나무 오래전 호남선의 종착지인 목포역에 내리면 이난영(1916~1965)의 노래 ‘목포의 눈물’을 들을 수 있었다. 그 목포의 눈물 노래와 유달산은 목포를 대표하는 상징이다. 또 유달산 중턱쯤에 목포의 눈물 노래비가 있다. 가까이에 이순신 장군의 노적봉과 삼학도, 멀리는 푸른 다도해의 절경이 있으니, 목포의 눈물이 그냥 눈물이 아님을 알 수 있다.이난영은 1916년 6월 6일 목포 죽교동에서 날품을 파는 아버지 이남순의 딸로 태어났다. 본명은 이옥례이고 학교 기록은 이옥순이다.1923년 목포 공립여자보통학교에 입학했는데, 아버지는 술을 좋아했고 어머니는 10살 때 가출하였다. 그 때문에 4학년 때 중퇴하여 오빠와 함께 솜공장에서 일도 하였다. 여섯 살 위 오빠인 이봉룡이 열두 살의..

경남 산청 문익점 목화소나무

경남 산청 문익점 목화소나무 목화는 식물 이름이고 두 번 꽃이 핀다. 초여름부터 피는 첫 다섯 꽃잎은 처음엔 하얗지만, 점차 붉어져 다래라는 열매가 된다. 이 다래는 농부에게는 돈이고 아이들에게는 달착지근한 간식거리다. 두 번째 꽃은 다래가 다섯 갈래로 벌어진 하얀 솜꽃으로 면화(棉花)이다.여기서 씨앗을 빼낸 솜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들면 면(綿), 무명, 명이라 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목화를 ‘미영’이라고도 한다. 무명은 목면(木綿)의 중국어인 ‘무멘’의 음차인 듯싶으나 목화솜에서 실을 뽑는 실 잣는 기구 ‘물레’는 발명자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의 이름에서 유래한다.우리의 의생활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온 이 목화는 고려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물론 이보다 앞서 백제 위덕..

경남 하동 경충사 정기룡 나무

경남 하동 경충사 정기룡 나무 1562년 4월 24일, 경남 곤양에서 태어나 명장으로 숭앙받으니 정기룡이다. 어릴 때 이름은 무수, 자가 경운인데 기룡이란 이름에는 유래가 있다. 1574년 상주로 이사, 1580년 향시에 합격, 1585년 진주의 아전 강세정의 딸과 결혼, 1586년 별시 무과를 보러 한양에 갔을 때다. 재위 19년의 선조가 종각에서 용이 자는 꿈을 꾸고 종각에서 자고 있는 사람이 있으면 데려오라고 했다. 그날 데려온 정무수가 병과 4위로 급제하자, 선조가 기룡이란 이름을 주었다.정기룡은 1587년부터 3년간 북방에서 종군하고, 1590년, 경상우도병마절도사 신립의 무관이 되었다. 이듬해인 1591년, 종8품 훈련원 봉사로 한양에 머물다 1592년 4월 13일 임진왜란이 터지자 경상우도방..