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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주 공산 오득린 호랑가시나무

나주 공산 오득린 호랑가시나무 오득린(1564~1637)은 고려 때 사정공인 오경진의 7세손이며 나주시 공산면 상방리에서 오숭수의 큰아들로 태어났다.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영암, 해남, 목포, 진도를 두루 다니며 전황을 살피고 의병을 일으켜 마을을 지키다, 송희립의 천거로 이순신의 수군이 되었다. 정유재란에 옥포, 당포, 명량, 노량 등 여러 해전에서 큰 공을 세웠다. 왜란이 끝나고 역시 송희립의 상소로 1605년 선무원종일등공신의 녹훈을 받았다. 1598년 노량해전을 앞둔 때이다. 당시 도요토미 히데요시가 죽고 왜군에게 철수령이 내려졌다. 이를 알고 조명연합군은 고니시 유키나가의 순천 왜교성을 수륙으로 포위했다. 이때 명의 진린은 왜군과 전면전보다 화의 협상을 하면서 뇌물까지 받았다. 그리고 고니시 유키..

부여 가림성 깃발 느티나무

부여 가림성 깃발 느티나무 ‘벌처럼 모이고 고슴도치처럼 일어나 산과 골짜기에 가득 찼다.’ 이 글은 부여국립박물관에 옮겨놓은 당나라 장수 ‘유인원기공비’에 새겨져 있다. 이 글의 벌과 고슴도치는 백제 유민과 부흥군을 일컫는다. 660년 7월 의자왕의 항복으로 백제는 역사에서 사라졌다. 그리고 662년, 신라 문무왕 2년이다. 백제부흥군과의 전투에 나선 나당연합군은 지세가 험하고 견고한 가림성을 피해 곧장 주류성(부안 우금산성)으로 갔다. 663년 마침내 주류성의 함락으로 부흥, 백제의 희망도 마무리되었다. 하지만 그 뒤로도 672년경까지 백제 유민들의 항거가 이어졌으니, 그 중심지가 바로 가림성이다. 이와 관련한 삼국사기의 내용이다. ‘664년 3월, 가림성의 백제 부흥군이 사비성의 신라군을 몰아내고 되..

하동 옥종면 강민첨 은행나무

하동 옥종면 강민첨 은행나무 거란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은 물론 몽골까지 차지하며 요나라를 세운 북방 기마민족이다. 이 거란족이 크게 3번 고려에 쳐들어왔으니, 993년(성종 12)의 1차, 1010년(현종 원년)의 2차, 1018년(현종 9)의 3차가 그것이다. 이때의 영웅이 강감찬이다. 거란과의 2차 전쟁 때에 모두가 항복을 말했으나,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강공책을 쓰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좌임(左衽)이 되었을 것이다.’며 강감찬을 문화평장사에 임명했다. 좌임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이니 곧 머리 풀어헤치는 거란족을 가리킨다. 이렇듯 거란 대신 여진이 북방의 패자가 되게 한 강감찬의 귀주대첩, 수나라를 무너뜨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왜의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연 이..

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화순 이양면 쌍봉사 절집은 그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839년 신라 신무왕 때 적인선사 혜철이 하안거를 보냈다 하니 오래된 절집이구나 할 뿐이다. 또 문성왕 9년인 847년에 22년간의 당 유학을 마치고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던 쌍봉화상 철감도윤이 이곳에 있었다. 절 이름 쌍봉사는 속성이 박씨로 이곳에서 입적하여 철감의 시호를 받은 쌍봉 도윤의 부도탑과 탑비, 우뚝 솟은 중조산 두 봉우리가 절을 향해 고개 숙인 것과 인연이 닿아있다. 장보고는 젊은 시절 당나라 쉬저우(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었다. 용맹하여 말을 타고 창을 쓰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828년 신라 흥덕왕에게 당나라 해적의 노략질과 사고파는 노비의 근절책을 주장하고, 이의 해결책으로 완도 장도의 ..

봄꿈

봄꿈 봄꿈은 개꿈이라는 말이 있다. 왜 하필 봄꿈을 개꿈이라고 할까? 4차 산업혁명시대지만, 6, 7십 년 전만해도 우리 사회는 ‘농자천하지대본’의 농본사회였다. 24절기의 첫 번째인 입춘에 봄을 맞아 낮과 밤이 같은 춘분을 전후하여 농사일을 시작했다. 그런데 이 시기는 보릿고개라 부르는 춘궁기였다. 가을 양식은 바닥이 나고 햇보리는 미처 여물지 않아 고통받던 시기였다. 관청은 구휼미를 풀었지만 남의 전답에 더부살이하는 농민들은 그마저도 기대할 수 없어 걸인, 유랑민이 되기도 했다. 칡뿌리나 띠뿌리, 생솔가지 껍질을 벗겨 먹고, 산천의 온갖 나물로 연명했다. 그렇게 온 산천에 만초가 생동했지만, 봄은 풀 죽은 시기였다. 배고픈 아이가 깜빡 잠이 들어 온갖 꿈을 꾸면 어른들은 무조건 시큰둥하게 ‘개꿈이다!..

칼럼 2024.01.18

산청군 이사재 박호원 배롱나무

산청군 이사재 박호원 배롱나무 지리산 들머리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이사재(尼泗齋)는 박호원(1527~1585)의 재실이다. 밀양이 본관인 박호원의 아버지는 호조 소속의 정3품 ‘내자시 부정’을 지낸 박이, 어머니는 황희의 5대손으로 한성부판윤을 지낸 황맹헌의 딸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박호원은 명종 1년(1546)에 사마시에 급제, 1552년 문과에 급제하여 1555년 함경도 북평사가 되었다. 1562년, 중종 무렵부터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임꺽정 토벌 때에 반국대적토포사 남치근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 전우치와 더불어 조선의 4대 도적이다. 임꺽정의 아버지는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는 경기도 양주의 고리백정으로 관에 끌려가 죽었다. 이에 도적이 된 임꺽정은 경기도 양..

독도에서 연평도까지

독도에서 연평도까지 새해맞이 덕담을 나누고 가족과 이웃의 건강을 기원하면서도 심상치 않은 세태에 마음이 편치 않다. 비 오면 우산 장수 돈 벌고 날 좋으면 나막신 장수 돈을 버니 피장파장이지만, 사회가 자꾸만 극단으로 치닫고, 그걸 조장하는 무리가 있기 때문이다. 역사에 가정은 없다. 하지만, ‘만약’은 참으로 다행을 지향하는 말이다. 그래서 만약 우리 옛 땅인 요동 발해만에서 중국 산둥을 잇는 묘도열도가 지금도 우리 것이면 어떨까? 우린 산둥 청구국 칭다오에서 중국 수도 베이징과 국경을 마주할 것이다. 다음은 독도이다. 만약 독도가 우리 섬이 아니라면 일본은 부산 앞바다에 국경선을 그어놓고, 임란에 점유했던 왜성까지 자기 것이라고 우길 것이다. 그런데 상황이 어떤가? 지난해 12월 국방부는 ‘정신전력교..

칼럼 2024.01.08

부여 가림성 백제병사 충혼 소나무

부여 가림성 백제병사 충혼 소나무 중국 제나라 관중의 저서 관자에 있는 ‘민이식위천 왕이민위천’은 ‘백성은 먹는 것이 하늘이고, 왕은 백성이 하늘이다.’라는 말이다. 백제 제24대 동성왕이 가림성을 쌓은 건 바로 그 하늘인 백성을 잘살게 하기 위함이었으리라. 그리고 왕의 절대권력이 백성(하늘)을 지키기 위함이라 믿었기에, 가림성의 병사들은 그 하늘(백성)을 지키려 죽음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백제라는 나라 이름이 있건 없건 오직 하늘인 백성을 위해 굳건히 성을 지켰다. 하지만 사치와 향락에 빠져든 동성왕의 행각은 하늘의 버림을 받았다. 501년 8월, 동성왕은 가림성을 축조한 위사좌평 백가를 성주로 임명했으나 백가는 불만을 품었다. 그해 11월 사냥을 나간 동성왕이 큰 눈에 갇혀 가림성 가까이 머물렀다. ..

공주 공산성 쌍수정 인조 느티나무

공주 공산성 쌍수정 인조 느티나무 백제의 제22대 문주왕(?~477)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개로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왜의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동생이라 했다. 이 문주왕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 쌓은 성이 공주의 웅진성(공산성)이다. 그리고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에 이어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3년간 웅진백제의 도읍지였다. 초기에 토성이었으나, 신라 영토가 되면서 석성을 쌓은 토석혼축산성이다. 웅진성은 고려시대에 공산성이 되었다. 고려 현종 2년(1011)이다. 거란족의 침입에 나주로 피난 가던 현종이 이곳 공산성에 들렸다. 그리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또다시 6일을 머물며 절도사 김은부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 인연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