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담양 면앙정 송순 상수리나무

운당 2025. 1. 2. 08:02

담양 면앙정 송순 상수리나무

 

조선의 큰 선비이고 시조와 가사를 반석에 올린 대문호이자 정치가인 송순은 1493년 담양군 봉산면 기곡리 상덕마을에서 태어났다. 당시 마을 이름은 두모곡이었다. 송순이 대여섯 살의 어릴 때다. 문득 자신이 누구이며 왜 이곳에 사는지가 궁금해 아버지께 여쭈었다.

아버님! 우리가 언제부터 이곳에 살았어요?”

우린 신평 송씨다. 시조는 구자, 진자, 송구진이시다. 우리 시조는 충청남도 신평에서 4대까지 살았다. 그리고 5대조 , ‘, 송희경 할아버님이 전라남도 추성, 지금의 담양으로 이주해오셨다.”

이날 송순은 자신이 신평 송씨 시조 송구진의 10세손이라는 것도 알았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했다. 송순은 영특했다. 3세 때부터 글을 읽을 줄 알았다. 보는 사람마다 신동이고 천재라고 했다.

보통 아이가 아니오. 내가 가르치겠소.”

그러자 집안 아저씨인 송흠이 송순을 가르치겠다고 나섰다. 송흠은 송구진 시조로부터는 9세손이다. 그러니 촌수로 따지면 송흠은 송순의 9촌 아저씨뻘이다. 나이도 34살 위였다.

송흠은 1459년에 태어나 1480년 사마시에 합격하였다. 1492년 식년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외교에 관한 문서를 맡은 관청인 승문원에 근무하였다.

1494년이다. 연산군의 포악한 정치에 송흠은 벼슬을 버리고 고향인 전라남도 장성 삼계로 내려왔다. 1506년 연산군이 쫓겨나고 중종 임금 시대가 되었다. 송흠은 다시 벼슬길에 나가 전주 부윤, 광주 목사, 나주 목사를 거쳐 1534년에 전라도 관찰사를 지냈다. 1540년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 마을 앞 시냇가에 관수정을 짓고, 제자들을 가르치며 88살인 1547년까지 살았다. 송순이 송흠에게 공부를 하게 된 것은 연산군 때다.

송순이 여덟 살이던 1501년이다. 어느 날 송순이 쓴 시를 보고 송흠이 물었다.

이 시는 네가 지었느냐?”

그렇습니다.”

어디 읽어보아라.”

송순은 자신이 쓴 시 새의 죽음을 슬퍼하며를 또랑또랑 소리 내어 읽었다.

나는 엄연히 사람이고 너는 한갓 새일 뿐이니/ 새의 죽음에 사람의 슬픈 눈물은 이치에 안 맞으나/ 네가 나로 인해 죽었으니 그게 슬프다.’

송순의 시 곡조문에 스승인 송흠은 물론이요, 사람들도 깜짝 놀랐다.

마침내 송순은 26살이던 1519년 중종 14년 별시문과에 급제하였고 여러 요직을 거쳤다. 그러던 중 1533년 당시 이조 판서이자 왕실의 외척인 김안로가 권세를 휘두르며 무자비한 정치를 했다. 송순은 벼슬에서 물러나 고향으로 내려왔다.

이때 비 갠 하늘의 밝고 환한 달빛이라는 제월봉에 굽어보면 땅이요 올려다보면 하늘이라는 뜻의 초가정자인 면앙정을 지었다. 또 면앙정 둘레에 보릿고개의 굶주리는 백성을 위해 구황나무인 상수리나무를 심었다. 지금의 2~3백 살 아름드리 상수리나무들은 모두 그때 심은 나무의 후손이다. 면앙정의 이 아름드리 상수리나무 앞에서 송순의 애민정신에 감읍하고, ‘멀고 가까운 푸른 언덕에 머문 것이 많기도 하다/ 흰구름 뿌연 안개/ 푸른 것은 산 아지랑이라73행 면앙정가의 아름다운 우리 말 시구에 감동한다.

담양 면앙정 상수리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