공주 공산성 쌍수정 인조 느티나무
백제의 제22대 문주왕(?~477)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에서 개로왕의 아들이라 했으나, 왜의 일본서기는 개로왕의 동생이라 했다. 이 문주왕이 475년 고구려 장수왕의 침략으로 한성에서 웅진으로 수도를 옮겨 쌓은 성이 공주의 웅진성(공산성)이다. 그리고 삼근왕, 동성왕, 무령왕에 이어 성왕 16년(538)에 사비(부여)로 천도할 때까지 5대 63년간 웅진백제의 도읍지였다.
초기에 토성이었으나, 신라 영토가 되면서 석성을 쌓은 토석혼축산성이다. 웅진성은 고려시대에 공산성이 되었다.
고려 현종 2년(1011)이다. 거란족의 침입에 나주로 피난 가던 현종이 이곳 공산성에 들렸다. 그리고 개경으로 돌아가던 중 또다시 6일을 머물며 절도사 김은부의 극진한 환대를 받았다. 이 인연으로 김은부의 세 딸은 현종의 왕비가 되었다.
지금의 성은 임진왜란 이후의 모습이며 한 때 ‘쌍수산성’이라고도 했다. 조선 인조반정(1623) 이듬해이다. 인조는 반정에 가담했던 이괄이 자신의 논공행상에 불만을 품고 난을 일으키려 한다는 상소를 받고 이괄의 아들을 잡아 오라고 했다. 이에 이괄은 1624년 1월 22일 평안도 영변을 나와 개성을 지나고, 임진강을 건너, 한양에 입성 선조의 아들 흥안군 ‘제’를 왕으로 내세웠다. 이에 인조는 내란임에도 상황이 다급함에 공주까지 내려왔다. 그리고 두 그루 큰 나무가 있는 공산성 언덕에 올라 난이 평정되기만을 기다리며 6일을 머물렀다.
이때 임씨 성의 백성이 콩고물에 묻힌 떡을 진상하자 인조가 무슨 떡이냐고 물었다. 그리고 떡의 이름이 없다는 말에, 인조는 임 씨가 만든 떡이 절미하니 ‘임절미’라 하자고 했다. 이 ‘임절미’가 세월이 흘러 ‘공주 인절미’가 되었다.
난이 평정되고 공산성을 떠나며 인조는 자신이 몸을 기댔던 두 그루 나무에게 금대를 걸어주고 정3품 벼슬을 내렸다. 그 뒤 나무는 죽었으나, 1735년 영조는 두 그루 나무가 있던 자리에 쌍수정을 세우고 사적비를 건립하였다. 쌍수산성 이름은 이때의 인연이다.
공산성은 웅진백제의 도성으로 방어성이자 왕궁이다. 북쪽으로는 금강이 흐르고 동서남쪽은 가파른 언덕인 천혜의 요지이다. 동서남북으로 문을 두었으니, 정문 역할을 하는 서문은 금서루이고 동문은 영동루이다. 남문인 진남루는 조선시대에 삼남의 관문이었다. 임진왜란 때 의승병의 사찰 영은사와 그 아래 연지, 금강의 나루터였을 만하루를 지나면 북문인 공북루이다.
또 공산성에서 가장 높은 곳에 있는 광복루는 군사가 주둔하던 중군영 대문으로 일제강점기 웅심각이라 했다. 그러다 8·15해방 뒤 김구, 이시영 선생이 나라 찾음을 기리고자 광복루라 부르자 하여 새 이름이 생겼다.
이곳 임류각은 백제 왕족의 연회장소였다. 이 화려한 누각을 세운(500) 동성왕은 이듬해에 세상을 떴다. 임류각 가까이 3기의 비가 한 채의 비각 안에 있으니 명국삼장비다. 정유재란 이듬해(1599)에 공주에 주둔한 명의 이공, 임제, 남방위 등 세 장수를 기리는 비다. 선조가 금강 변에 세웠으나 홍수로 매몰되어 숙종이 일으켜 세웠다. 일제강점기 일인들이 ‘왜구(倭寇)’등의 글자를 훼손하고, 공주읍사무소 뒤뜰에 파묻은 것을 해방 뒤 현재의 자리로 옮겼다.
이밖에도 금강의 얼음을 보관했던 석빙고와 저장시설인 목곽고 등의 유적이 있다. 공산성을 한 바퀴 휘둘러 보고 쌍수정에서 내란으로 몸을 피했던 인조를 다시 생각한다. 인조가 기대섰던 나무의 아들 나무쯤 되는 느티나무를 바라보며, 평화가 아닌 전쟁이나 내란을 획책하는 어리석은 위정자는 결코 없기를 기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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