경남 함안군 어계 은행나무
고려 공민왕 때이다. 어느 날 밤 전서 벼슬의 조열, 판서 성만, 평리사 변빈, 박사 정몽주, 전서 김성목, 대사성 이색 등이 술자리를 가졌다. 이때 이색이 ‘비간은 죽었고 미자는 떠났으며 기자는 종이 되었으니, 우리도 각자 뜻을 따라서 처신하자.’고 하였다. 이색의 이 말은 논어 제18편의 미자편에 있는 ‘포악무도한 은나라 주왕의 폭정에 미자는 나라를 떠나고, 기자는 노예가 되었으며, 비간은 간언하다 죽었다’는 고사이다. 이색은 이 고사를 들어 고려의 몰락과 이를 지켜보는 참담함을 한탄했다.
1391년 조열은 공양왕에게 이성계의 병권을 빼앗아야 한다는 상소를 올렸으나 뜻을 이루지 못하고 경남 함안으로 왔다. 1394년 조선을 개국한 태조의 부름을 받았다. 정2품 공조전서가 되어 왕을 뵙는데, 거문고 한 곡을 요구받았다. 이에 조열은 ‘전왕의 연석에서도 탄금을 고사하였는데, 지금 청을 받아들이면 무슨 면목으로 지하에서 선왕을 뵙겠습니까.’라고 거절하였다.
그 뒤 1399년 이번에는 정종이 태조의 어진을 부탁하자, ‘공민왕의 어진 요청에도 불응하였다’며 또 거절하였다. 정종이 노하여 옥에 가두었으나, 이를 알게 된 태조가 곧 석방하였다.
조려(1420∼1489)는 이 거문고와 서화에 능한 조열의 손자이다. 함안군 군북면 원북리의 어계고택은 조려가 태어난 집이다. 유품인 죽장과 하사품인 동 향로가 보관되어 있고 5백 살이 더 되는 은행나무가 지금도 청청이다.
1453년의 계유정난은 세종의 둘째 아들이고, 문종의 아우인 세조가 반대파를 숙청하고 스스로 왕위에 오른 정변이다. 이로써 조카인 단종과 숙부인 세조의 강압적인 왕위교체가 있었다. 이에 조정의 신료들은 두 왕에 대한 지지파와 반대파로 갈라졌다. 그리고 세조의 반대파는 적극적 반대파인 사육신과 소극적 반대파인 생육신으로 나누어졌다. 이런 혼란스러움에 절망한 조려는 홀연히 낙향하여 은둔하였기에 생육신이라 불린다.
이때 조려는 노산군이 되어 강원도 영월에 유리 안치되자 오백여 리의 길을 걸어 수시로 단종을 찾아 문안을 드렸다. 이때 역시 충북 제천의 생육신인 원호와 경북 봉화의 이수형 등과 뜻을 같이했는데, 영월 수주의 요선정은 이들이 만났던 곳이고 원주 치악산에도 유적이 있다. 조려는 원호, 이수형과 함께 관직에 나가지 않을 것을 맹세한 뒤 치악산 정상 바위에 이름을 새겼는데, 바로 삼공제명암이다.
1457년 세조는 단종의 복위를 꾀하는 금성대군과 단종의 장인 송현수를 죽이고 10월 24일 단종에게 사약을 내렸다. 이 소식을 듣고 조려가 영월 청령포에 당도하니 한밤중이었다. 누구도 함부로 건너지 못하는 나루에는 나룻배도 없었다. 조려가 의관을 벗어 등에 지고 강을 헤엄쳐 건너는데 홀연히 등짐을 잡아당기는 물체가 있었다. 호랑이였다. 그렇게 조려는 호랑이 등에 업혀 청령포에서 통곡 사배하고 다시 나오니 이번에도 호랑이가 강을 건네주었다.
조려는 단종 왕의 넋을 공주 동학사에 모신 후 함안으로 돌아왔다. 그리고 상복을 입고 삼년상을 치렀다. 세조가 여러 차례 관직에 불렀으나 끝까지 거절하여 나가지 않고 독서와 낚시로 은거생활을 이어갔다.
사람들은 조려가 머무르던 서산을 중국 은나라의 충신 백이와 같다 하여 백이산이라 불렀다. 조려는 1489년 70세에 세상을 떠났다. 그리고 세월이 흘러 충절의 조려 선생은 이제 뵙지 못하지만 어계고택의 은행나무가 그 숭고함을 대신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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