삶, 숨, 쉼터 나무 이야기

함양 학사루 김종직 목아 느티나무

운당 2023. 8. 28. 09:36

함양 학사루 김종직 목아 느티나무

 

함양은 지리산 천왕봉에서 바라보는 북쪽 고을이다. 천왕봉에서 흘러내린 칠선계곡 자락이 내려섰다 올라선 뒤 다시 내려서며 만든 들녘이니, 산수풍광은 한마디로 빼어남이다.

가야의 졸마국이었고 신라 초기에 속함군, 경덕왕 때 천령군(天嶺郡)이라 했다. 신라 말에 최치원이 이곳 군수로 부임했다. 당시 고을의 한 가운데를 흐르는 위천(渭川)은 적은 비에도 넘쳤다, 최치원은 위천에 둑을 쌓아 물길을 잡고 둑 아래에 나무를 심었다. 관에서 쌓은 둑의 숲이니 대관림이고, 그 뒤 대홍수에 둑을 다시 쌓아 지금의 상림과 하림으로 나누어졌다.

중국 진국의 고도인 시안시의 옛 이름 셴양과 여기 함양, 또 셴양의 위수와 함양의 위천은 한자어까지 같다. 이 함양 이름은 고려 8대 왕인 현종 9(1018)에 얻었다. 지리산이 사람의 가슴이라면 함양은 그 머리이고 산청과 남원은 두 팔, 하동과 구례는 두 발이다. 중국을 통일한 진시황의 수도였던 셴양과 한반도 남쪽의 지리산 천왕봉의 머리 고을 함양의 이름이 같은 건 당연함이 아닌가 싶다.

고려 말 우왕 6(1380)이다. 5백여 척에 탄 왜구가 진포에서 최무선의 화포에 배를 잃고 금강 줄기를 따라 이동하며 약탈과 살육을 일삼았다. 이에 삼도원수 배극렴이 함양의 사근내역에서 왜구와 사투를 벌였으나, 원수 박수경, 배언 및 고려군 5백 명이 전사하였다. 이때 왜구의 장수는 15~6세의 아기발도였다. 이 아기발도는 우리 말의 아기와 몽골어 바토르(용맹한 자)’의 한자 음차표기 발도가 합쳐진 것이니, 왜구이지만 이름을 남긴 용장이다. 하지만 남원까지 진출했다가 인월역과 황산에서 1만여 왜구는 몰살당하고 70여 명이 지리산으로 도망쳤다.

이 전투는 이성계의 조선개국의 신호탄이 되었다. 당시 이성계는 왜구이지만 용맹무쌍한 아기발도를 생포하고 싶었다. 하지만 아군의 피해를 우려한 이지란의 충고를 받아들였다. ‘내가 화살로 아기발도의 투구를 벗길 테니, 네가 죽여라며 두 발의 화살로 투구를 벗겼고, 이지란의 화살은 아기발도의 목숨을 앗았다.

대관림의 상림과 하림이 있는 함양에는 깊은 역사와 함께 그 역사를 간직한 우람한 나무도 많다. 그중 하나가 여섯 아름의 학사루 앞의 느티나무이다. 조선 9대왕 성종 1년인 1470년 김종직이 이곳 함양군수로 부임하여 4년여 머무를 때다. 마흔이 넘어 얻은 다섯 살배기 어린 아들 목아(木兒)를 홍역으로 잃었다. 김종직은 그 슬픔을 달래며 아들 이름을 생각하며 천년을 삶을 살아갈 느티나무 한 그루를 심었다. 5백 년 넘어 우리가 그 나무를 보게 된 연유이다. 아들을 잃고 나무를 심을 당시의 애절한 마음이 김종직의 점필재집에 있다.

내 사랑 뿌리치고 어찌 그리도 빨리 가느냐/ 다섯 해 생애가 번갯불 같구나/ 어머님은 손자를 부르고 아내는 자식을 부르니/ 지금 이 순간 천지가 끝없이 아득하구나

김종직은 이 느티나무를 최치원이 자주 올라 시를 읊었다는 함양군청 앞 누각 학사로 앞에 심었다. 하지만 일제강점기에 동헌이 헐리고 학교가 되었기에 지금은 함양초교에서 아이들과 함께 있다. 아들을 잃고 나무를 심어 아들을 삼은 김종직의 슬픔과 염원의 나무인지라, 날마다 자라는, 또 언제나 아이들이 있을 학교와의 인연도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다.

김종직이 학사루에 걸린 유자광의 현판을 떼어 소각한 사건은 훗날 무오사화의 단초가 되었다. 역사의 흐름 앞에 누구도 자유로울 수 없으니, 함양에 가거든 학사루 건너 김종직의 목아 느티나무를 경배하듯 꼭 보고 올 일이다.

함양 김종직 목아 느티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