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경남 산청 문익점 목화소나무

운당 2024. 11. 8. 05:32

경남 산청 문익점 목화소나무

 

목화는 식물 이름이고 두 번 꽃이 핀다. 초여름부터 피는 첫 다섯 꽃잎은 처음엔 하얗지만, 점차 붉어져 다래라는 열매가 된다. 이 다래는 농부에게는 돈이고 아이들에게는 달착지근한 간식거리다. 두 번째 꽃은 다래가 다섯 갈래로 벌어진 하얀 솜꽃으로 면화(棉花)이다.

여기서 씨앗을 빼낸 솜에서 실을 뽑아 옷감을 만들면 면(綿), 무명, 명이라 한다. 남쪽 지방에서는 목화를 미영이라고도 한다. 무명은 목면(木綿)의 중국어인 무멘의 음차인 듯싶으나 목화솜에서 실을 뽑는 실 잣는 기구 물레는 발명자인 문익점의 손자 문래(文萊)와 문영(文英)의 이름에서 유래한다.

우리의 의생활에 일대 전환기를 가져온 이 목화는 고려말 문익점이 중국에서 들여온 것이다. 물론 이보다 앞서 백제 위덕왕 시기로 추정하는 충남 부여군 능산리의 절 유적에서 목화의 면직물이 발견되었다. 하지만 이것으로 백제 시대부터 목화를 재배했다고 할 수는 없다.

훗날 조식은 우리나라 의복 혁명을 가져온 문익점의 공을 기려 목면화기일반 백성들에게 값싸고 질 좋은 옷을 입게 된 것이 농사를 시작한 옛 중국의 신농하고 후직 씨 같다(衣被生民 神農 后稷氏同)’고 썼다.

문익점이 중국에서 목화씨를 가져오게 된 것은 13634, 문하좌시중 이공수의 서장관으로 원나라에 사신으로 갔던 때문이다. 이때 원의 벼슬아치인 고려인 최유는 볼모로 와있던 충선왕의 셋째 덕흥군을 왕으로 옹립하고 공민왕을 몰아내려 했다. 하지만 문익점은 그해 11월 최유의 덕흥군 왕 옹립에 반대했던 관계로 중국 강남으로 유배를 갔다.

그리고 최유는 다음 해인 13641, 원의 군사 1만 명을 얻어 고려를 향해 요동까지 진군했으나 최영, 이성계 등에게 패하였다.

1366년 유배가 풀린 문익점은 북경으로 돌아왔고, 이듬해인 1367년 개경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그리고 이때 강남에서 보았던 목화씨가 북경 근처의 밭에서도 자라는 것을 보고 그 씨앗을 붓두껍 속에 담아왔다.

이해 문익점은 정3품인 중현대부 예문관제학 겸 지제교가 되었으나 휴직을 청하고 귀향하였다. 그리고 목화씨를 장인 정천익과 함께 밭에 심었으나 발아에 실패했다. 하지만 정천익이 심은 씨앗 하나에서 꽃이 피어 마침내 3년 만에 다량의 씨앗을 얻을 수 있었다. 또 정천익이 인도의 승려 홍원’(弘願)에게 목화에서 씨를 빼는 씨아(취자거)와 실을 뽑는 기계(소사거) 만드는 방법을 얻었다. 문익점은 목화 씨앗을 농민들에게 나누어주며 대량재배에 나섰고, 그의 손주들은 씨아와 물레를 완성하여 농민들에게 널리 보급했다.

문익점이 태어난 마을 이름은 효자리이다. 문익점은 부친상을 당하여 1369년부터 3년간 시묘를 살았다. 또 모친상으로 1376년부터 3년간 시묘를 살았다. 이때 왜구의 침입이 있었다. 왜구의 약탈에 모두 피난하였지만, 문익점은 여막을 지켰다. 왜구는 감동하여 효자를 해치지 말라는 나무 비를 세우고 물러갔다. 우왕 9년인 1383, 이성계의 추천으로 문익점이 태어난 마을은 정려와 함께 효자리가 되었다.

이 효자비가 있는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는 면화시배지이고, 이웃 신안면 신안리에 문익점을 기리는 도천서원과 가까이에 묘가 있다. 묘에 이르면 문인석, 망주석, 석등이 선생을 잘 모시고 있는데, 몇 그루 소나무에 걸려있는 흰구름이 마치 목화꽃송이 같다.

오늘 내가 입은 면 속옷이 편하거든, 아이들 손 잡고 선생을 뵈러 산청고을에 가볼 일이다.

산청 문익점 묘 목화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