순천 송천사 김대인 멀구슬나무
순천과 여수, 고흥에 첨산(尖山)이 있다. 순천 별량과 여수시 화치동, 고흥 동강의 송곳처럼 뾰족한 3개의 산이 그것이다.
김대인은 조선 왜란 7년전쟁의 용장이자, 맹장이다. 순천시 별량면 첨산 아래의 송천사는 김대인, 김일손, 김치모를 배향한 사우이고 뒷산에 묘가 있는데, 들머리에 두어 아름의 멀구슬나무가 수문장처럼 서 있다. 그리고 송천사가 있는 별량의 첨산이 이 삼각형의 꼭짓점이다.
김대인은 이 별량 첨산 아래에서 통덕랑 김유손의 아들로 태어났다. 또 송천사에 함께 배향된 탁영공 김일손은 작은 아버지이다. 그렇게 명문가 집안에서 태어났지만, 김대인은 어린 시절 자신이 서출이란 걸 알고 지리산 칠불사로 들어가 해공대사에게 불도와 무예를 배웠다. 신분을 속이고 무과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했으나 서출이란 게 밝혀져 관직을 받지 못했다.
환속하여 여수 석창의 석보촌에 있을 때인 1592년에 왜란이 터졌다. 여수 흥국사 주지 기암이 그를 설득하여 승병 훈련대장으로 삼았다. 또 그의 용맹성이 이순신에게 알려졌다. 이순신은 기골이 장대하고 무예의 달인이며, 바른 품성과 학식을 지닌 그를 알아보았다. 김대인은 여수 좌수영군의 군율과 기강을 세우고 전투에서는 선봉장으로 전공을 세워 부장이 되었다.
1597년 이순신이 투옥되자, 원균의 수군으로 칠천량에서 싸우다 물에 빠졌으나, 초인적인 의지로 칼과 활을 잃지 않고 사흘 만에 살아나왔다. 의병 수백 명을 모집하여 연해안 곳곳에서 적과 싸웠다. 광양에서 흉탄에 맞고도 칼을 놓지 않았으며, 승전 뒤에야 스스로 탄환을 뽑아냈다. 그 뒤 화순 춘양면 예성산에 웅거하며 화순과 남해안 일대의 왜적을 섬멸하였다.
1600년 그 공으로 당상관에 올라 지금의 영광인 ‘임치진첨절제사’에 임명되었다. 허나 불의를 참지 못하는 강직한 성격이었다. 전라좌수사 이유직의 비행을 면박하며 맞서다가 의금부에 투옥되고 모진 고문을 받았다. 옥졸이 뇌물을 주면 방면될 수 있다고 하자, 분을 참지 못하고 피를 토하며 죽었다.
순천의 근대 문인 벽소 이영민의 순천가에 ‘별량 첨산을 향하여 송천사에 이르러 임진충의 청년장군 김대인 사적을 찾아본 후 도선암을 지나 안동을 돌아드니’로 김대인을 추모했다.
이 김대인의 묘소 들머리의 멀구슬나무는 난대 수종으로 참죽나무와 함께 우리나라에 2속 2종만 존재한다. ‘멀구슬’의 ‘멀’은 ‘똥’이라는 옛말로 노오란 열매 색깔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 열매로 염주를 만들어 목에 걸어 ‘목구슬나무’, 또 잎사귀는 신선이 먹는다고 한다.
제주도에서는 오동처럼 잘 자라고 나무 무늬가 아름다워 딸이 시집갈 때의 장롱나무였다. 또 가을에 줄기 껍질을 햇볕에 말려 고련피, 열매를 밀려 고련자, 뿌리를 말려 고련근이니 해열제와 구충제였다. 동상에는 열매 달인 물로 찜질을 하거나 가루를 동백기름에 개어 발랐다.
인도인들은 ‘님(Neem)’이라고 하는 인도 멀구슬나무를 만병통치약으로 여기고 힌두교도들은 피를 맑게 한다며 새해맞이로 나뭇잎을 먹었다. 가지로는 이를 닦고, 잎의 즙은 피부병에 바르고, 차를 강장제로 마시니 ‘마을 약국’ 나무라고 했다. 또 이 나무의 살란닌 성분은 130여 종의 곤충을 쫓으니 방충제 원료이다. 우리나라에서도 모기를 쫓는 나무로 썼으며 열매는 구충제와 살충제로 이용하였다.
고흥의 첨산을 숫첨산이고 김대인이 태어난 순천 별량의 첨산은 암첨산이라고 한다. 예로부터 국가에 큰 변란에 이 암첨산에서 통곡 소리가 났다 하고, 구충제와 살충제로 쓰이는 멀구슬나무가 김대인의 묘를 지키고 있으니 이는 알 수 없는 신비이지만 당연한 일임에 틀림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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