함안 산인면 고려동 이오 자미화
재령 이씨는 황해도 재령군이 본관이다. 고려말 조선초의 학자 이오는 본관이 재령이며 고려 사재시(司宰寺)의 종3품 관직 사재령을 지낸 이일선의 넷째 아들이다. 성균관 진사이던 이오는 고려가 사라지자, 송도의 두문동에서 망복수의의 결의를 다지고 경남 밀양으로 내려왔다.
두문동은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기슭의 옛 지명으로 고려 성균관의 태학생 72명이 은거한 곳이다. 이들은 조선이 건국되자 이곳에 들어와 동·서쪽에 문을 세워 빗장을 걸고 문밖으로 나가지 않았다. 당시 성균관은 국자학, 태학, 사문학 등 인문사회 3개 학과에 9백여 명, 율학, 서학, 산학 등 자연과학기술계 6개 학과에 4백여 명의 학생이 있었다.
조선 태조는 이들을 불러 자신의 집인 경덕궁에서 과장을 열고 회유에 나섰으나, 아무도 응시하지 않고 경덕궁 앞 고개를 넘어가 버렸다. 그 뒤 이 고개를 부조현이라 하고 부조현 북쪽에 관을 걸어놓았기에 괘관현이라 했다. 망국의 개성 아낙들이 쌀을 씻거나 빨래를 하며 다시 돌아오라는 뜻의 ‘도리, 도리!’의 입소리를 냈으니 5백 년 망국의 한 맺힘이고 우리가 되새길 교훈이다.
또 망복수의는 망국의 신하로서 새 왕조의 신복이 되지 않겠다는 절의이니, 은나라 망국 무렵 기자가 ‘나라가 망해도 나는 남의 신복이 되지 않으리라’고 말한 데서 유래한다.
밀양에 살던 이오는 조선초 육조의 으뜸 벼슬인 정3품 전서 ‘남의’의 딸에게 장가들어 처가인 의령을 자주 다녔다. 그러던 중 함안군 산익면 모곡리에서 수풀 사이에 자미화가 활짝 피어있는 걸 보고 그곳 나무 밑에 말을 매고 쉬었다.
이오는 마침내 그곳에 터를 잡아 담장을 쌓고 고려동학이란 비를 세웠다. 또 담안에 주거와 우물, 전답 등을 마련하여 자급자족의 기틀을 세웠다. 마을 이름을 고려동, 고려촌, 또 담장 안을 뜻하는 장내동, 담안이라 부르는 연유이다.
또 아들에게 새 왕조에서 벼슬하지 말 것과 신주를 다른 곳으로 옮기지 말 것을 당부하였다. 후대에 이르러 후손들이 벼슬길에 나섰지만, 이오의 유지는 그렇게 600년이 넘어 고려를 잇고 있다.
자미화는 백일홍, 배롱나무이다. 그런데 ‘하늘의 제왕은 자미궁에 살고 땅의 제왕은 그것을 본떠 만든다’는 ‘후한서’ 48권의 기록처럼 수·당 시기 낙양성은 ‘자미성’이고 명·청 시기 북경성은 ‘자금성’이다. 그러하니 고려동학은 함안의 고려황성이고 자미화는 그 상징이다.
이 고려동의 자미화는 이오가 세상을 떠나고 백여 년 뒤 말라 죽었다, 그리고 30여 년 뒤 다시 고목의 밑동에서 싹이 나온 것이라 한다. 또 이오의 무덤 자미화도 처음 심었던 나무의 밑동에서 새로 나온 가지라고 한다. 그렇게 이오의 자미화는 고려 황궁의 상징이며 고려에 대한 단심의 꽃, 충절의 꽃이기도 하다.
이오는 죽음에 이르러 ‘나라 잃은 백성의 묘비에 무슨 말을 쓰겠느냐? 내가 죽으면 할 수 없이 담장 밖 조선의 땅에 장사할 것이니 묘비를 세울 경우 내 이름은 물론이고 글자 하나 새기지 마라’고 유언했다. 조선왕의 묘호를 새기기 싫어서이니, 청백리의 백비와는 결이 다른 연유이다. 또 함안 가야 혈곡리의 무덤 모양이 부인 의령 남씨는 사각이고 이오는 팔각으로 둥글다. 이는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나다’의 천원지방사상이다. 살아서 신념을 지키기도 어려운 세상에서 더 이상 보탤 말이 없다. 고려의 남쪽 황궁에 핀 이오의 자미화에 예를 갖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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