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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주 무령왕릉 무령왕 반송

운당 2023. 9. 14. 08:37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 반송

 

1971년은 7월 초까지 이어진 장맛비가 자주 많이 내렸다. 이에 웅진백제(475538)의 왕릉급 무덤인 송산리 5호와 6호 고분의 벽화 훼손을 우려해 75일 왕릉 뒤에 배수로를 냈다.

그때 괭이 끝에서 돌소리가 났다. 조심스레 캐보니 벽돌이었는데 6호분과 다른 무늬였다. 그 벽돌을 따라 파내려 가니 아치 모양의 입구가 나왔다. 새로운 무덤이었다. 6일 황급히 조사단을 꾸렸으나, 7일에 또 비가 내려 8일에야 발굴에 나섰다. 아침 일찍 발굴을 재개해 오후 415분께 무덤문을 열었다. 이때 펑 소리와 함께 무덤에서 휜 연기가 나왔다. 그리고 곧 두 개의 지석을 통해 이 무덤의 주인이 백제 무령왕(461~523)과 왕비의 무덤임을 확인했고, 다음 날 오전 8시 무렵 벽돌(전돌)을 차곡차곡 쌓아 올려 만든 무덤의 유물을 수습했다.

이 무령왕릉은 삼국시대 왕릉 가운데 무덤 주인이 누구인지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분으로 출토 유물만 1245232점이며 국보가 1217점이다. 검소하되 누추하지 않고 화려하나 사치스럽지 않다는 백제문화의 정수이니 그저 박물관 한 채를 고스란히 얻어낸 셈이다.

또 무덤 주인과 조성 시기를 명확히 알 수 있는 유일한 고대 왕릉이어서 역사학과 고고학 연구의 기준점이 되는 자료였다. 하지만 전문적 기술도 부족했고, 하루 만에 속전속결로 발굴을 끝낸 졸속 작업이었다. 1500년간 무령왕릉 안에서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또 백제인들이 어떤 생각으로 무덤에 유물을 넣고 배치했는지를 살피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마치 월드컵 연장전에서 터진 역전골처럼 환희와 전율이 느껴지는 세기의 발굴이었지만, 두고두고 무지, 무능, 아쉬움의 대명사로 남게 되었다. 그나마 일제강점기 문화재 착취에 혈안이 된 왜인과 그들에게 놀아난 도굴범의 손을 타지 않은 것만도 그저 하늘의 도움이었다.

이곳에서 나온 무령왕 금제관식은 왕관의 꾸미개이다. 마치 불꽃이 타오르는 듯한 모양새로 작은 구슬을 금실로 꼬아서 달았는데, 그 앞에서 숨만 크게 쉬어도 구슬들이 하늘하늘 움직인다. 절로 벌어진 입이 다물어지지 않으니, 천오백 년을 넘어, 우리 눈앞에 온 신비로움이다.

또 입에 붉은 연지를 칠한 석수인 진묘수는 사자나 기린의 모습으로 이마에 외뿔, 큰 눈과 코, 네 다리에 불꽃 날개가 있다, 우리나라에서 가장 오래된 진묘수 유물이자 유일하다.

무령왕은 백제 25대 왕으로 501부터 522년까지 제위에 있었다. ‘삼국사기삼국유사에 따르면 24대 동성왕의 차남이다. 당시 백제 21대 왕은 개로왕이다. 웅진으로 천도한 22대 문주왕은 개로왕의 아들이거나 동생이다. 23대 삼근왕은 문주왕의 맏아들이다. 24대 동성왕은 개로왕의 동생인 부여곤지의 아들이다.

그런데 무령왕이 동성왕의 차남이라면 문제가 발생한다. 무령왕이 심근왕이나 동성왕보다 나이가 많기 때문이다. 이에 일본서기는 무령왕이 개로왕의 아들이라고 했다. 개로왕이 아우 부여곤지를 왜국 사신으로 보낼 때, 자신의 아이를 밴 부인을 곤지의 아내로 삼았다. 그리고 일본 시가현 북쪽 섬 가카라노섬에서 무령왕이 태어났다는 것이다. 그러니까 왜에 따르면 무령왕은 동성왕의 차남이 아닌 배다른 형이다.

멸망한 백제의 기록은 철저히 파괴되고 지워졌으니 무엇이 맞는지 알 수 없다. 승자의 기록인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허접한 왜의 기록에 의존하자니 어쩔 수 없다. 그렇게 지우개로 지워진 역사에 홀연히 나타난 무령왕릉은 신비이면서 역사를 꿰어맞추는 보물임이 틀림없다.

이 공주 무령왕릉 들머리에 반송 한 그루가 왕관 금제관식의 불꽃처럼 날개를 하늘로 펼치며 서 있다. 어찌 보면 진각수의 날개이니, 그 앞에 서니 역사와 기록의 소중함이 새삼스럽다.

공주 무령왕릉 무령왕 반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