거제 옥포대첩기념공원 이선지 느티나무
이선지는 임진왜란 초기인 1592년 음력 5월 7일의 옥포해전에서 다친 조선 수군이다, 전라좌수사 이순신의 전선 24척과 경상우수사 원균의 전선 4척이 연합하여 왜장 도도 다카도라의 왜선 26척을 불사른 이 옥포해전은 임진왜란 최초의 해전이자, 왜란 최초의 대승이다.
전투가 끝나고 피해 상황을 점검하니 순천 대장선의 활병 이선지가 어깨에 화살을 맞은 게 전부였다. 아니다. 전공에 집착한 원균이 이순신 함대가 이미 사로잡은 왜선을 빼앗으려고 마구 활을 쏘아서 상처를 입은 조선 병사 두 명이 더 있다. 그러니 아군에 의한 피해가 왜군에 의한 피해의 두 배였다고 할 수 있다. 그뿐만이 아니다. 7월 8일의 한산도 대첩에서는 왜군에게 잡혔다 풀려난 조선 백성을 죽이고 왜군의 목을 베었다고 자랑스레 보고까지 했다. 이렇듯 이때의 원균 행적은 먼 곳의 적보다 가까이 있는 내부의 적이 더 무섭다는 역사의 교훈이다.
그날 옥포해전을 앞두고 이순신은 ‘물령망동 정중여산(勿令妄動 靜重如山)’이라 훈시했다. 곧, ‘가벼이 움직이지 마라, 태산과 같이 무거이 움직여라’이다. 이는 지도자의 능력에 따라서 과정과 결과가 달라짐이니 이 역시 역사의 교훈이다.
아무튼, 이 옥포해전을 시작으로 연이은 해전의 패배에 도요토미 히데요시는 분노하여 왜 함대를 증강시킨다. 하지만 결국 이순신의 조선 함대와는 교전을 전면 중단하라며 꼬리를 내린다. 왜의 수군에게 이순신의 조선 해역은 이름만 듣고도 벌벌 떨리는 지옥이었다. 이로써 선조를 의주까지 몽진케 하며 거침없이 평양까지 점령한 왜의 선봉장 고니시 유키나가는 고립되었고 왜군도 발목이 묶였다.
이곳 옥포는 큰 물고기가 동해를 삼킬 듯 입을 벌린 ‘ㄷ’ 자처럼 생긴 2킬로미터쯤의 거제도 동쪽의 만이다. 그날 이곳 옥포만에는 도도 다카도라의 왜선 50여 척이 있었다. 5월 7일 새벽, 이순신 함대의 우척후장이자 사도 첨사인 김완이 적을 발견하고 신기전을 발사했다. 이 신호를 본 이순신은 먼저 6척의 판옥선을 선봉으로 내보냈다. 이어 마치 독 안의 쥐를 잡듯 만안에 정박 중인 왜선을 향해 맹렬히 포격을 퍼부었다.
왜선도 만만치는 않았다. 왜의 특기는 재빨리 배를 움직여 상대의 배에 올라가 벌이는 육박전이다. 하지만 왜선 세키부네는 빠르기는 하지만, 선체가 낮아서 판옥선으로 올라갈 수가 없었다. 더욱 이순신의 판옥선이 치고 빠지며 포격을 퍼부으니, 왜의 함선은 속수무책이었다.
결국, 왜선 몇 척이 겨우 탈출했고, 물에 빠진 왜병은 육지로 달아났다. 이들마저도 이순신은 가만두지 않았다. 전라좌수영으로 회군하며 합포(현재의 마산) 앞바다에서 왜선 5척, 다음날인 5월 8일 적진포(통영시 아래쪽)에서 11척을 불살랐다. 그렇게 첫 번째 출전에서 모두 45척의 왜선을 파괴하였다. 그렇게 옥포해전은 조선 수군의 첫 승리이자, 임진왜란의 방향을 바꾼 전환점이다. 결국,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도쿠가와 이에야스 막부가 들어서는 계기가 되었으니, 동아시아의 흐름을 바꾼 시발점이다.
그 역사의 현장인 이곳 옥포만에 지금은 세계 최대 1백만 톤급 뱃도랑의 대우조선 옥포조선소가 있다. 이제 그날의 치욕과 영광은 한 줌 재처럼 사라지고, 옥포만의 조선소에서는 5대양 6대주를 넘나들 선체 길이가 4백 미터에 이르는 초대형 배들이 건조되고 있다.
이 옥포 조선소를 지키는 옥포대첩 기념공원의 이순신 장군 사당 효충사 앞의 느티나무에서 동해를 바라본다. 그리고 한겨울에도 의연하게 서 있는 느티나무를 옥포대첩의 순천 대장선 갑판 맨 앞에서 위민멸왜의 화살을 쏘던 수군 병사 이선지로 여기고 고개를 숙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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