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원 화성유수 서유구 굽은 소나무
서유구(1764~1845)의 본관은 달성이고 자는 준평, 호는 풍석(楓石)이다. 영국의 브리태니커 사전에 맞먹는 어쩌면 더 대단한 ‘임원경제지’를 엮었다. 스스로 유배를 자청하기도 했고 호를 오비거사라 했다.
오비는 ‘다섯 가지를 낭비한 삶’이란 뜻이다. 학문을 익혔으나 터득한 것이 없고 벼슬살이에 홀려 배운 것을 모두 잊었다. 마치 ‘도끼를 잡고 몽치를 던지는 수고’이니 첫 번째 낭비이다.
관리가 되어 온 힘을 다해 ‘손에 굳은살이 박이고 눈이 흐릿하게 되는 수고를 했지만, 더 나아가지 못했으니 두 번째 낭비이다. 농법을 익혔지만 ‘일만 가지 인연이 기왓장 깨지듯 부서졌으니’ 세 번째 낭비이다. 여러 벼슬을 지냈으나 군은에 보답 못 하고 ‘물에 뜬 거품처럼 환몽 같으니’ 네 번째 낭비이다. ‘임원경제지’를 편찬, 교정, 편집한 지가 30여 년이다. ‘공력이 부족해 목판으로 새기자니 재력이 없고 간장독이나 덮는 데 쓰자니 조금 아쉬우니’ 다섯 번째 낭비이다.
서유구는 세상을 떠나기 3년 전에 ‘이미 70하고도 9년을 산 것이 작은 구멍 앞을 매가 휙 지나가는 것과 다름없다’라며 ‘아아, 정말로 산다는 것이 이처럼 낭비일 뿐이란 말인가?’ 자탄하면서 손자 태순에게 ‘내가 죽은 뒤 우람한 비를 세우지 말고, 그저 작은 비석에 오비거사 달성 서 아무개 묘라고만 써라’라고 했다.
정조의 문집 ‘홍재전서’에 579개의 문제와 18명의 신하가 제출한 답이 적혀 있다. 채택된 답이 가장 많은 사람이 바로 서유구이니 181개로 31.3%이다. 당대의 석학 정약용은 117개이니 20.2%이다. 정약용이 법과 제도를 개혁하여 ‘나라다운 나라’를 만들고 싶었다면 서유구는 백성들이 잘사는 ‘풍요로운 나라’였다, 임원경제지는 그에 대한 방향이며 실천의 집대성이다.
서유구는 사대부를 향해 입만 살아서 ‘흙으로 끓인 국과 종이로 만든 떡’을 만든다며 ‘조상 중 한 명이라도 벼슬한 이가 있으면 눈으로는 고기 어(魚)자와 노나라 노(魯)자도 구분 못 하고 손으로는 쟁기나 보습을 잡지 않는다. 처자식이 굶주려 아우성쳐도 돌아보지도 않고 무릎 꿇고 손 모으고 앉아 성리(性理)를 이야기한다.’라고 비판했다.
서유구는 정조 14년(1790) 문과에 급제하여 벼슬에 올랐으나, 1800년 정조가 승하하고 숙부 서형수가 우의정 김달순의 탄핵 사건에 연루돼 정계를 떠나자, 1806년 스스로 벼슬을 내놓고 고향으로 갔다. 18년간 농촌살이를 하고 순조 때 다시 복귀하여 유수, 판서, 대사헌, 대제학 등 요직을 두루 거쳤다. 1834년 호남관찰사일 때 기근에 시달리는 백성들을 위해 일본 통신사를 통해 사들인 고구마 종자를 각 고을에서 재배토록 하고 ‘종저보’ 등을 저술하여 영농법 개혁에 앞장섰다.
이때부터 쓴 농임축어업, 의학, 요리는 물론 농업 정책까지 총망라한 임원경제지는 조선과 중국의 각종 문헌 893권을 참조하고 30년 동안 오직 아들 서우보의 도움으로 이루어졌다. 재정상의 어려움으로 출판하지 못했고, 1827년 아들 서우보가 먼저 죽는 아픔을 겪기도 했다.
82세의 서유보는 경기도 남양주 두릉에서 시종이 연주하는 거문고 소리를 들으며 눈을 감았다. 그날이 일생에 가장 평안한 날이었으리라 여기며, 청학 백학이 춤추며 날았으리라. 그런데 서유보의 유적지는 모두 터만 남았다. 도시가 삼켜버렸다. 더욱 묘는 참배할 수 없다. 파주시 진서면 금릉리 산204, 그곳은 DMZ이다. 어쩌겠는가? 수원 화성박물관 앞 서유구 선정비와 이 빗돌을 지키는 굽은 소나무에 엎드려 절하고 남북이 하나 되는 날만 손꼽아 기다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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