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흥 반계사 정경달 배롱나무
장흥 장동면의 반계사는 본관이 영광, 자가 이회(而晦), 호가 반곡(盤谷)인 정경달(丁景達 1542~1602)을 모신 사우이자, 서원이다. 정경달은 임란에 둔전과 염전을 관리하고, 도자기를 굽고, 피난민에게 해운업을 열어 어염, 포목 등을 확보한 조선 수군 최고의 장수이자, 병참 참모이며 선각자이다. 또, 명 장수들과 소통을 담당한 외교가였다.
정경달은 장흥 장동 반산리 우리 이름으로 ‘서리’인 ‘상산’에서 태어났다. 1570년 식년시 문과에 급제 종6품 가평현감, 정5품 형조정랑을 거쳐 1591년 6월 종3품 선산도호부사가 되었다. 이듬해에 왜란을 맞아 1592년 4월 15일부터 1595년 11월 25일까지, 1597년 1월 1일부터 1602년 12월 17일까지의 ‘반곡 난중일기’를 남겼다.
정경달은 왜선이 4월 13일 부산 앞바다로 들어온 걸 이틀 뒤 알았다. 왜적 방어 전략인 제승방략에 따라 부산으로 군사를 이끌고 갔으나, 동래읍성의 함락에 22일 선산으로 돌아왔다. 4월 28일 상주와 선산읍으로 물밀 듯 몰려오는 왜를 금오산에 진을 치고 막았다.
이듬해인 1593년 4월 23일, 정경달은 ‘천병접대도차사원’으로 명군 장수 접대와 군량미 공급의 책임을 맡았다. 이해 7월 3일 건강이 안 좋아 관직에서 물러나고 싶다는 편지를 류성룡에게 보내 허락을 받고 9월 10일 고향 장흥으로 왔다.
이 소식을 삼도수군통제사에 오른 이순신이 들었다. 정경달은 이순신의 간절한 부탁과 류성룡의 권유를 받아들였다, 1594년 2월 26일, 이순신의 종사관으로 한산도에 부임했다.
역시 정경달이었다, ‘한산도의 수군과 격군은 굶주린 지 이미 오래여서 한두 달을 넘기지 못할 것이며, 지난해 사망한 병졸의 해골이 해변에 쌓인’ 상황을 혼신의 힘으로 헤쳐나갔다.
1597년 3월 이순신이 원균의 모략으로 옥에 갇혔을 때이다. 정경달은 선조를 만나 이순신의 방면을 하소연했으나, 임지를 맘대로 떠났다며 곤장 50대를 맞았다.
그리고 명량대첩 때이다. 이때 아들 정명렬이 군량미를 배에 가득 싣고 와 조선 수군의 기세를 돋우었고 해전에도 함께 참전하였다.
1598년 4월 6일, 정경달은 사직하고 장흥으로 왔으나 6월 3일 청주목사로 발령받았다. 임무는 역시 명군 접대였다. ‘명나라 병부주사 정응태의 행차에 관용 마필(刷馬) 준비가 매끄럽지 못하다고 곤장을 맞고 밤새 곤욕을 치렀다’ 11월 6일의 일기 내용이다.
이 일로 사직하고 고향으로 돌아온 12월 30일의 일기이다. ‘봄에는 가족으로 근심했고 여름에는 청주에서 곤욕을 치렀고, 겨울에 이르러서도 충주에서 곤욕을 당하였으니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불행한 해였다’ 왜적보다 명군에게 더 깊은 마음의 상처를 얻었으니, 나라가 없으면 어찌 살게 되는지를 알려주는 역사의 기록이다.
반계사는 1714년 숙종 때 세워졌다, 한때는 천자문과 사자소학을 옆구리에 낀 학동이 들락이고, 갓에 도포 자락 휘날리던 선비가 찾아와, 글 읽는 소리가 호박넝쿨처럼 담장을 넘었을 테다. 하지만 이제 대문간에서 왈왈 반기던 강아지도 없고 새벽잠을 깨우던 닭울음 소리도 들리지 않으니, 인걸만 가는 게 아니고 산천도 의구하지 않다.
가만있어도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한여름 더위이다. 반계사에 이르러 허리께의 풀숲을 헤치고 충의문을 우러르니, 사우를 지키는 방아깨비와 메뚜기가 이리저리 뛰고 풀숲 여치가 목청 높여 나그네를 맞는다. 송이송이 피어나는 붉은 배롱꽃이 푸른 하늘의 흰구름과 어울리니 그날 정경달의 고뇌가 오늘 나에게 평화가 되는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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