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백정기 의사 기념관 백정기 무궁화
백정기는 1896년 1월 19일, 부안읍 운기마을에서 농부인 백남일과 어머니 윤문옥의 2남 2녀 중 장남으로 태어났다. 12살 때인 1907년 이웃고을 정읍시 영원면 갈선마을로 이사하였다.
1914년 19살 때 상경한 뒤, 일본경찰 폭행 및 유괴죄로 일본 경무총감부의 감시대상이 되었다. 1919년 3·1 운동에 기미독립선언서와 태극기를 가지고 고향으로 와 독립만세시위를 이끌었다. 또 동지 4명과 함께 경성과 인천의 일본 군사시설 파괴공작을 계획하다, 일경에게 쫓기자 중국 랴오닝성 선양시로 망명했다.
이듬해인 1920년 겨울 다시 경성으로 와 군자금 조달 등의 활약을 하던 중, 1921년 봄 경성부 본정경찰서에 구금되었으나, 신분을 광부로 위장해 빠져나왔다.
1922년 중국 베이징에 독립운동의 근거지를 두고 조선을 오가며 활동하였다. 1924년 봄, 일본에 밀항하여 후지산 서쪽 야마나시현 하야카와수력발전소 공사장 폭파, 여름에는 122대 왜왕 메이지 텐노를 암살하려 했으나 실패하고 베이징으로 갔다.
1925년 7월 상하이에서 남화청년아나키스트연맹과 함께 10여 만 명의 직공들을 모아 대노동조직을 만들었다. 1927년 가을에는 강소성 남경시와 상하이 등지에서 활동하던 조선인 및 중국인 동지들과 농민자위군을 조직하여 농민자치운동을 했다.
1928년 9월 강소성 남경시에서 개최된 조선, 중국, 일본, 필리핀, 프랑스령 인도차이나, 인도 등 무정부주의자들의 동방무정부주의자연맹대회에 조선인 대표로 참석하였다. 그러나 폐결핵에 걸려 1929년부터 1930년까지 약 1년간 공동 병실에서 요양 생활을 하였다.
1932년 4월 29일 11시 윤봉길의 상하이 훙커우 공원 폭탄 투척 사건이 있었다. 이때 백정기도 중국인 왕야차오에게 권총을 구해 10시에 거사하려 했으나, 받기로 했던 입장권을 얻지 못해 실패하였다. 분노를 누르지 못해 머리칼은 하늘로 치솟고 주먹은 땅을 쳤다.
1933년 3월 17일이다. 주중국 일본 공사 아리요시 아키라가 일본 정객, 중국의 친일 정객, 일제 육군 등 100여 명을 상하이 훙커우의 왜인 요릿집 ‘로쿠산테이’에 초대했다. 이를 탐지하고 아나키스트 동지인 정현섭, 원심창, 이강훈 등과 함께 습격할 순간 일경에 체포되었다.
백정기는 일본으로 끌려가 1933년 11월 24일, 나가사키지방재판소에서 무기징역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던 중 폐결핵이 재발해 1934년 6월 5일 오후 11시에 순국하였다.
‘나는 몇 달 더 못 살 것 같소. 그러나 동지들은 서러워 마오. 내가 죽어도 사상은 죽지 않을 것이며 열매를 맺는 날이 올 것이오. 형들은 자중자애하며 출옥한 후 조국의 자주독립과 겨레의 영예를 위해서 지금 가진 그 의지 그 심경으로 매진하기를 바라오. 평생 죄송스럽고 한 되는 것은 노모에 대한 불효가 막심하다는 것이 잊혀지지 않을 뿐이고, 조국의 자주독립이 오거든 나의 유골을 동지들의 손으로 가져다가 해방된 조국 땅 어디라도 좋으니 묻어주고, 무궁화 꽃 한 송이를 무덤 위에 놓아주기 바라오.’
위의 유언을 남긴 백정기 의사 기념관이 전라북도 정읍시 영원면에 있다. 이 유언처럼 기념관 의열사 뜨락에 아사달 문양의 흰 무궁화 한 그루가 백정기 의사를 기리고 있다, ‘아사달’ 문양은 고조선의 상징으로 산 위에서 뜨는 붉은 해 그리고 음양의 우주원리를 형상화한 태극이니, 오천 년 역사의 자부심이고 자긍심이다. 대대손손 길이 이어갈 북방민족의 기개이다.
참으로 백정기 의사를 기리는 데, 또 어떤 꽃이 있으랴. 붉은 태극문양에 흰 꽃잎의 무궁화 나무 앞에서 조국의 독립에 기꺼이 목숨을 바친 순국열사와 의사, 지사들께 허리를 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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