곡성 옥과 입면 조통 느티나무
아왕공주는 고려 20대 신종의 딸로 본명이 공심(公心)이다. 이때는 최충헌의 무신정권 시기로 일부 집단의 권력 독식은 고려를 극도로 부패시켰고, 백성들은 그들의 횡포에 시달렸다.
1198년 최충헌의 종 만적의 난, 1199년 명주(강릉)의 도적이 삼척과 울진 두 현을 함락시켰고, 동경(경주)에서도 도적이 명주현의 도적과 연합하여 노략질을 일삼았다.
1200년 4월 진주 민란, 같은 달에 밀성(밀양)의 관노 50여 명의 관가 습격, 운문(청도)의 난민들 반란이 있었다. 8월에는 동경(경주)에서 이의민의 친족들과 아전들의 싸움이 있었다. 김해에서도 하층민들이 관군과 대치하였다.
이에 ‘신종실록’은 신종은 허수아비처럼 왕이라는 이름으로 백성들 위에 앉아 있었을 뿐이니 참으로 애석한 일이다.’고 하였다. 이 신종이 선정왕후 김 씨와의 사이에 두 아들과 두 딸을 두었다. 두 아들은 21대 왕 희종과 양양공 ‘서’이며 두 딸은 ‘효회’와, ‘경녕’이다. 이 두 딸 중 과연 누가 아왕공주인지는 명확지 않다. 다만 옥과의 성황당에 모셔진 아왕공주와 조통 장군, 그리고 무속에서 ‘우리 임금아, 공심은 우리 제례의 임금(주인)이요, 남산이 본향이다’라며 아왕공주를 무조의 신으로 모시는 것에서 상황을 유추할 수밖에 없다.
그렇다면 조통 장군은 누구인가? 전남 곡성군 입면 약천리에서 태어난 조통은 고려 19대 명종 때 문과에 급제하고, 신종이 즉위하자 고공원외랑으로 금나라에 다녀왔다. 1199년에는 장작소감으로 경주의 도적을 소탕하고 한림학사가 되었다. 그럼에도 조통은 초가집에서 검소하게 살며 매사를 너그럽게 처리하니, 사람들은 그를 지상선인, 해좌칠현이라 칭송했다.
이 조통을 본 순간, 첫눈에 반한 사람이 있으니 아왕공주이다, 아왕공주는 조통에게 마음을 고백하고 부왕의 결혼 허락까지 받았다. 하지만 이미 처자가 있는 조통은 고민 끝에 공주 곁을 멀리 떠날 생각을 하고 신종에게 북변정벌의 장군직을 자원하였다.
조통이 북쪽 오랑캐들과 일진일퇴를 거듭하던 어느 날, 기습공격을 받아 군사를 잃고 왼손이 잘리는 상처를 입었다. 이에 군직을 사퇴하고 고향으로 낙향하여 죄인을 자처하며 살다가 쓸쓸히 숨을 거두었다.
한편 아왕공주는 조통을 애타게 기다리다 병석에 눕게 되었다. 병은 날로 깊어져 끝내 미치고 말았다. 왕은 아왕공주를 영험한 산신령이 있는 남산으로 보냈다.
아왕공주는 기도와 가무로 병을 치료하고 부왕이 친필로 쓴 ‘이 도(道)를 받으라’는 글귀를 말머리에 붙인 뒤, 말에게 몸을 맡겼다. 말은 마침내 옥과 고을에 이르러 더 나아가지 않았다.
아왕공주는 신의 뜻이라 여기고 무속으로 병자들을 치료하던 중 우연히 조통의 고향이 옥과임을 알았다. 하지만 조통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었다. 아왕공주는 조통의 묘를 지극정성으로 보살피면서 무(巫)의 전수에 힘쓰다가 한 많은 일생을 마쳤다.
곡성군 입면 약천리는 조통의 생가 마을이다. 이곳 마을 앞 느티나무 언덕에 비석 한 기가 외롭게 서 있다. 맺지 못한 사랑의 아픔을 세월로 켜켜이 쌓아온 조통을 기리는 비다.
천년 사랑이라지만 어찌 천년뿐일까? 그렇다. 까짓거 천년이 무언가? 만년, 억년도 부족한 게 사랑이다. 하지만 이 깊고 오랜 사랑도 그 시작은 첫눈에 맺어지는, 찰나의 순간에 이루어지는 알 수 없는 운명이고 숙명이다.
삶과 죽음도 다르지 않은 같은 이치이리라. 조통과 아왕공주의 이루지 못한 사랑이 저세상에서는 부디 이루어졌기를 약천리 조통 느티나무를 바라보고 염원하면서 발길을 옮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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