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49

송순 회방연 시연에 붙여

송순 회방연 시연에 붙여 한 세대가 30년이니, 이제 두어 세대 전 이야기가 되었다. 그때 손주가 아프면 할머니는 하얀 무명 자루에 쌀을 넣어 아픈 부위를 꾹꾹 눌러주고 쓸어주었다. 입으로는 중얼중얼 주문인지, 노래인지를 흥얼거렸다. 바로 잔밥 시술이다. 집안의 안 주인인 아낙은 장독대에 정화수, 부뚜막 토대에 조왕물 올려 천지신명께 두 손 비비며 빌었다. 마을 앞 당산나무에도 빌었고, 서낭당도 그냥 지나치지 않았다. 이때도 중얼중얼 주문인지, 노래인지를 흥얼거렸다. ‘비나이다. 비나이다. ◯◯님께 비나이다. 어디 사는 아무개의 소망’이라며 조상, 조왕, 당산, 서낭, 산신, 용왕께 빌었다. 그 기원과 소망의 중얼거림은 경문이고, 시이며, 이 세상 가장 아름답고 신비로운 노래이고 신과 합일하는 음률이었다..

칼럼 2023.10.14

밀양 표충사 유정 베롱나무

밀양 표충사 유정 배롱나무 사명대사(1544~1610)의 당호는 사명당이고 법명은 유정이며 속성은 임(任), 어릴 적 이름은 응규이다. 1544년 경남 밀양에서 임수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황악산 직지사에서 승려가 되어 명종 16년(1561) 선과에 급제하였다. 묘향산 보현사의 서산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금강산 등 각처를 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사명대사 유정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승인 휴정의 격문을 받고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승병을 일으켰다.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해 3월에는 서울 인근의 노원평과 우환동, 수락산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74세의 휴정이 자신의 직함인 팔도도총섭의 직함을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

칼럼 2023.10.06

웃퍼서

웃퍼서 한껏 슬프면 꺼이꺼이 소리도 절로, 눈물도 절로이다. 그러나 때로는 그 울음도 잊으니, 골수에 슬픔이 맺히면 눈동자가 풀어지고 소리도 눈물도 없다. 그 헛웃음은 앙천대소이니 인간사의 잘못을 그저 모른 체하는 하늘을 원망하는 비웃음이다. 살다 살다 별꼴을 다 보는 게 인생사지만 홍범도 장군의 흉상을 치우는 자들의 가당찮은 이유와 작태에 앙천대소한다. 웃기기도 하고 슬프기도 하니 ‘웃퍼서’이다. 육군사관학교 교내에 독립군 영웅 김좌진, 홍범도, 지청천, 이범석 장군과 신흥무관학교 설립자 이회영 선생의 흉상이 있었다. 이분들의 자리를 옮기고 홍범도 장군 흉상은 아예 치운다고 한다. 또 국무총리가 나서서 해군함정 홍범도함의 이름도 교체 대상이라 한다. 도대체 왜 이러는지 이해 불가지만, 짐작은 한다. 1..

칼럼 2023.10.04

봄마저 빼앗네

봄마저 빼앗네 지난 2023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 내 귀를 의심했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잠깐 흘려들었기에 잘 못 들었겠지 했으나, 내뱉은 독설이 기우가 아니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이다.’,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진보운동가 세력으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해왔다.’ 그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했던 주요 내용이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이 건국운동이라는 말은 헌법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8월..

칼럼 2023.09.04

참 궁금하다

참 궁금하다 지난 긴 장마의 폭우는 재난을 넘어 재앙이었다. 이럴 때면 또 듣는 말, ‘나는 화상회의도 했다. 뛰어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라는 남 탓, 나 몰라 재앙도 절망 그 자체였다. 그중 7월 15일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 7월 19일 경북 예천의 10년 만에 얻은 외아들 채수근 상병의 어이없는 죽음은 장맛비가 그저 눈물이었다. 또 이는 인재이며 그 와중에 명품쇼핑, 양평고속도로 논란까지 겹쳐 이러니 하늘도 우릴 버렸구나 싶었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아픔이고 슬픔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잊거나, 잊히지 않아야겠기에 그날을 다시 반추한다. 더욱 오송 참사는 또 그 지긋지긋한 4대강 사업으로 귀결되니, 기가 막힌다. 댐은 강 상류에, 보는 하류에 건설하여 홍수와 가뭄 예방, 발전,..

칼럼 2023.08.18

꿀벌과 함께

꿀벌과 함께 유엔 식량농업기구의 2018년 발표에 따르면 세계 100대 농산물 생산량에서 꿀벌의 기여도가 71%이다. 이렇게 70% 이상의 수분작용을 해주는 한 종류의 곤충은 벌밖에 없다. 그린피스(2017)는 이 벌의 경제적 가치를 373조 원으로 추산했다. 꽃이 지구에 등장한 것은 약 1억 년 전이다. 벌은 약 1억 5천만 년 전에 생겼다. 그렇다면 꽃보다 먼저 삶을 시작한 벌은 무엇을 먹었을까? 그때는 말벌처럼 작은 곤충을 잡아먹었던 육식 곤충이었다. 어느 날 이 벌이 꽃에 있는 작은 벌레를 잡아먹으며 꽃가루와 꿀을 먹었다. ‘야, 이거 맛있네.’ 그래서 벌의 식단이 바뀌었고, 그중 일부가 지금의 꿀벌로 진화했다. 이는 또 축복이었다. 벌의 몸에 묻은 꽃가루가 여기저기 꽃과 가루받이가 되면서 다양한..

칼럼 2023.06.08

다시 껍데기는 가라

다시 껍데기는 가라 가장 좋은 세상은 어떤 곳일까? 모두가 다 자기 하고 싶은 일 하면서 사는 세상 아닐까? 누구는 그걸 평화라고 하고 자유라고도 할 것이다. 그런데 평화는 너와 내가 좋아야 하니까 평등이 기반이다. 있는 만큼 서로 사이좋게 나누면 된다. 그래서 평화는 함께 누리는 것이다. 하지만 자유는 너와 내가 충돌한다. 서로 먼저, 많이 차지하려고 다툰다. ‘누가 힘이 약하라 했어? 돈이 없으라 했어?’라며 눈 부라린다. 그렇게 자유는 제 눈에 안경이니 방임, 방기이다. 올해는 5·18 43주년이다. 그날 세상을 떠난 분과 유가족의 통렬한 회한, 계엄군에 짓밟히고, 옥고에 고문을 당한 부상자의 고초와 고통을 그 무엇으로 보상하랴. 이제 광주의 5·18은 대법원 확정판결, 국가기념일 제정, 국립묘지 ..

칼럼 2023.05.31

교활과 낭패

교활과 낭패 교와 활은 중국의 기서 ‘산해경’에 등장하는 두 마리의 상상 동물이다. 이중 교(狡)는 개의 모습에 표범 무늬, 머리에 쇠뿔이 달렸다. 이 교가 나타나면 대풍년인데, 워낙 간사하여 나올 듯 말 듯 애만 태우고 끝내 나오지 않는다. 또 교의 친구 활(猾)은 교보다 더 간악하다. 생김새는 사람인데 돼지 털이 온몸에 숭숭하고, 세 살 도리질에 나무가 도끼에 찍히는 소리로 운다. 동굴에서 겨울잠을 자는데, 이놈이 나타나면 온 천하가 혼란해진다. 이 교와 활이 호랑이를 만나면 둘이 몸을 똘똘 뭉쳐 공처럼 된다. 호랑이 입속으로 또르르 뛰어들어 내장을 파먹는다. 고통에 몸부림치다 호랑이가 죽으면 유유히 걸어 나와 미소를 짓는다. 관용구 ‘교활한 미소’는 여기에서 비롯되었다. 역시 전설 속의 낭패도 상상..

칼럼 2023.04.24

독도만 남았다

독도만 남았다 운명은 인간을 포함한 우주의 일체를 지배하는 초인간적인 힘을 가리킨다. 명운은 앞날의 일이나 삶과 죽음의 처지이다. 그렇게 운명과 명운의 앞뒤 말이 바뀌면 그 뜻도 새삼 달라진다. 그럼에도 운명이건 명운이건 인간의 힘이나 노력으로는 어찌할 수 없음이다. 하지만 어떤 이는 진인사대천명처럼 할 일을 다 하고 하늘의 뜻을 기다려야 한다고 말한다. 또 어떤 이는 지성이면 감천이니, 온갖 열과 성을 다하면 하늘도 감응한다고 말한다. 이를 두고 중국 춘추전국시대의 공자는 이슬방울이 모여서 바다를 이루고, 산을 움직이려면 작은 돌을 들어내는 것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가르쳤다. 역시 춘추전국시대의 도가 사상가인 열자의 ‘탕문편(湯問篇)’에 ‘우공이산’이란 고사가 있다. 나이 아흔에 이른 우공이 북산에 살았..

칼럼 2023.04.04

봄봄봄

지난겨울 폭설이 내린 뒤다. 솔숲 산책길에 팔뚝만 한 솔가지가 눈 무게를 이기지 못하고 뚝 부러져 있었다. 그러더니 이제 그 눈은 흔적도 없이 녹아 봄이 되었다. 어느 초등 1학년 아이가 눈이 녹으면 무엇이 될까? 라는 물음에 ‘봄이 돼요’라고 대답한 것이 맞은 것이다. 우수는 눈 대신 비가 내리고, 얼음이 녹아서 물이 된다는 절기이다. 그 우수에 어김없이 비가 내렸고, 팔뚝만 한 가지가 부러진 소나무의 솔잎에 하얀 알갱이로 방울방울 달려 있었다. 또 그렇게 봄은 대동강물이 풀리고 개구리가 깨어나는 경칩을 지나 어김없이 깊어갈 것이다. 봄은 참 좋은 계절이다. 춥고 삭막한 겨울이 가고 마른 가지에 새움이 트니 새봄이고, 다시 보니 다시봄이고, 또 왔으니 또봄이다. 그 봄을 사이좋게 마주 보면 마주봄이고,..

칼럼 2023.03.17