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봄마저 빼앗네

봄마저 빼앗네 지난 2023년 8·15 광복절 경축사에 내 귀를 의심했다. 티브이 채널을 돌리다 잠깐 흘려들었기에 잘 못 들었겠지 했으나, 내뱉은 독설이 기우가 아니었다. ‘우리의 독립운동은 자유민주주의 국가를 만들기 위한 건국 운동이었다.’, ‘일본은 우리의 파트너이다.’, ‘공산주의 및 전체주의 세력이 민주, 진보운동가 세력으로 위장하고 허위 선동과 패륜적 공작을 해왔다.’ 그날 가슴이 철렁 내려앉게 했던 주요 내용이다. 그러니까 독립운동이 건국운동이라는 말은 헌법전문의 ‘유구한 역사와 전통에 빛나는 우리 대한국민은 3·1운동으로 건립된 대한민국임시정부의 법통’을 인정하지 않는 발언이다. 1910년 8월 29일 조선을 병탄한 일제는 1945년 8월 6일 히로시마, 8월 9일 나가사키의 원폭투하로 8월..

칼럼 2023.09.04

구례 매천사 황현 오동나무

구례 매천사 황현 오동나무 황현(1855∼1910)은 조선 말기의 선비이다. 본관은 장수, 자는 운경. 호는 매천이다. 어린 시절부터 학문을 익혔으며 과거 응시차 상경한 서울에서 강위, 이건창, 김택영 등과 교우했고, 이들을 한말 한문학의 4대 문장가라 부른다. 무엇보다 황현은 1910년 경술국치에 왜인이 국권을 침탈하자 자결했다. ‘나라가 망한 날 선비 한 사람도 죽지 않는다면 어찌 애통하지 않겠는가. 나 위로는 한결같은 마음의 아름다움을 저버리지 않았고 아래로는 평소 읽은 글의 의리를 저버리지 않을 뿐이다. 아득히 오랜 잠에서 깨어나 참으로 통쾌함을 깨달으니 너희는 너무 슬퍼하지 말지어다.’ 이때 황현이 동생에게 남긴 ‘유자제서’의 일부이다. 또 다음은 황현이 남긴 ‘절명시’ 4수의 일부이다. ‘고국..

함양 학사루 김종직 목아 느티나무

함양 학사루 김종직 목아 느티나무 함양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북쪽 고을이다.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칠선계곡 자락이 내려섰다 올라선 뒤 다시 내려서며 만든 들녘이니, 산수풍광은 한마디로 빼어남이다. 가야의 졸마국이었고 신라 초기에 속함군, 경덕왕 때 천령군(天嶺郡)이라 했다. 신라 말에 최치원이 이곳 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고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위천(渭川)은 적은 비에도 넘쳤다, 최치원은 위천에 둑을 쌓아 물길을 잡고 둑 아래에 나무를 심었다. 관에서 쌓은 둑의 숲이니 대관림이고, 그 뒤 대홍수에 둑을 다시 쌓아 지금의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다. 중국 진국의 고도인 시안시의 옛 이름 셴양과 여기 함양, 또 셴양의 위수와 함양의 위천은 한자어까지 같다. 이 함양 이름은 고려 8대 왕인 현종 9년..

참 궁금하다

참 궁금하다 지난 긴 장마의 폭우는 재난을 넘어 재앙이었다. 이럴 때면 또 듣는 말, ‘나는 화상회의도 했다. 뛰어가도 상황을 크게 바꿀 수 없다’라는 남 탓, 나 몰라 재앙도 절망 그 자체였다. 그중 7월 15일 충북 청주 오송 지하차도 참사, 7월 19일 경북 예천의 10년 만에 얻은 외아들 채수근 상병의 어이없는 죽음은 장맛비가 그저 눈물이었다. 또 이는 인재이며 그 와중에 명품쇼핑, 양평고속도로 논란까지 겹쳐 이러니 하늘도 우릴 버렸구나 싶었다. 다시 생각하기 싫은 아픔이고 슬픔이다. 하지만 세월이 흘러도 잊거나, 잊히지 않아야겠기에 그날을 다시 반추한다. 더욱 오송 참사는 또 그 지긋지긋한 4대강 사업으로 귀결되니, 기가 막힌다. 댐은 강 상류에, 보는 하류에 건설하여 홍수와 가뭄 예방, 발전,..

칼럼 2023.08.18

단양 청풍호 두향매

단양 청풍호 두향매 초파일 명관분매(初八日 命灌盆梅), 그러니까 ‘12월 8일 아침,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지시한 말이다. 여기서 매화는 ‘두향’, 지시한 사람은 이황(1501∼1570)이며 죽기 전의 유언이기도 하다. 단양의 관기였던 두향과 조선의 성리학자인 이황의 사랑 얘기는 애틋하나, 당시와 오늘의 신분이나 신념이 다르니 말하기에 조심스럽다.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와 신분, 신념을 뛰어넘는 황진이와 서화담, 매창과 유희경, 자야와 백석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두향과 이황이 한 치도 다를 리 없다. 27살 되던 해에 이황은 두 아들을 낳은 첫째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리고 3년이 되었을 때이다. 유배 중이던 권질의 부탁으로 그의 딸을 후처로 맞..

함양 천년 상림 연리목

함양 천년 상림 연리목 칠 년 가뭄에는 살아도 석 달 장마에는 못 산다는 말이 있다. 하지만 칠 년 가뭄에 비 내리지 않을 때 없고, 석 달 장마에 해 안 뜨는 날 없다는 말도 있다. 칠 년 가뭄이건, 석 달 장마이건, 하늘이 무너져도 살 수 있으니 어떻거나 질긴 목숨이라는 말이다. 옛 제왕의 덕목 중 하나가 치산치수이다. 농본시대이기도 했지만, 백성이 있어야 나라가 있으니, 어떻게든 먹고 사는 것의 첫 번째는 산과 물을 다스리는 일이었다. 특히 우리나라는 산지와 하천이 가파르고 길이가 짧다. 비가 오면 상류 지역의 흙과 돌이 수해에 미치는 큰 원인이 된다. 함양의 대관림은 원시림이 아니다. 지금부터 1,100년 전 고을을 관통하는 위천에 둑을 쌓고 심은 우리나라의 첫 인공림이다. 둑을 따라 13만㎡의 ..

완도 신지 이광사 소나무

완도 신지 이광사 소나무 명사십리 신지도는 참 아름답고 평화로운 섬이다. 지금은 연도교가 놓이고 연륙이 되었지만, 신지면 대곡70번길 33은 조선의 큰 서예가 이광사, 또 조선 후기의 문신 목내선, 시인 이세보, 개화사상가 지석영 등이 귀양을 산 외롭고 쓸쓸한 유배지 섬이었다. 본관이 전주인 이광사(1705~1777)는 조선 제2대 정종의 서얼 왕자인 덕천군 이후생의 후손이다. 실학의 사상적 토대였던 양명학자로 강화도에서 학문을 이었던 강화학파이다. 이들을 또 육진팔광(六眞八匡)이라 한다. 경종이 즉위하여 집권세력인 소론은 노론을 숙청했다. 경종이 후사가 없어 이복동생인 영조가 왕이 되었고 이번엔 집권세력인 노론이 소론을 숙청했다. 이때 소론으로 이조참판이던 이진유는 1755년 추자도로 유배되었다가 의금..

태백 구문소 백룡 소나무

태백 구문소 백룡 소나무 태백은 석탄의 고을이다. 태백산 들머리에 ‘태백 석탄 박물관’이 있다. 이곳에 가면 ‘1950년대 광부 아낙네들은 한 달에 한 번 배급 받는 백미를 늘려 먹으려고 잡곡, 밀가루 등과 바꾸었고, 장바구니에 담아 온 돼지고기 한 근을 아이들 몰래 남편 밥상에만 올려놓았다’는 옛 탄광촌의 모습을 그려볼 수 있다. 또 1960년대의 아이들은 학교에서 돌아와 인근 탄광의 경석장에서 땔감으로 괴탄과 갱목을 한 짐씩 주워다 놓은 뒤, 아버지가 가져다준 쇠구슬로 구슬치기를 하거나, 비석치기, 고무줄놀이하며 놀았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광산이 개발되기 전 태백에는 화전민이 너와집을 짓고 살았다. 초목을 불태운 거름으로 산밭을 일구어 조, 메밀, 감자, 옥수수, 콩, 수수를 심어 삶을 이었고, 1..

강경 옥녀봉 사랑의 느티나무

강경 옥녀봉 사랑의 느티나무 이중환은 택리지에서 ‘살만한 곳’을 ‘지리, 생리, 인심’이 좋고 ‘산수’가 아름다운 곳이라고 했다. 이는 지형, 토양, 기후, 물산, 일자리, 전통과 풍속, 또 사농공상의 사민이 평등한 세상을 가리키는 말이다. 이 택리지를 탈고한 곳이 강경의 팔괘정으로 송시열이 이황과 이이를 추모하고 제자들에게 강학하던 곳이다. 또 스승 김장생이 학문을 펼친 곳이 이웃 임리정이니, 강경은 노론들의 본거지였다. 당시 소론 학자로 노론의 핍박을 받은 이중환이 여기에서 집필하고 발문까지 마무리한 것은 강경이 살만한 곳 중 으뜸이라는 것 외에 나아가서는 학문평등, 사민평등의 바람이고 실천이었으리라. 논산시 강경읍은 부여 백마강이 남진하다가 크게 휘돌아가며 서진하는 곳이다. 그리고 이곳 강경포구에서..

해남 수성송

해남 수성송 역사는 지나간 것이 아니라, 지나가는 것을 성찰하며 볼 수 있는 현장이기도 하다. 임진과 정유 7년의 왜란이 있기 전, 조선에는 이를 예고하는 몇 차례의 왜란이 있었다. 주군 ‘다이묘’가 거느리는 왜병이면서 생계형 흉악범 해적집단 왜구가 걸핏하면 대한해협을 건너왔다. 1510년 삼포왜란(부산포, 진해 내이포, 울산 방어진 염포), 1544년 사랑진(통영)왜란, 1555년 을묘왜변(달량포), 1587년 여수 손죽도 등지에서의 대규모 약탈이 그것이다. 왜구는 부산과 불과 50Km인 대마도를 중간 거점으로 삼았다. 이 왜구들의 배 ‘세키부네’는 노 40개로 격군 40여 명, 조총병 20명, 전투병 10명 등 모두 70여 명이 탔다. 조선 수군 130여 명이 타는 판옥선보다 작아 천자, 지자, 현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