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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충절사 신숭겸 배롱나무

대구 충절사 신숭겸 배롱나무-슬픔으로 두 장수를 노래한 도이장가 신숭겸은 고려사 열전에 광해주(강원도 춘천) 사람이라 했으니 신증동국여지승람은 남의 집이나 타향에서 몸을 붙여 산다는 춘천도호부 우거(寓居)조에 실려있다. 같은 책 평산도호부 편에는 ‘신숭겸은 곡성현 출신으로 태조가 평산을 본관으로 내렸다’, ‘세간에 전하기를, 신숭겸은 죽어서 현의 성황지신이 되었다’라고 했다.그러기에 신숭겸이 태어난 곳은 곡성 목사동면 구룡리이다. 그곳 용산재 탯자리에 유허비와 용산단이 있고, 어릴 때 이름은 능산으로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도 출중했다는 이야기가 내려온다. 또 섬진강이 되는 대황강에도 숱한 전설이 있고 목사동면 아래 고을 석곡의 능파정은 신숭겸의 후손 신대년 형제가 수군재건길의 이순신을 환대했던 곳이다.모계..

고흥 신여량 정려각 동백나무

고흥 신여량 정려각 동백나무-순하고 어진 나라의 대들보 신여량(1564~1606)은 고흥 동강 마륜마을에서 아버지 고령 신씨 신홍해와 어머니 흥덕장씨의 3남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는 순하고 어진 사람이 되라고 이름을 어질량(良)자인 여량(汝良)이라 했으나 선조가 나라의 대들보라며 량(樑)으로 개명케 했다. 또 문과를 바란 아버지가 병서만 읽는 아들에게 그 까닭을 묻자 ‘조야의 문신이 문숭(文崇)에 흘러 파당 싸움만 일삼으니 무인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간성이 되겠다’고 했다.15세 때 아버지, 16세때 어머니를 여의고 4년간 시묘살이를 한 뒤 1583년 남해안의 호족 자제가 보는 무과에 급제하여 이듬해 평안, 함경도의 각 병영과 조정을 오가는 종9품 선전관이 되었다. 1586년 승진하여 종6품의 평..

정의의 여신상과 판결

정의의 여신상과 판결 우리나라에서 판사, 검사 등 법조인을 가장 많이 배출한 대학이 이제는 서울대학교 법학전문대학원이 된 서울대학교 법과대학일 테고, 우리나라 최고 법원은 대법원이다. 그곳에 우리나라에서는 흔치 않은 여인상이 있다. 유럽은 시청 청사 건물 중앙 높은 곳이면 거의 다 세워져 있어 관광 길에 나그네의 눈길을 끈다. 하지만 우리나라에서는 설령 있더라도 관심 밖이고, 또 눈여겨보지 않는 별 볼 일 없는 여인상이다.바로 그 여인상은 한 손에 저울, 다른 손에 칼을 거머쥔 ‘정의의 여신 유스티티아(Justitia)’다. 이 라틴어는 영어 ‘저스티스(Justice)’의 어원이며 그리스 신화 속 정의의 여신 ‘디케’이다. 또 칼만으로는 부족했는지 로마 시대에는 다른 손에 저울을 들었고, 또 이도 부족해..

칼럼 2026.10.02

고흥 마륜골 송대립 송심 쌍충정려 대숲

고흥 마륜골 송대립 송심 쌍충정려 대숲-오늘의 우리는 위대한 선열 때문 송대립(1550~1597)은 본관이 여산이며 형조 참판 송간의 7세손이고 아버지는 현감 송관이다. 전라순무사이던 송간(1405~1485)은 1455년 세조의 왕위 찬탈에 관직을 버렸고, 단종의 승하 소식에 영월로 달려갔다. 김시습, 조려, 이축, 정지산, 이성희, 조상치 등과 어의를 거두어 계룡산에서 초혼제를 지내고 지금의 고흥인 흥양 동강 마륜촌에 은거하였다. 입향조인 그의 호를 따 충강 당산나무가 있는 이곳에서 다섯 아들을 두었으며 장남 송맹유의 후손에서 임란과 호란의 공신이 나왔으니 송대립, 송희립, 송정립 등 삼형제와 송대립의 아들 송심이다.송대립은 부지런히 글공부에 매진했지만 임진왜란에 더는 글만 읽을 수 없어 분연히 붓을 ..

고흥 대서 서동사 솔숲

고흥 대서 서동사 솔숲-무거운 역사의 무게 고흥 서동사는 여산 송씨 송간을 주벽으로 송씨 일문을 모신 문중 사당이다. 그리고 김시습을 또 주벽으로 모시고 있다.송간(1410~1480)은 단종의 명으로 남방 순시 중이던 1455년 세조의 왕위찬탈에 벼슬을 내던졌다. 단종의 승하 소식에 6촌 재종 아우인 전라도 도사 송경원(1419~1510)과 함께 영월로 달려갔고, 김시습의 계룡산 초혼제에 함께했다. 또 집권한 세조가 형조 판서를 내렸으나 고흥 동강 마륜골에 은거했다. 김시습(1435~1493)은 3살 나이에 맷돌에 보리 가는 모습을 ‘비는 오지 않는데 천둥소리 어디서 나는가. 누런 구름 조각조각 사방으로 흩어지네’라고 읊은 신동이다, 이 김시습의 19세 때 수양대군의 왕권 탈취는 패륜이자 반역이었다. 단..

제주 대정읍 모슬포 문형순 동백나무

제주 대정읍 모슬포 문형순 동백나무-부당함으로 불이행! 정의와 용기 문형순의 어릴 때 이름은 문시형으로 1897년 1월 4일, 평안남도 안주에서 태어났다. 1919년 3월 신흥무관학교를 나와 1929년 만주 한인사회 자치정부인 국민부 중앙호위대장, 1935년부터는 하북성 지하공작대에서 한국광복군으로 활동하다 1945년 8·15해방에 귀국하였다.“문형순씨는 배운 게 없어 경찰 법규조차 몰랐다. 그때 그의 별명이 ‘문 도깨비’였다. 그 까닭은 그가 초등학교도 나오지 않은 일자무식이라기보다 당시 경찰 중에서 군대에 맞설 수 있는 드문 사람이어서다. 나보다 20살쯤 위로 당시 50대였다. 기운이 장사로 배짱 있고 남자다운 멋진 사람이었다. 박정희 전 대통령은 물론 제주지구 토벌대 사령관인 송요찬, 연대장·함병선..

서울 헌법재판소 민초 백송

서울 헌법재판소 민초 백송-반면교사 타산지석의 본보기 서울은 백제의 고도이고, 1067년 고려 문종 때 양주라는 이름을 남경으로 승격시키고 궁궐을 지었으니 지금의 청와대 터이다. 1392년 이성계가 세운 조선은 수도를 한양으로 옮겨 경복궁과 창덕궁을 나란히 지었다. 이 두 궁궐 사이의 터 북촌에는 조선의 집권층 사대부들이 살았다. 이 권문세가의 주거지 터인 북촌 재동에 1987년 설립된 헌법재판소가 들어온 것은 1993년 6월 1일이다. 이 지명 재동에 얽힌 사연이 있다. 세조가 수양대군이던 1453년 계유정난 때 권신들을 입궐시켜 영의정 황보인, 우찬성 이양, 병조판서 조극관 등을 죽였다. 이어 북촌으로 달려가 군기판사 윤처공, 황해도 안악군수 이명민 등 한명회가 빨간 줄을 그어 살생부가 된 조정의 문..

보은 속리산 세조 정이품송

보은 속리산 세조 정이품송-나무가 스스로 가지를 위로 올려 조선 영조 때의 실학자 신경준은 산경표에서 백두산에서 단천, 원산의 동쪽 해안선을 따라 남쪽으로 뻗어 내리며 금강산, 설악산, 오대산, 태백산, 속리산을 지나 지리산으로 이어지는 한반도의 산줄기를 백두대간이라 했다. 이 백두대간의 산 중 속리산은 충청북도 보은군, 괴산군, 경상북도 상주시, 문경시에 걸쳐 있다. 최고봉인 천왕봉은 1,058m이고 산 이름 속리산은 ‘속세로부터 떠나온 산’의 뜻이다.이 속리산 위 속초시와 양양, 고성, 인제군에 걸쳐 솟은 설악산에 아름다운 울산바위가 있다. 옥황상제가 금강산을 만들 때 한반도의 멋진 바위를 모두 불렀는데 울산에 있던 바위가 북쪽으로 가다가 그만 늦어서 주저앉았다. 이에 울산 사또가 울산바위가 있는 신..

충남 계룡산 동학사 목련

충남 계룡산 동학사 목련-살아있음이, 보고 느낌이 행복 천년 고찰 계룡산 동학사는 그 오랜 세월만큼 그 이야기도 길다.남북국시대인 713년이다. 당나라 스님 상원조사가 660년에 멸망하여 지도에서 이름이 지워진 옛 백제 땅 계룡산에 이르렀다. 이때 산길에서 몹시 괴로워하는 호랑이를 만났다. 상원조사는 호랑이 목에 걸린 뼈를 빼주었고, 호랑이는 한 여인을 데려다주었다. 상원조사는 그 여인과 의남매를 맺고 호랑이를 만난 곳에 상원암을 지어 도를 닦았다. 724년 상원조사의 제자인 회의화상이 이를 기려 남매탑을 세웠다. 시공을 떠나 오늘에도 그 순수하고 애틋한 사랑을 말없이 전해주는 7층 탑의 이름은 오라비탑, 5층 탑은 누이탑이다.또 세월이 흘러 고려 태조 즉위 3년인 920년 도선이 이 상원암을 중창하여 ..

영주 부석사 의상조사 선비화

영주 부석사 의상조사 선비화 -비, 이슬 없이 잎과 꽃이 피다 신라 때 의상조사(625-702)가 세운 영주 부석사에 올라 세상을 내려다보면 여기가 신선이 사는 세상이구나 한다. 의상이 650년 원효와 함께 당으로 가다가 경기 화성의 어느 동굴에서 묵을 때이다. 이날 해골에 괸 물을 마신 원효는 진리를 깨닫고 되돌아왔고, 의상은 종남산 지상사에서 중국 화엄종 조사인 지엄에게 공부하고 661년 귀국했다.당시 당은 신라 승상 김흠순을 가두고 신라에 출병 준비를 하고 있었다. 이를 김흠순에게 들은 의상이 급히 귀국할 때였다. 의상은 자신을 사모하는 여성 선묘에게 작별인사를 하러 갔다 만나지 못하고 귀국했다. 이에 선묘는 의상을 지키겠다며 황해에 몸을 던져 용이 되었다.의상이 676년 화엄정신을 펼칠 도량 터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