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120

합천 해인사 백련암 원택나무

합천 해인사 백련암 원택나무 해인사에 갔다면 다 나름대로 연유가 있을 것이다. 불자라면 불자여서, 나그네라면 나그네여서 갔을 것이다. 교과서의 팔만대장경을 만나러 갔거나, 홍류동 계곡의 흐르는 계절을 보러 갔을 것이다. 또 한 번 가면 여러 번 가는 곳도 있고, 한 번 갔기에 두 번 가지 않는 곳도 있다. 어찌 그 숱한 사연을 두루두루 살필 거며, 굳이 그럴 필요도 없을 것이다.하지만 해인사의 백련암은 꼭 한 번 더 가고 싶은 곳이었다. 처음 길에 암자를 품은 산세의 수려함에 놀라 한동안 숨까지 멈추고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마치 관세음보살이 앉아있거나, 알을 품은 봉황인 듯 그 범상치 않은 신비로움 때문이다.해인사 일주문 지나 오솔길로 접어들어 2Km의 오르막길을 천천히 걸었다. 마침내 두 번째 백련암을..

화순 만연사 만연 배롱나무

화순 만연사 만연 배롱나무 화순 만연사는 선사 만연이 세운 절이다. 절을 품은 나한산을 만연산이라 부르는 연유이다.세상의 가장 작은 수가 허공을 넘어 청정이고, 이는 볼 수도, 느낄 수도 없음이다. 또 가장 큰 수가 불가사의를 넘어 무량수이니, 이 또한 셀 수도, 알 수도 없음이다. 그렇게 세상의 가장 작음부터 가장 큼까지를 아우르는 말이 만(萬)이다. 광활함을 노래하는 ‘기러기 울어 애는 하늘 구만리’에서 하늘은 청정이고 무량수인 ‘만’이며, 기러기는 어디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알 수 없는 온갖 생명이고, 삶의 인연인 ‘연’이다.넓고 깊은 연못이란 만연(萬淵)은 또 알 수 없음의 인연인 만연(萬緣)이기도 하다. 세상살이가 볼 수도, 느낄 수도, 셀 수도, 알 수도 없는 인연이니, 만연사는 만 가지 인연..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 처진 당송

함양 지곡면 개평마을 처진 당송 함양은 양반 씨족이 모여 살던 영남 유림의 고을이니 흔히 좌 안동, 우 함양이라고 일컫는다. 또 함양의 그 대표 반촌이 지곡면 개평마을이다.개평은 마을을 감싼 서북쪽 도숭산(1041m)의 두 골짜기에서 흘러온 지곡천과 평촌천이 만나는 곳의 삼각형 터이다. 마을 이름 개평은 도숭산의 산 모양과 지곡과 평촌의 두 물줄기를 본뜬 개(介)자 모양이 아닌가 싶다. 그래서 예전엔 개화대 또는 개우대 마을이라고 했다 한다. 사람으로 치면 아랫배이니 풍성하고 넉넉한 출산의 터이다.또 육십령을 내려온 남강이 서상, 서하면을 지나 지곡면에서 이 개자 모양의 지곡과 평촌 두 물줄기를 두 손으로 받으니, 도숭산이 감싸주고 남강이 품어주는 평(平)안의 터이다.개평마을은 오래전 경주 김씨 등이 살..

영암 구림 회사정 소나무

영암 구림 회사정 소나무 영암에는 선사시대인 신석기에서 청동기, 철기시대에 이르는 옛 유물 유적이 있다. 이때의 고인돌이 1천 37기 확인되었고 출토된 청동기 제작용 거푸집이 있다. 이 거푸집으로 세형동검, 꺾창, 낚싯바늘, 도끼, 끌 등을 만들었고 서양보다 천여 년이 앞선 시기에 아연을 첨가했다. 아연은 청동의 색채를 아름답게 하고 성능도 향상시키나 그 녹는 점이 327.4도로 낮고 907도에서 기화하여 주조기술이 매우 까다롭다. 중국 송나라도 아연을 넣지 못했고, BC 20년 17.3%의 아연을 함유한 로마의 청동 화폐도 우리보다 1,000여 년 뒤처진 기술이다.이 무렵 부족의 위엄과 권위의 세형동검, 그리고 지름 21.2㎝에 13,000여의 정교한 선을 새긴 거울 다뉴세문경도 있었다. 이곳의 선사시..

거창 수승대 수송 소나무

거창 수승대 수송 소나무 수승대는 영남 제일의 동천이라는 안의삼동 중 원학동의 다른 이름이다. 안의삼동(安義三洞)은 함양 화림동과 심진동, 거창 원학동의 빼어난 절경을 가리키는데 이 세 곳의 옛 지명이 한때 안의현이었기 때문이다.거창 원학동의 수승대의 첫 이름은 수송암이다. 조선 후기 문신인 남공철(1760~1840)이 1815년에 간행한 금릉집 12권의 ‘풍패정기’에 ‘삼한시대에 여러 차례 군사를 일으켜 서로 공격했다. 사신들도 연달아 이르렀는데, 빈객이 모두 여기서 전별하던 곳이라 이로 인해 이름이 되었다.’고 썼다. 여기서 서로 공격한 나라는 백제와 신라였으며, 오가는 사신들이 국경을 넘으며 근심 걱정으로 헤어지던 곳의 바위여서 ‘수송암’이다. 또 여기 수승대는 ‘입선출인’의 터이다. 그러니까 들어..

보성 서재필 기념공원 독립문 소나무

보성 서재필 기념공원 독립문 소나무 보성강이 주암호를 들어가는 들머리의 문덕교를 지나면 순천과 보성으로 나뉘는 삼거리이다. 여기 전남 보성군 문덕면 용암길 8에 독립문이 우뚝 서 있으니, 바로 서재필기념공원이다.봄맞이 입춘 아침, 대문에 써 붙이던 입춘문 ‘입춘대길 건양다경’은 봄을 맞아 집안의 길함과 황제의 나라에 큰 경사가 두루 있기를 바라는 세시풍속이다.고종이 1896년 중국의 연호를 버리고 황제가 되어 연호를 건양이라 하였다. 중국의 연호를 쓰던 조선 개국 5백 년에 처음 맞는 당당함이지만, 이미 나라는 기울어지는 달이었다. 이듬해인 1897년 나라를 대한제국, 연호를 광무로 황제즉위식까지 가졌지만, 이 역시 이름뿐이었다. 하지만 지금도 백성들은 첫 황제 연호 건양을 기려 새봄맞이에 자랑스레 대문..

금강산 건봉사 불이 팽나무

금강산 건봉사 불이 팽나무 금강산은 우리 땅이지만 지금은 마음대로 갈 수 없는 땅이다. 하지만 산줄기야 그대로이니, 고성군 건봉산의 건봉사는 금강산의 절이다. 이 건봉산은 ‘금강산 감로봉’ 산자락으로 6·25 한국전쟁을 거치며 ‘건봉산’이 되었다. 안석경의 금강산 기행기 ‘동행기’(東行記)에 이 감로봉의 이름이 나온다.안석경(1718~1774)은 강원 원주에서 태어난 주선 후기의 문인이다. 당시의 현실과 이상 사이에서 갈등을 겪다가 과거에 3차례 낙방한 뒤 강원도 횡성 삽교에서 은거 생활을 했다. 상인의 움직임이나 민중적 항거 등이 생동감을 주는 ‘삽교만록’ 그리고 ‘삽교집’, ‘삽교예학록’ 등의 책을 썼다.그의 금강산 기행기 ‘동행기’는 원주 안산을 나선 1761년 4월 1일부터 5월 13일까지 41일..

수원 화성유수 서유구 굽은 소나무

수원 화성유수 서유구 굽은 소나무 서유구(1764~1845)의 본관은 달성이고 자는 준평, 호는 풍석(楓石)이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에 맞먹는 어쩌면 더 대단한 ‘임원경제지’를 엮었다. 스스로 유배를 자청하기도 했고 호를 오비거사라 했다.오비는 ‘다섯 가지를 낭비한 삶’이란 뜻이다. 학문을 익혔으나 터득한 것이 없고 벼슬살이에 홀려 배운 것을 모두 잊었다. 마치 ‘도끼를 잡고 몽치를 던지는 수고’이니 첫 번째 낭비이다.관리가 되어 온 힘을 다해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눈이 흐릿하게 되는 수고를 했지만, 더 나아가지 못했으니 두 번째 낭비이다. 농법을 익혔지만 ‘일만 가지 인연이 기왓장 깨지듯 부서졌으니’ 세 번째 낭비이다.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군은에 보답 못 하고 ‘물에 뜬 거품처럼 환몽 같으니’ ..

진주 성주 김시민 모과나무

진주 성주 김시민 모과나무 용장이자 맹장인 충무공 김시민은 1592년 4월 조선 해협을 건너와 7년여 미쳐 날뛰던 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592년 10월, 조선을 장악한 왜가 호남의 곡창을 탐낼 때이다.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왜의 호남진출을 막아 조선을 지키고, 약탈과 살육의 고통에서 백성을 지켰다. 그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탄을 맞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 눈을 감으니 서른여덟이었다.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김시민이 병사들에게 한 말이다.‘나는 마땅히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를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김시민은 ..

고흥 발포성 이순신 오동나무

고흥 발포성 이순신 오동나무 이순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한양 마른내골은 건천동이다. 이곳에 사대부 자제의 교육기관인 네 개의 사학 중 동학이 있었다. 이곳에 살게 된 것은 아버지 이정의 희신, 요신, 순신, 우신 등 네 아들에 대한 향학 염원으로 여겨진다. 건넛마을은 구리개이다. 지금의 을지로 들머리인 이곳은 흙빛이 누런 구리색의 얕은 언덕이었다. 이 구리개 동현마을에 조선 시대 병사들의 무술 및 병서, 전투대형 등을 가르치던 훈련원이 있었다. 이순신의 해박하고 능숙한 글솜씨, 어린 시절 병정놀이를 지휘하던 대장이었던 것은 이 두 마을의 영향이리라.이순신은 29살이던 1573년 별시 무과는 뜻하지 않은 낙마로 낙방했다. 3년을 더 기다려 1576년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어린 시절 놀러 다녔던 구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