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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양 청풍호 두향매

운당 2023. 8. 18. 06:36

단양 청풍호 두향매

 

초파일 명관분매(初八日 命灌盆梅), 그러니까 ‘128일 아침, 화분의 매화에 물을 주라고 지시한 말이다. 여기서 매화는 두향’, 지시한 사람은 이황(15011570)이며 죽기 전의 유언이기도 하다. 단양의 관기였던 두향과 조선의 성리학자인 이황의 사랑 얘기는 애틋하나, 당시와 오늘의 신분이나 신념이 다르니 말하기에 조심스럽다. 누구에게도 상처가 되어서는 안 된다는 생각 때문이다. 하지만 시대와 신분, 신념을 뛰어넘는 황진이와 서화담, 매창과 유희경, 자야와 백석의 아름답고 애절한 사랑 이야기와 두향과 이황이 한 치도 다를 리 없다.

27살 되던 해에 이황은 두 아들을 낳은 첫째 부인과 사별하였다. 그리고 3년이 되었을 때이다. 유배 중이던 권질의 부탁으로 그의 딸을 후처로 맞았다. 그러나 집안 몰락의 후유증으로 그녀는 정신이 조금 온전치 못했다. 어느 날 제사에 제를 올리기도 전에 그녀가 치마에 배를 감추자 형수가 질책했다. 이황은 예법에는 어긋나지만, 손자며느리의 행동을 노엽게 여기지 않을 겁니다라며 아내를 감싸주고 제사를 마친 뒤, 배를 손수 깎아 아내에게 주었다. 그 아내 권씨는 이황과 혼인한 지 16년 뒤 출산 중 난산으로 사망하였고 태어난 아이도 며칠 후 죽고 말았다. 이에 전처의 두 아들은 이황의 당부대로 권씨 부인의 묘에서 시묘살이를 했고, 자신도 묘 근처에 암자를 짓고 한 해 동안 기거하였다.

또 이황은 첫째 부인과 사별한 직후 들인 첩실도 있었다. 그녀는 장애가 있는 권씨를 대신해 실질적인 안살림을 잘 이끌었다. 이황은 이 첩실이 죽자, 서자인 이적을 호적에 올리고, 행여나 그 후손들이 적서 차별을 받을까 염려하여 족보에 적서의 구별을 하지 못하게 금하였다. 이후로 지금까지 퇴계 가문의 족보에는 적서의 기록이 없다고 한다.

이황이 아내의 시묘를 마친 다음 해인 15481월이다. 47세의 이황은 충청도 단양군수가 되었다. 당시 단양은 3년째 한발로 백성들은 궁핍에 시달리고, 이황 자신도 둘째 아들 이채가 결혼을 앞두고 갑자기 죽어 슬픔에 잠겨 있었다.

이때 만난 19살의 단양의 관기 두향이 매화분을 가져와 퇴계를 위로했다. 두향은 매화꽃 같은 청초함에 글솜씨며 거문고 솜씨도 빼어났다,

그러나 형이 충청감사가 되자, 이황은 자청하여 경상도 풍기군수로 전임하였다. 전임 전날 밤 이황은 죽어 이별은 소리조차 나오지 않고/ 살아 이별은 슬프기 그지없네라 두향에게 주고, 두향은 이별이 하도 설워 잔 들고 슬피 울며,/ 어느덧 술 다하고 임마저 가는구나./ 꽃 지고 새 우는 봄날을 어이할까 하노라.’로 받았다.

이별은 까마귀 없는 은하수보다 길어, 이황은 157069세로 세상을 떠날 때까지 두향과 만나지 못했다. 두향은 남한강가에서, 이황은 안동의 도산서원에서 하늘을 오가는 구름으로 마음만 주고받았다. 그래도 풍기군수 시절 이황이 두향에게 보낸 편지가 남아 있다. 또 두향이 도산서원의 이황에게 난초를 보내자, 이황은 자신이 마시는 우물물을 길어서 보냈다. 이 우물물은 두향이 이황의 건강을 비는 새벽 정화수가 되어 오래 보전되었다.

어느 날, 이 정화수가 핏빛으로 변하자, 두향은 소복 차림으로 단양에서 도산서원까지 나흘을 걸어 문상했고, 어느 해 남한강에 몸을 던져 생을 마감했다. 그 남한강을 내려다보는 강선대 아래 두향이 누워있고, 그 무덤을 바라보는 곳에 이황과 두향의 기념공원이 있다.

여기에 이제 어린 매화나무가 있고, 소나무 두 그루가 호위병처럼 서서 두향묘를 바라본다. 청풍호가 되어 잠시 흐름을 쉬고 있는 강선대 아래 남한강은 그저 아무 말이 없다.

딘양 청풍호 두향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