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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 성주 김시민 모과나무

운당 2024. 7. 27. 07:07

진주 성주 김시민 모과나무

 

용장이자 맹장인 충무공 김시민은 15924월 조선 해협을 건너와 7년여 미쳐 날뛰던 왜의 간담을 서늘케 했다. 159210, 조선을 장악한 왜가 호남의 곡창을 탐낼 때이다. 김시민은 진주성에서 왜의 호남진출을 막아 조선을 지키고, 약탈과 살육의 고통에서 백성을 지켰다. 그 제1차 진주성 전투에서 왜탄을 맞고 나라와 백성을 걱정하며 하염없이 눈물을 쏟다 눈을 감으니 서른여덟이었다.

진주성 전투를 앞두고 김시민이 병사들에게 한 말이다.

나는 마땅히 충의를 맹세하고 진주를 지켜 국가 중흥의 근본으로 삼을 것이니 힘을 합쳐 싸우면 천만의 섬 오랑캐인들 무엇이 두려우랴. 나의 엄지는 이미 떨어지고, 식지와 장지로 활을 당기다 남은 세 손가락마저 떨어질 때까지 싸우리라.’

김시민은 1554년 충청도 목천현 갈전면 백전촌(충남 천안시)에서 아버지 김충갑과 어머니 창평 이 씨의 셋째 아들로 태어났다. 여덟 살 때이다. 김시민은 마을의 가축들에게 해를 입히는 큰 뱀을 활로 쏴 죽였다. 마을 사람들은 앞으로 큰 인물이 될 거라고 믿었다.

1578년 훈련원의 무과에 급제해 병기 제조 관아인 군기시에서 일했다. 1583년 항복한 여진족인 니탕개가 난을 일으키자, 정언신의 부장으로 참전하여 토벌하였다. 1584년 별시 무과에 급제 종 6품 훈련원 주부가 되었다. 하지만 병조판서에게 군사력 강화를 건의하였으나 평화 시기라며 꾸짖자 사직하고 낙향했다. 이때 김시민은 모자를 벗어 발로 밟으며 장부가 이것이 아니라면 어찌 남에게 모욕받을 수 있는가?’라며 불같이 화를 냈다. 그 뒤 종5품인 군기시 판관으로 복귀했다가 1591년 진주목 판관으로 부임했다.

1592년 왜란이 터지고, 선조는 한양을 버렸다. 이때 진주 목사 이경은 성을 떠나 지리산으로 피했다가 곧 병사했다. 그러던 중 김성일이 경상도 초유사로 온다는 소식에 김시민은 진주성으로 나왔다. 임란 직전 일본에 통신사로 다녀와 왜의 침략이 없다면서 영남의 성곽 수축을 반대한 김성일은 그 뼈아픈 실책을 반성하듯 맡은 일에 열성을 다했다. 이듬해인 429일 갑자기 병사할 때까지 영남의 관군과 의병을 조율하고 유격전으로 왜군을 혼란에 빠뜨렸다.

그렇게 김성일의 독려로 김시민은 곤양 군수 이광악, 의병장 이달, 홍의장군 곽재우 등과 함께 왜적을 격파했다. 고성, 창원 등 여러 성을 회복하며 용맹을 떨치니 이름만 들어도 왜병이 벌벌 떨었다. 1592726일 진주 목사로 승진하여 총통과 화약을 만들고 성의 방비를 튼튼히 했다. 또 왜장 평소태를 사로잡은 공으로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를 겸했다.

159210, 왜장 우키타 히데이에 등 3만여 왜병이 진주성으로 몰려왔다. 이에 김시민이 38백여 병사로 물리쳤으니 바로 진주대첩이다. 또 이 전투는 왜군 정예병의 패배였다.

왜병은 김시민을 모쿠소 판관이라고 부르며 두려워했다. 모쿠소는 김시민의 직책인 목사의 왜 발음이다. 조선군 맹장 김시민을 가리키는 이 모쿠소를 도요토미 히데요시도 알게 돼 무슨 일이 있어도 진주성을 함락시키라 했고, 이듬해 제2차 진주성 전투의 원인이 되었다.

하지만 남강의 핏빛 물이 남해까지 흘렀던 그 날은 이제 지나갔다. 그럼에도 아직 우리는 일본과 주변 강대국의 틈새에서 국토의 허리는 동강 나고, 평화를 위협하는 목소리도 높다.

웅장하고 장엄한 촉석루 현판 앞 담장 곁 모과나무가 한여름 볕에 눈부시게 푸르다. 이 햇살과 남강 바람으로 나무는 단단한 열매를 맺을 것이다. 그날 이곳에서 스러져간 선열들을 기리며 모과나무를 바라본다. 금세라도 김시민 장군의 우렁찬 목소리가 들릴 것만 같다.

진주 촉석루 김시민 모과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