봄마저 빼앗네
지난 2023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 내 귀를 의심했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잠깐 흘려들었기에 잘 못 들었겠지 했으나, 내뱉은 독설이 기우가 아니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이다.’,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진보운동가 세력으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해왔다.’
그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했던 주요 내용이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이 건국운동이라는 말은 헌법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8월 15일 무조건 항복을 했다. 이에 조선은 해방이 되고 광복을 맞았다. 하지만 이날 이후 미 육군 제24군단이 점령하여 1945년 9월 9일부터 1948년 8월 15일 대한민국 정부 수립까지, ‘조선 미국 육군사령부 군정청’은 조선총독부의 한반도 행정권, 치안권 등을 이어받아 38도선 이하 한반도(및 그 부속 도서)를 통치했다.
따라서 1948년 이승만 정권이 한국을 건국했다고 하면, 1910년 8월 29일부터 1945년 8월 14일까지는 일본이었고, 45년 9월 9일부터 48년 8월 14일까지는 미국이었다. 조선과 대한민국 사이에 일본과 미국이 들어서는 것이며, 당시 우리는 일본인이고, 미국인이 된다.
그렇게 1948년 8월 15일에야 비로소 대한민국이 되었으니, 일본이 독도가 자기네 땅이라고 우겨도 할 말이 없게 된다. 일본에게 내선일체의 조선을 인계받은 미국이 동해를 일본해라고 하는 것도 틀린 말이 아니게 된다. 나아가 후쿠시마 원전 핵 폐수인 오염수 방류에 나 몰라를 넘어 10억여 예산의 홍보 영상까지 만들어 찬성하고 거든다. 이에 앞장서고 동조하는 세력이나 집단이 그때의 일본인이고 미국인이 아니고서야 어찌 그런 매국노 짓을 하겠느냐 싶다.
그렇게 일제는 내선일체라는 말로 조선인은 일본인과 같은 황국신민이라고 했다. 이를 거부하는 조선인은 ‘불령선인’이었다. 이 말은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이다’와 뜻이 통한다. 한때는 조선이 일본과 내선일체로 같은 국가였으니, 파트너는 당연지사인 것이다.
또 이 당연지사를 의심하는 자는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진보운동가 세력으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하는 불령선인이고 ‘반국가세력’이다.
참으로 무서운 말이다. 그냥 범죄도 아니고 반국가사범이니, 전시이면 즉결처분이고 최고 사형이다. 자기가 옳다는 생각은 확정신념이고, 자기만이 옳다고 하면 확정편향이고, 그 자기만이 옳다고 상대를 탄압하면 확정범죄이다. 이게 개인의 일이어도 문제지만, 힘과 권력을 가진 자라면 무서운 결과를 초래할 수 있다. 히틀러와 무솔리니가 그렇고, 일제 군벌, 쿠데타와 민간학살로 집권한 군부독재가 바로 역사의 교훈이다.
일부 집권층이 탐욕과 실책을 감추려고 추잡한 전쟁을 일으키지만, 좋은 전쟁, 착한 전쟁은 없다. 전쟁을 부추기거나, 일으킨 자는 그가 누구이든 역사의 죄인이며, 진정한 반국가사범이다. 특히 그와 같은 확정범죄를 비판하면 곧 자유·민주주의의 적이라는, 전형적인 선악 이분법은 증오와 전쟁의 실마리였다. 6·25의 양민학살, 보복 살육이 바로 그 증거이다.
나아가 육사 교정의 독립영웅 홍범도 장군의 흉상 철거도 확정범죄 세력의 독립군 역사 지우기인 친일 행각이자 역사의 반역이다. 매국노가 나라의 주인인 백성에게 큰소리치는 격이니, 적반하장은 이럴 때 쓰는 말이다. 상황이 이러하니 한여름 열대야의 참으로 끔찍한 경축사였다. ‘지금은 남의 땅, 빼앗긴 들에도 봄은 오는가? 그러나, 지금은 들을 빼앗겨 봄조차 빼앗기겠네.’ 이상화 시인의 시구를 읊조리며 불면의 밤을 벌겋게 지새웠다.
'칼럼' 카테고리의 다른 글
밀양 표충사 유정 베롱나무 (0) | 2023.10.06 |
---|---|
웃퍼서 (1) | 2023.10.04 |
참 궁금하다 (0) | 2023.08.18 |
꿀벌과 함께 (0) | 2023.06.08 |
다시 껍데기는 가라 (0) | 2023.05.31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