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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산 연무읍 견훤왕릉 배롱나무

운당 2023. 9. 27. 07:28

논산 연무읍 견훤왕릉 배롱나무

 

금강을 젖줄로 태평성대를 누린 백제의 텃밭 고을이 논산이다. 오늘의 논산시도 동북쪽에 대전광역시, 동쪽에 계룡시와 금산군, 서쪽에 부여군, 북쪽에 공주시, 남쪽에 전라북도 익산시, 완주군과 이웃하는 풍요로운 삶의 터다. 호남선 철도, 논산천안고속도로와 호남고속도로, 호남고속도로지선이 분기하는 교통의 요지이다.

그렇게 논산은 참으로 사람살이가 오랜 역사의 고을이다. 피 끓는 투혼의 역사가 있는가 하면 풍요와 번영의 찬가가 울리던 고을이다. 그 역사 속에 또 기억하고 추억할 위대한 인물이 있으니, 이곳 논산시 연무읍 금곡리의 후백제 시조 견훤왕릉이다. 조선 초의 고려사 지리지에 충청도 은진군 풍계촌에 위치한다는 기록으로 전() 견훤왕릉이라 부르는 곳이다. ()이란 말이 참으로 마음 아프다. 승자의 기록이 역사라는 생각이 가슴을 쿵 친다. 하지만 민심을 얻은 패자의 기록도 사람들 마음에 남아 후세에 전승되니 이 역시 역사이다.

견훤왕! 이루려던 대업을 매듭짓지 못하고, 구차하게 정적에게 의탁했고, 또 그 적장에게 자식이 나라를 바쳤던 황산불사에서 죽음을 맞이한 비운의 풍운아이다. 문득 당나라 낙양성 북망산의 고혼이 된 이웃 고을 부여 의자왕의 비운까지 떠오르니, 만사가 뜬구름이다. 하지만 산 사람은 사는 법이다. 옷깃 여미고 저 멀리 의자왕, 눈앞의 견훤왕 영전에 고개를 숙인다.

견훤(甄萱 867~936)은 속리산에서 발원한 영강 물줄기가 만든 문경시 가은읍 갈전리 아차마을에서 태어났다. 아버지는 아자개이며 이씨였다. 견훤 왕의 견씨는 15세에 이르러 스스로 바꾼 성으로 전주 견씨의 시조이기도 하다. 또 이곳 금하굴은 견훤이 지렁이의 아들이라는 전설이 깃든 굴이다. 흙 속에 묻혀버린 것을 해방 이듬해 마을 주민들이 다시 복원했다.

또 광주광역시에도 견훤 탄생설화가 있다. 광주 북촌 어떤 부자의 딸에게 자주색 의복을 입은 남자가 밤마다 찾아왔다. 아버지는 긴 실을 바늘에 꿰어 남자의 옷에 찔러두라고 했다. 다음 날 북쪽 담 아래에 허리를 바늘에 찔린 큰 지렁이가 있었다. 그 뒤 딸이 사내아이를 낳으니 15세에 자칭 견훤이라고 했다는 삼국유사의 기록이 그것이다.

9353, 전주의 후백제 왕궁에서 정변이 일어났다. 주동자는 견훤의 장남인 신검과 이찬 능환 등이었다. 그들은 4남 금강에게 왕위를 물려주려는 견훤을 금산사에 유폐시키고 금강은 살해하였다. ‘가련하구나 완산 아이여(可憐完山兒), 아비 잃고 눈물만 흘리고 있네(失父涕連濡)’는 이때 완산주 어린이들이 불렀던 동요이다.

그렇게 역사의 이슬로 스러져간 견훤이 꿈꾸었던 나라는 어떤 나라였을까? 견훤은 삼국에서 가장 뛰어난 국제 외교정책을 폈고, 당대 학자인 최승우를 영입했다. 당나라에서 돌아오는 승려 경보를 나루터까지 마중 나가 스승으로 모신 혜안과 덕망을 두루 지닌 지도자였다, 또 삼국에서 가장 많은 책을 소장한 도서관이 있었다. 전주의 서고가 불타면서 그 고대사 서책과 함께 후백제의 역사도 헌 줌 재가 되었지만, 그가 꿈꾼 통일대국, 문화대국의 꿈은 결코 지나간 허망한 역사가 아니다.

견훤왕릉은 쓸쓸하지만, 한여름 붉은 배롱꽃이 화사하다. ‘내가 죽으면 모악산을 바라보게 하라.’는 유언에 따라 묘를 썼다는 연무읍 금곡리 낮은 구릉 위 왕릉에서는 저 멀리 전주의 산자락이 보인다. 한여름 따가운 햇살이 너른 들녘의 낱곡을 키우니, 견훤이 꿈꾸었던 통일대국, 문화대국의 꿈은 이제 우리들의 몫이다. ‘슬퍼하지 말라 완산 아이여, 아비의 뜻 다시 이루어보세왕릉 앞 붉은 배롱꽃에 기대어 완산주 동요를 새롭게 불러 본다.

견훤왕릉 배롱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