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읍 이평 말목장터 전봉준 감나무
전라북도의 젖줄 동진강과 정읍천이 만나 서해로 들어가며 펼쳐놓은 배들평야(梨坪)는 말 그대로 지평선에 해가 뜨고 지는 곡창지대이다.
1892년 4월, 그 배들이 있는 고부에 조병갑이 군수로 취임했다. 평양 기녀의 서자이나, 신정왕후 조대비 권력을 등에 업은 조병갑은 희대의 탐관오리였다. 부임하자마자 부모 불효죄, 형제간 불목죄, 잡귀를 즐긴죄, 노름죄 등의 세금으로 삽시간에 2만 냥의 돈을 착복하였다.
그뿐인가? 농민들을 강제로 동원하여 정읍천의 물을 막은 만석보 아래 동진강에 또 하나의 만석보를 만들었다. 그리고 처음 약속과 달리 물세를 거두고 농사를 지을 수 없는 진황지(陳荒地)에도 토지세를 부과했다. 더하여 1841년부터 1845년까지 태인 현감을 지낸 자기 아버지 조규순의 공적비를 세운다고 세금까지 거뒀다. 지금의 권력자 땅 앞으로 세금으로 건설하는 고속도로가 휘어가는 격이니, 최치원 때 세운 태인 피향정의 조규순 영세불망비가 그것이다.
한 해 뒤인 1893년 6월, 마침내 폭발한 고부 농민들은 전봉준의 아버지 전창혁을 찾아가 조병갑의 행태에 항의하는 탄원서를 부탁했다. 그러나 조병갑은 탄원서를 들고 온 농민들에게 곤장을 치고 옥에 가두는 거로 대답했다. 결국, 전창혁은 장독으로 숨을 거두었다.
이에 분노한 전봉준은 1893년 11월 초 농민 40여 명과 조병갑을 찾아가 만석보 물세에 대해 다시 항의했지만, 역시 백성 선동죄로 옥살이를 해야 했다.
11월 하순, 옥에서 나온 전봉준은 농민봉기 계획을 세우고 동학 교인 20여 명과 함께 사발통문을 만들었다. 당시 계획은 ‘고부 관아를 점령하고 조병갑을 처형한다.’ 나아가 ‘전주성을 점령하고 한양으로 상경한다.’였으니 참으로 기세등등이었다.
이때 조정에서 조병갑을 파직했다. 하지만 조병갑은 한 달여 그대로 고부에 머물러 있었다. 그리고 해를 넘겨 1894년 1월 9일 다시 고부 군수가 되었다. 지난 한 달 사이에 무려 여섯 명의 군수가 오간 뒤, 전라감사 김문현이 채 못 걷은 세금을 마저 걷어야 한다고 조정에 장계를 올려 복직이 된 것이다. 당시 매관매직은 공공연한 일로 평양감사는 80만 냥, 경상감사는 60만 냥이고 전라감사 김문현도 20만 냥짜리였다.
이 엉망진창 조선의 민낯 인사는 오늘날 망언, 만행의 구태 인물이 다시 요직에 기용됨과 같다. 이 역사의 되풀이가 씁쓸하나, 타락한 정권은 반드시 몰락이니 역사의 교훈이기도 하다.
그렇게 조병갑이 거드름 팔자걸음으로 고부 관아로 다시 들어선 1894년 1월 9일이다. 이날은 말목장날이었다. 말목은 만석보에서 서쪽으로 약 2km쯤의 부안, 태인, 정읍을 오가는 삼거리이다. 전봉준은 농민들에게 이날 말목장으로 모이라는 통문을 하루 전에 돌렸다.
마침내 그날 밤, 수천 명의 농민이 모여들었다. 걸군(乞軍)이 풍물을 치고 300여 명의 무장 농민군이 전봉준을 호위했다. 전봉준은 ‘아녀자와 노약자는 물러나고 탈출하는 자는 사살하겠다. 조병갑의 불법과 약탈 탐학을 문죄하자’고 외쳤고 피 끓는 우레와 같은 함성이 화답했다. 흰옷과 죽창의 ‘앉으면 죽산, 서면 백산’의 넘실대는 파도가 곧추서서 휩쓰는 해일이 되었다.
그리 밤을 밝힌 1월 10일, 약 500명의 농민군이 고부관아로 갔고, 새벽 2시경 관아를 점령했다. 하지만 주먹 날리며 눈 부라리던 조병갑은 이미 쥐새끼처럼 달아나고 없었다.
그날 말목장터에서 전봉준이 기대어 쉬었던 감나무가 있었다. 180여 살 그 감나무가 2003년 고사하자, 새 감나무를 심었다. 이 새 감나무 앞에서 오직 김문현식 인사, 조병갑류 인물뿐인 현 시국을 개탄하며, 전봉준의 ‘불법과 약탈 탐학을 문죄하자’는 함성을 다시 듣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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