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 표충사 유정 배롱나무
사명대사(1544~1610)의 당호는 사명당이고 법명은 유정이며 속성은 임(任), 어릴 적 이름은 응규이다. 1544년 경남 밀양에서 임수성의 아들로 태어났다. 일찍 부모를 여의고 황악산 직지사에서 승려가 되어 명종 16년(1561) 선과에 급제하였다. 묘향산 보현사의 서산대사에게 가르침을 받고 금강산 등 각처를 다니며 수도에 전념하였다.
1592년 임진왜란이 사명대사 유정의 운명을 바꾸었다. 스승인 휴정의 격문을 받고 금강산 건봉사에서 의승병을 일으켰다. 1593년 1월 평양성 전투에 참여하여 큰 전공을 세웠다. 그해 3월에는 서울 인근의 노원평과 우환동, 수락산 전투에서 왜군을 크게 무찔렀다.
이때 74세의 휴정이 자신의 직함인 팔도도총섭의 직함을 유정에게 물려주고 묘향산으로 돌아갔다. 이에 유정은 도원수 권율과 함께 경남 의령에 내려가 의승병을 이끌었다.
1594년에 유정은 울산의 적진을 세 번 찾아 왜장 가토 기요마사와 왜군의 동정을 살폈다. 또 팔공, 용기, 금오 등의 산성을 쌓고 양식과 전투에 필요한 말과 무기를 비축하였다.
1597년 정유재란에 명의 장수 마귀와 울산왜성 전투, 이듬해에 명의 장수 유정과 순천왜성 전투에서 공을 세워 가선동지중추부사에 올랐다.
임란 초기 왜군은 유교 국가인 조선이 불교를 탄압하니, 자신들에게 동조할 것으로 생각했다. 하지만 의승병이 봉기한 이후에는 각처에서 절은 불에 타고 탑은 무너졌다. 유정이 통도사의 부처님 진신사리 등을 스승인 휴정에게 맡겼던 것도 그 때문이다. 그렇게 이때 수많은 절의 소중한 유물, 유적이 잿더미가 되고 마구잡이로 분실되었다.
선조 37년(1604)이다. 유정은 강화교섭을 위해 왜국으로 갔다. 교토의 후시미성에서 도쿠가와 이에야스와 강화를 맺고 이듬해에 조선인 포로 3500명과 함께 돌아왔다. 귀국하여 묘향산의 스승을 찾았으나 휴정은 이미 지난해에 입적한 뒤였다. 스승의 영탑에 애도하고 유정은 치악산으로 들어갔다. 1608년 선조가 승하하고 광해군이 찾았으나, 고령의 나이에 병을 얻은 유정은 가야산 해인사에서 머물다 1610년 8월 26일 입적했다.
우리나라에 이 임진왜란에 왜적을 무찌르는데 앞장선 휴정, 유정, 처영, 영규 등의 대사를 모신 사당이 해남 대흥사의 표충사, 묘향산 수충사, 밀양의 표충사이다.
밀양의 표충사는 절집 표충사(寺)와 유교의 서원인 표충서원과 표충사(祠)가 함께 있는 곳이다. 절집 표충사는 무열왕 1년(654) 원효대사가 지어 죽림사라 했고, 흥덕왕 4년(829)에 인도의 황면선사가 석가모니의 진신사리 봉안할 곳을 찾다가 오색서운이 감도는 황록산 남쪽 죽림사에 3층 사리석탑을 세우고 중창했다. 이때 흥덕왕의 아들이 나병에 걸려 전국의 약수를 찾아 헤매다 이곳에서 약수를 마시며 황면선사의 법력으로 쾌유하였다. 이에 왕이 절을 크게 짓고 이름을 영정사, 산 이름을 재악산으로 바꾸었다. 헌종 5년(1839)에는 사명대사의 충혼을 기리는 밀양의 표충사를 옮겨오면서 절 이름도 표충사로 바뀌었다.
그런데 의열단 김원봉을 비롯한 밀양인들의 독립 열망의 불길을 억누르고자 일제강점기에 재악산(載岳山)을 왜왕을 뜻하는 천황산(天皇山), 수미봉을 재약산(載藥山)으로 바꾸었다. 그리고 아직까지 지리 표현은 왜식이나, 표충사는 ‘재악산표충사’ 현판을 당당히 걸고 있다.
여기 표충사의 여름 배롱꽃은 아름답다 못해 눈부시다. 절과 사우가 함께 어우러진 곳이어서 그런가 보다 한다. 내 것이 소중하면 남의 것도 소중한 것이다. 그렇게 포용과 화합이 피워낸 배롱꽃이니 어찌 눈부신 아름다움이 아니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