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흥 발포성 이순신 오동나무
이순신이 어린 시절에 살던 한양 마른내골은 건천동이다. 이곳에 사대부 자제의 교육기관인 네 개의 사학 중 동학이 있었다. 이곳에 살게 된 것은 아버지 이정의 희신, 요신, 순신, 우신 등 네 아들에 대한 향학 염원으로 여겨진다. 건넛마을은 구리개이다. 지금의 을지로 들머리인 이곳은 흙빛이 누런 구리색의 얕은 언덕이었다. 이 구리개 동현마을에 조선 시대 병사들의 무술 및 병서, 전투대형 등을 가르치던 훈련원이 있었다. 이순신의 해박하고 능숙한 글솜씨, 어린 시절 병정놀이를 지휘하던 대장이었던 것은 이 두 마을의 영향이리라.
이순신은 29살이던 1573년 별시 무과는 뜻하지 않은 낙마로 낙방했다. 3년을 더 기다려 1576년 2월 식년시 무과에 급제하여 어린 시절 놀러 다녔던 구리개 훈련원의 견습관원 권지훈련원봉사로 첫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그해 12월 종9품 동구비보권관으로 함경도에서 2년여의 국경 근무를 한 뒤, 1579년 2월에 종8품 한성훈련원봉사가 되어 훈련원으로 돌아왔다.
이때 상관이던 정4품 병조정랑 서익이 자신의 친지를 특별 승진시키려 하자, 이순신은 ‘규정 위반’이라며 반대했다. 이에 서익은 10월에 이순신을 충청도 해미 병영으로 보내 버렸다,
다음 해인 1580년에 이순신의 둘째 형 이요신이 세상을 떠났다. 형제간의 우애가 깊었던지라 이순신은 몹시 슬퍼하였다. 이해 7월 이순신은 전라 좌수영 관내 발포진의 종4품 수군만호가 되었다. 당시로는 파격의 인사였다. 이에 전라감사 손식이 능성(화순)으로 이순신을 불렀다. 이때 이순신이 제갈량의 ‘팔진법’ 당나라 이정의 ‘육화진법’을 잘 설명하였다고 한다.
그 발포성 관사에 아름드리 오동나무가 있었다. 전라좌수사 성박이 이 오동나무로 거문고를 만들겠다며 군관을 보냈다. 이순신의 대답은 ‘관청 객사의 나무는 관가, 즉 정부의 소유물이다. 사적인 명령은 따를 수 없다.’였다.
이 성박의 후임은 이용이었다. 이용은 자신의 관할 지역 5곳 진을 불시에 점검하며 발포에 이르렀다. 다른 곳보다 우수했지만, 발포진을 콕 집어 근무 태만으로 전라감영에 보고했다. 이때 임진왜란의 의병장인 조헌이 전라감영의 도사였다. 조헌은 이순신의 억울함을 알고 평가를 바로 잡았다.
하지만 어떻게든지 이순신을 내치려고 벼르고 있던 서익은 이때다 싶었다. 1582년 1월 군기경차관으로 발포진을 둘러보고 또다시 근무 태만이란 거짓 보고를 올렸다. 결국, 이순신은 파직되었다가 그해 5월에 종8품 훈련원 봉사로 복직되는 우여곡절을 겪었다.
여기 발포진은 1439년에 설치되어 1490년 성을 쌓았고 1894년에 폐성 되었다. 임진왜란과 정유재란 때 좌수영 산하의 중요한 수군 기지였다.
이곳 바닷가 바위벼랑에는 슬픈 이야기가 있다. 이순신의 해전에 참전했던 황정록 발포만호는 정유재란의 칠전량에서 적탄에 맞아 전사했다. 이 황정록의 부인 송 씨는 ‘남편이 왜놈 총탄에 죽임을 당하였는데, 우리만 살아서 무엇 하겠느냐’며 아이들을 데리고 바다로 몸을 던져 순절한 곳이다.
또 이곳 석문처럼 생긴 신비로운 활개 바위는 조선시대 조운선이 큰바람이 불면 쉬어 가는 곳이다. 이순신 함선의 훈련 모습이 마치 돛대가 ‘활개 치듯 하다’해서 얻은 이름이다.
하지만 그 무엇보다 여기 발포성의 상징은 오동나무이다. 그때의 나무가 아닌 아직 어린나무지만, 마른내골이나 구리개를 생각하면 이 어린 오동나무의 가르침이 수많은 이순신을 키워낼 것임이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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