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하동읍성 신진 팽나무
하동은 섬진강의 동쪽 고을이어서 얻은 이름이다. 해 뜨는 동쪽에 덕천강, 그 해를 받는 서쪽에 섬진강을 끼고 남원, 함양, 산청, 진주, 사천, 남해, 광양 여수 등과 이웃하는 뭇 고을의 중심지이다. 여기 하동읍성은 고전면의 그리 높지 않은 양경산(149m)에 쌓은 산성이다. 조선 태종 17년(1417) 해안에 쌓은 연해읍성이자 석축성이다. 계곡을 감싸듯 쌓은 마름모꼴의 성 아래 주교천에는 배가 드나들었다. 배다리(배드리)는 그때의 이름이고, 1980년대까지도 하동의 가장 큰 5일장이었다.
정유재란인 1597년 7월 16일이다. 이순신이 없는 원균의 조선 수군은 칠천량에서 어이없이 무너졌다. 판옥선 한 척으로 왜 함대를 물리친다는 조선수군이 사라지자, 왜군은 고성, 사천, 남해, 하동·광양 등을 짓밟으며 물밀 듯 섬진강을 올라왔다. 구례 석주관이 뚫리고 8월 16일 남원성이 무너졌다. 이 남원성 전투 사흘 뒤인 19일이다. 진주성에 무혈입성한 가토 기요마사의 왜병 1,000여 명이 방화와 약탈을 자행하면서 화엄사를 불태웠다. 이순신 파직과 하옥의 원인이 된 이 가토의 왜병에게 하동읍성의 관아와 객사, 향교 등도 한 줌 재가 되었다.
그렇게 하동읍성이 불에 타기 전인 1597년 4월 1일이다. 옥에 갇혀 죽음을 눈앞에 두었던 이순신이 백의종군을 하기 위해 의금부를 나와 도원수 권율이 있는 합천을 향했다. 5월 26일(양력 7월 10일) 이순신은 하동군 악양면 평사리의 김덕린이 빌려 사는 이정란의 집에 도착했다. 이 김덕린은 1596년 이괄의 반란에 가담한 역모 혐의를 받고 옥사한 의병장 김덕령의 동생이다. 자신도 역적 집안의 신세가 되어 죄인처럼 숨어 사는데, 역시 죄인의 신분으로 찾아온 이순신이 반갑지 않았을 터이다. 그날의 난중일기이다.
‘비가 퍼붓듯이 쏟아진다. 말을 쉬게 했지만, 엎어지고 자빠지며 간신히 악양 이정란의 집에 이르렀으나, 문을 닫고 거절당했다. 김덕령의 아우 김덕린이 빌려 쓰는 집이다. 나는 아들 열로 하여금 억지를 대고서 들어가 잤다. 행장이 흠뻑 다 젖었다.’
그렇게 이순신은 이 집에서 어렵게 하룻밤을 보내고 다음 날은 하동읍 서해량(읍내 삼거리)의 최춘룡의 집에서 묵었다.
5월 28일 이순신은 종6품 현감 신진이 다스리는 하동읍성에 들렸다. 신진이 반갑게 맞이하여 성안의 별채로 안내하고 정성껏 대접하였다. 하동은 삼도수군통제사가 관할하는 고을이다. 신진은 1595년부터 1598년까지 하동현감을 지냈고, 이순신은 1593년부터 1597년 의금부에 하옥되기까지 삼도수군통제사였다. 신진은 이순신이 지휘를 받던 고을 수령이었다.
두 사람은 반갑게 날이 저물도록 이야기를 나누었다. 이순신은 전투에 나서 한 번도 패한 적이 없는 용장이자, 아군의 피해를 최소화하는 지략의 지장이며, 백성을 먼저 생각하는 덕장이다. 그러나 원균의 모함과 선조의 어리석은 판단으로 죄인의 신분이 된 이순신의 누추한 모습에 신진은 가슴이 찢어질 듯 아팠다. 그날 5월 29일의 난중일기이다.
‘몸이 너무 불편하여 길을 떠날 수가 없었다. 그래서 그대로 머물러서 몸조리했다. 하동현감이 정다운 이야기를 많이 했다.’
이 하동읍성 성벽에 한 그루 팽나무가 수문장으로 서 있다. ‘사람에게 충성하지 않는다’는 궤변으로 ‘사람’의 집합체인 ‘국민’이 아닌 사대주의 독재자, 세금 착복자, 주술사 등에게 충성하는 세태이다. 성벽에 의지하여 고개 숙인 팽나무가 이순신이 곧 백성이라며 정성껏 대접한 진정한 사람에 대한 현감 신진의 충성이라 여겨 나무처럼 허리를 굽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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