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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북 익산 함라 부잣집 자목련

전북 익산 함라 부잣집 자목련-수염이 석 자라도 먹어야 양반 유유히 흐르는 비단강, 이 금강의 은혜를 받아 모든 것이 풍성하고 푸짐하니 더하고 보탤 것만 있는 익산이다. 보릿고개 시절, 걸인과 나그네들에게 후한 대접을 했던 익산시 함라면 함열리의 삼부자 조해영, 김병순, 이배원은 선행과 나눔, 베풂의 대명사이다.이곳 함라산은 긴 장삼 자락에 염주를 손에 든 스님 형상이고 함열 마을은 그 스님의 시주 그릇이니 호남가의 ‘풍속은 화순이요 인심은 함열이라’는 한 대목이 허투루 생긴 게 아니다. 여기 삼 부잣집은 일제강점기인 1930년대 전국 90여 명 만석꾼 중 3명이다. 이밖에도 천석꾼 4명, 백석꾼 20여 명이 더 있었다 하니 말 그대로 어마어마한 부자 동네였다.이배원의 부친은 임피 출신으로 금강 포구인 ..

전남 장성 단전리 두 장군 느티나무

전남 장성 단전리 두 장군 느티나무-형제의 아름다운 정과 애환을 담아 더 애틋한 담양의 병풍산은 말 그대로 병풍을 두른 모양이다. 이 병풍산에서 북서쪽 장성호 쪽으로 뻗은 줄기가 장성 북하면 단전리의 옥녀봉에 이른다. 이 옥녀봉에서 동남쪽으로 뻗은 산줄기가 삼손룡(三巽龍) 지맥이다. 그리고 장성 북하면 대악리가 대손룡, 이웃하는 단전리 신촌이 중손룡, 이어지는 윗마을 단전은 소손룡이다. 또 단전리는 붉은 봉황새가 밭으로 내려오는 ‘단봉하전’의 명당터가 있어 첫 ‘단(丹)’자와 끝 ‘전(田)’자를 따서 단전이라 했다. 여기 신촌마을은 옥녀 허리띠 모양이어서 ‘한허리’, ‘하느리’, ‘천을산(天乙山)마을’ 등으로도 부른다.그렇듯 동남쪽으로 뻗은 산줄기를 가리키는 이곳 삼손룡 지맥 단전리 명당터는 거부나 장상..

카테고리 없음 2026.10.16

금강산 화암사 풍악 제1루 전나무

금강산 화암사 풍악 제1루 전나무- 남과 북이 하나 되는 그날을 기다리며 잃어버린 게 아쉬움이 더 크다지만, 한국전쟁 말기에 남과 북이 어떻게든 서로 차지하려 했던 곳이 금강산이다. 이 금강산을 연초록 새싹과 꽃으로 화사한 봄은 금강, 녹음이 뒤덮은 여름은 봉래, 오색단풍이 물든 가을은 풍악, 기암괴석이 드러나는 겨울은 개골, 그렇게 4 이름을 가진 산이다. 흔히 1만 2천봉이라 하는 금강산의 최고봉은 비로봉(1638m)이고 강원도의 회양, 통천, 고성 등 3개 군에 걸쳐 있기에 아쉽지만 우리 남쪽도 그 한 자락을 안고 있다.또 끝자락이자 첫 자락이 금강산 제1봉 신선대 아래에 터를 잡았기에, 금강산 팔만구암자의 들머리이자 마무리로 둘러보는 절이 바로 금강산 화암사이다.신라 혜공왕 5년(769)에 진표율..

대구 녹동서원 김충선 나무

대구 녹동서원 김충선 나무-남풍 때때로 불 제 고향 생각하네 1592년 4월 13일 아침 8시 왜국 1군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가 쓰시마를 나와 오후 5시에 부산진에 이르고 4월 18일 가토 기요마사가 이끄는 제2군도 부산 동래에 상륙하였다. 이때 가토 왜군의 좌선봉장 사야가(沙也可)는 3천 명의 조총부대를 이끌고 있었다.밀양부사 박진은 동래성으로 출전했으나 성이 함락되고, 밀양성마저 잃었다. 곧 삼랑진 작원관에 방어선을 구축했으나 역시 왜군을 막지 못했다. 1592년 5월 박진은 경상좌도 병마절도사가 되어 이번엔 왜군이 점령한 경주성 가까이 안강에 진을 쳤다. 이 무렵 사야가는 ‘명분 없는 전쟁에 선봉이 되어 조선으로 왔습니다’라며 5백여 왜병을 이끌고 박진에게 항복하였다.항왜 사야가는 1592년 9월..

대구 모명제 두사충 배롱나무

대구 모명제 두사충 배롱나무-하늘 끝에 선 늙은이 돌아갈 수 없어 당나라 시인 두보의 후손 두사충(杜師忠)의 아버지는 기주자사를 지낸 두교림이다. 두사충은 1592년 12월 명 장수 이여송의 수륙지획주사로 임진왜란에 참전하여 병영과 진 터 구축의 임무를 맡았다. 그런데 평양성 탈환 뒤 벽제관 전투 패배의 책임을 이여송이 두사충에게 씌워 참수하려 했다. 이때 좌찬성 정탁의 구명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귀국했다. 1597년 정유재란에는 명 장수 유정을 따라 다시 참전하여 자신의 매형인 수군도독 진린의 작전참모장이 되었다.1598년 2월 17일 이순신의 조선 수군 8천 명이 완도 고금도에 통제영을 세운 뒤, 7월 16일 진린의 명 수군 5천 명이 합류, 연합 함대를 이뤘다. 그리고 사흘 뒤인 7월 19일 녹동 ..

대구 충절사 신숭겸 배롱나무

대구 충절사 신숭겸 배롱나무-슬픔으로 두 장수를 노래한 도이장가 신숭겸은 고려사 열전에 광해주(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했으니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몸을 붙여 산다는 춘천도호부 우거(寓居)조에 실려있다. 같은 책 평산도호부 편에는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지신이 되었다’라고 했다.그러기에 신숭겸이 태어난 곳은 곡성 목사동면 구룡리이다. 그곳 용산재 탯자리에 유허비와 용산단이 있고, 어릴 때 이름은 능산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도 출중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또 섬진강이 되는 대황강에도 숱한 전설이 있고 목사동면 아래 고을 석곡의 능파정은 신숭겸의 후손 신대년 형제가 수군재건길의 이순신을 환대했던 곳이다.모계..

고흥 신여량 정려각 동백나무

고흥 신여량 정려각 동백나무-순하고 어진 나라의 대들보 신여량(1564~1606)은 고흥 동강 마륜마을에서 아버지 고령 신씨 신홍해와 어머니 흥덕장씨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순하고 어진 사람이 되라고 이름을 어질량(良)자인 여량(汝良)이라 했으나 선조가 나라의 대들보라며 량(樑)으로 개명케 했다. 또 문과를 바란 아버지가 병서만 읽는 아들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야의 문신이 문숭(文崇)에 흘러 파당 싸움만 일삼으니 무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간성이 되겠다’고 했다.15세 때 아버지, 16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4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1583년 남해안의 호족 자제가 보는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평안, 함경도의 각 병영과 조정을 오가는 종9품 선전관이 되었다. 1586년 승진하여 종6품의 평..

정의의 여신상과 판결

정의의 여신상과 판결 우리나라에서 판사, 검사 등 법조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이 이제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이 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일 테고, 우리나라 최고 법원은 대법원이다. 그곳에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여인상이 있다. 유럽은 시청 청사 건물 중앙 높은 곳이면 거의 다 세워져 있어 관광 길에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설령 있더라도 관심 밖이고, 또 눈여겨보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여인상이다.바로 그 여인상은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 칼을 거머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다. 이 라틴어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의 어원이며 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여신 ‘디케’이다. 또 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로마 시대에는 다른 손에 저울을 들었고, 또 이도 부족해..

칼럼 2026.10.02

고흥 마륜골 송대립 송심 쌍충정려 대숲

고흥 마륜골 송대립 송심 쌍충정려 대숲-오늘의 우리는 위대한 선열 때문 송대립(1550~1597)은 본관이 여산이며 형조 참판 송간의 7세손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관이다. 전라순무사이던 송간(1405~1485)은 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에 관직을 버렸고, 단종의 승하 소식에 영월로 달려갔다. 김시습, 조려, 이축, 정지산, 이성희, 조상치 등과 어의를 거두어 계룡산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지금의 고흥인 흥양 동강 마륜촌에 은거하였다. 입향조인 그의 호를 따 충강 당산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 송맹유의 후손에서 임란과 호란의 공신이 나왔으니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등 삼형제와 송대립의 아들 송심이다.송대립은 부지런히 글공부에 매진했지만 임진왜란에 더는 글만 읽을 수 없어 분연히 붓을 ..

고흥 대서 서동사 솔숲

고흥 대서 서동사 솔숲-무거운 역사의 무게 고흥 서동사는 여산 송씨 송간을 주벽으로 송씨 일문을 모신 문중 사당이다. 그리고 김시습을 또 주벽으로 모시고 있다.송간(1410~1480)은 단종의 명으로 남방 순시 중이던 1455년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내던졌다. 단종의 승하 소식에 6촌 재종 아우인 전라도 도사 송경원(1419~1510)과 함께 영월로 달려갔고, 김시습의 계룡산 초혼제에 함께했다. 또 집권한 세조가 형조 판서를 내렸으나 고흥 동강 마륜골에 은거했다. 김시습(1435~1493)은 3살 나이에 맷돌에 보리 가는 모습을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라고 읊은 신동이다, 이 김시습의 19세 때 수양대군의 왕권 탈취는 패륜이자 반역이었다. 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