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남 대흥사 표충 연리근
한국 남쪽의 큰 절인 양산 통도사, 합천 해인사, 순천 송광사를 삼보사찰이라 한다. 삼보는 불교의 수행 주체인 불(佛), 법(法), 승(僧)을 가리키는 말이다.
불보사찰 통도사는 자장율사가 중국에서 돌아오며 불경과 불사리를 가져와 창건한 절이다. 석가모니의 진신사리를 모셨기에 주법당인 대적광전에는 불상이 없고 불단만 있다.
해인사는 부처의 말씀인 고려의 팔만대장경이 있어서 법보사찰이다. 송광사는 큰스님들이 많이 배출되어서 승보사찰이다. 고려 중기의 고승 보조국사 지눌이 해인사에서 송광사로 왔고, 그 뒤 제자인 혜심을 비롯하여 조선 초기까지 16명의 국사가 배출되었다.
이 삼보사찰의 이름은 조선 중기 이후에 붙여졌다 하며, 승려 교육과정인 선원, 강원, 율원의 기능을 다 갖추어서 총림이라고도 한다.
또 이 삼보사찰에 못지않은 절이 해남 대흥사이다. 그렇다면 대흥사는 어떤 절일까?
먼저 자장율사가 가져온 석가모니 진신사리를 봉안한 응진전전삼층석탑과 거대한 암벽을 다듬어 조각한 높이 6m의 북미륵암 마애여래좌상이 있는 곳이다.
또 조선 후기의 대표적인 선승인 초의선사가 다도와 참선은 하나라며 ‘다선일여’를 실천한 한국 다도의 본산이다. 초의는 일지암에서 차를 직접 재배하고 만들었다. 정약용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우고, 김정희와도 교우했다. 대웅전 앞 백설당의 김정희가 쓴 ‘무량수전’ 편액이 있는 이유이고, 또 김정희가 감탄한 대웅보전 현판은 조선 후기의 명필 이광사가 썼다.
여기 표충사는 절이 아닌 사명대사 휴정과 사명대사 유정, 뇌묵당 처영을 기리는 사당이다
또 대흥사 성보박물관의 ‘서산대사화상당명’은 정조가 휴정의 충절을 친히 적은 것이다. 휴정이 입적하고 180여 년이 지난 정조 12년(1788)에 대흥사는 표충사를 건립했다. 그리고 1794년 서산대사의 진영을 봉안할 때, 정조는 서산대사화상당명과 그 서문을 써주었다. ‘서쪽과 남쪽의 신하들이 선사의 초상화를 모신 영당에 편액을 청하기에, 나는 남쪽(두륜산 대흥사)에는 표충(表忠)이라는 편액을, 서쪽(묘향산 보현사)에는 수충(酬忠)이라는 편액을 내려주고 관리에게 제수를 갖추어 해마다 제사 드리라고 명하였다’는 그 내용 중 일부이다.
대흥사에 표충사가 세워진 것은 휴정의 유언에 따른 것이다.
서산대사는 1592년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팔도도총섭이 되어 1500여 명의 의승군을 지휘했다. 제자인 유정, 처영과 평양성 탈환에 성공하는 등 전장에서 혁혁한 공을 세웠다. 이후 제자들에게 모든 일을 맡기고 묘향산에서 85세에 입적했다. 이때 제자에게 ‘내 의발 등을 호남도 해남면 두륜산 대흥사에 전하라’고 했다. 이에 따라 서산대사가 선조로부터 받은 의발, 염주, 신발 등 유품이 대흥사로 왔고, 표충사를 세워 모시게 되었다.
또 유물 중 ‘서산대사 행초 정선사가록’은 그의 친필이며, 뒤에 사명대사의 친필도 있다. 서산대사의 친필인 이 서첩은 조선시대 서예사 연구에도 중요한 유물이다. 이밖에도 선조대왕 교지는 선조 35년(1602)에 서산대사를 ‘일도대선사선교도총섭’ 즉, 서산대사를 승군 대장 도총섭으로 임명하는 내용이다.
여기 대흥사 대웅보전 가는 길에 연리근이 있다. 뿌리는 하나이나 몸이 둘인 느티나무이다. 이곳 하늘로 치솟은 아름다운 자태의 소나무들도 눈길을 끌지만, 이 연리근 느티나무는 대흥사와 서산대사의 인연을 상징하는 듯싶어 마음이 따뜻해진다. 그래서 대흥사는 연기(緣起)사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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