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길도 세연정 윤선도 소나무
해남 땅끝항과 남성항이나 완도 화흥포항에서 배에 오르면 다도해의 푸른 보석인 노화, 소안, 보길도 등 세 섬에 안겨볼 수 있다. 물론 조금만 더 발품을 팔면 이 세 섬과 얼싸덜싸 함께하는 뭍 섬을 팔 벌려 안아볼 수도 있다.
보길도는 그 생김새가 쟁기에 끼우는 보습 같아서 어원인 ‘보고래 섬’에서 얻었다. 윤선도(1587~1671)의 원림이 있는 마을 이름 부용동은 반쯤 핀 연꽃과도 같다 하여 얻은 이름이다. 그러니까 이곳을 둘러싸고 이어지는 산봉우리들이 푸른 바다 위에 둥둥 떠 있는 연꽃송이 꽃잎인 것이다. 어찌 보면 여러 차례 유배를 당하며 정치적 부침을 거듭한 윤선도 역시 물결치는 바다의 연꽃송이 같은 삶을 살았다.
인조 14년(1636) 12월이다. 병자호란에 인조는 강화도로 피난했다. 다음 해 1월 윤선도는 왕을 위해 가복 수백 명을 거느리고 강화도로 갔다. 그러나 이미 강화도가 함락되었다는 소식에 다시 왕이 있는 남한산성으로 가려 했으나 이번에는 왕이 항복하고 환도했다는 소식을 들었다. 이에 윤선도는 한없는 치욕과 절망감에 은거를 결심한 뒤, 뱃머리를 제주도로 돌렸다.
마침 거친 풍랑을 만나 뱃길에 있는 보길도로 잠시 피난했다. 그러다 아름다운 풍광에 이끌려 닻을 내리고 여생을 마칠 곳으로 삼았으니 부용동이다.
부용동에 집을 지어 낙서제(樂書齋)라 하고 바라보는 산봉우리를 격자봉(格紫峰)이라 했다. 조상이 물려준 막대한 재산으로 십이정각, 세연정, 회수당, 동촌석실 등을 지었으니, 오늘 우리가 잠시 세속을 떠나 선경에 취해볼 수 있는 이유이다.
윤선도는 당대의 정치인이자, 선비였고, 빼어난 문인이었다. 선대로부터 물려받은 유산도 막대했지만 간척사업 등으로 부를 불려 이를 아낌없이 투자했던 통 큰 경제인이기도 했다. 그렇게 윤선도의 재력 덕분이기도 했던 이곳 부용동의 8경이 있다. 그중 제3경이 세연정의 홀로 선 소나무이다. 세연정은 지상낙원이었지만, 유배지였다. 권력을 누리고 부렸던 정치인에게 아무리 좋은 풍광도 그저 스쳐 지나가는 바람이었을 수 있다. 그러니 홀로선 소나무는 고고한 학이면서 쓸쓸한 은거자의 자태 아닐까?
윤선도에 대한 평가는 다양하다. 당시 당쟁의 소용돌이에서 무엇을 하든 칭찬받기가 어디 쉬운 일이었겠는가? 당시 조선 조정의 정치 권력은 동인과 서인으로 나뉘어 있었다. 다시 동인은 남인 북인으로, 서인은 노론과 소론으로 나뉘었다. 윤선도는 동인이자 남인이었다. 그리고 서인이자 노론의 우두머리인 송시열의 견제 때문에 피해를 본다고 생각했다. 여기 보길도 바닷가 바위 암벽에 송시열의 ‘글씐바위’가 있다. 역시 제주 귀양길에 풍랑을 만난 송시열이 새겨놓은 글이다. ‘여든셋 늙은 몸이 바다 한가운데에 떠 있구나’의 그의 암각서 시 역시 권력의 허무함이다. 송시열 역시 홀로선 외로운 돛대였다.
윤선도가 두 살 때 죽은 이발(1544~1589)은 조선 중기의 문신으로 윤선도의 고모부였다. 이발은 문과 알성시에 장원급제하여 부제학이었고, 아우 이길도 별시 을과에 급제하여 응교였으나, 기축옥사에 둘 다 고문 끝에 죽었다. 동인 강경파의 영수였던 이발의 80대 노모와 어린 아들은 가장 처참한 압슬형으로 죽었다. 그래서인지 당시 기축옥사를 주도했던 정철에 대한 원한으로 이 집안에서는 제사 때 고기를 다지며 ‘정철정철정철’이라 중얼댄다고 한다. 당쟁의 소용돌이와 그 원한의 후유증이 얼마나 깊은지 알 수 있음이다. 세연정 앞의 홀로 선 소나무를 보며 고개 숙이다 문득 떠올리는 삶의 회한이자, 깨달음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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