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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원 정충사 황진 소나무

운당 2023. 11. 10. 18:02

남원 정충사 황진 소나무

 

조선시대 으뜸 장수는 누구일까? 대부분 이순신을 떠 올릴 것이다. 그럼 육군에서만은 누구일까? 여긴 답이 다양할 것이다. 하지만 단연코 황진(1550~1593)이다.

황진은 임진왜란에 나라의 운명을 바꾼 용장이다. 선조 9(1576) 27살 때 무과에 급제하였고 첫 전투는 1583년 함경도 회령의 야인여진 니탕개의 난 평정 때이다. 이때 평생의 벗이자 1593년 제2차 진주성전투에서 순절한 김해부사 이종인과 함께 눈부신 활약을 했다.

1590년 임란 두 해 전이다. 황윤길과 김성일이 조선통신사로 일본에 갈 때 선전관인 황진은 호위무사였다. 이때 일인들이 50보 과녁을 쏘아 맞히고 자랑하자, 황진은 작은 과녁을 그 옆에 세워 명중시킨 뒤, 마침 날고 있는 새 두 마리까지 떨어뜨렸다. 또 일본도 한 쌍을 사면서 머잖아 왜가 침입하면 이 칼을 쓰겠다.’고 했다.

또 화순 동복현감으로 부임할 때다. 황진은 비쩍 마른 말 한 마리를 사와 살찌게 키웠다. 그 말을 타고 적벽강 모래밭을 달리며 칼, , 활쏘기와 진법 등 병사 조련에 힘썼다.

1592년 왜가 침입하여 거침없이 북진하는 65일 황진은 용인전투에 참전했다. 왜장 와키자카 야스하루의 천 6백여 왜군에게 5~8만여 조선군이 어이없이 참패했는데, 황진의 군사만은 거침없이 적을 무찔렀고 피해도 없었다. 이어 황진은 남원성 방어를 위해 파견 나갔다가 710일 뒤늦게 웅치 전투에 참여했다. 조선군이 왜의 화력에 밀려 전주에서 10리 정도 떨어진 안덕원으로 후퇴해 있을 때였다. 황진은 왜의 앞을 막아 섬멸하면서 이치고개에 이르렀다.

왜병이 개미 떼처럼 낭떠러지를 타고 기어올랐다. 황진은 부사수 두 명이 쉴 틈 없이 건네는 화살을 받아 쏘고 또 쏘았다. 앞의 화살이 꽂히기도 전, 뒤 화살이 날아가 쏘는 대로 맞지 않는 것이 없었다. 적의 조총에 스쳐 상처를 입고도, 오른손 엄지 뼈가 드러나도록 쏘았다.

이치 대첩 뒤 수원 사평에서 홀로 왜군에 둘러싸였으나, 왜장의 말까지 빼앗아 타고 마구잡이로 적을 베어 왜군을 경상도 상주까지 몰아냈다. 결국, 왜군은 연이은 패배로 15934월 한양에서 부산포로 퇴각했다. 하지만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명령으로 왜군은 7월 진주성 함락의 총공격에 나섰다. 상주에 있던 황진은 병력 7백 명과 함께 진주로 갔다. 그러나 왜군 10만여 명에 놀란 권율, 곽재우, 선거이, 홍계남 등과 명군은 고개를 휘저으며 멀찌감치 물러나 버렸다. 이때 의령의 곽재우가 진주는 외로운 성이라 지켜낼 수 없다고 했으나, 황진은 김천일과 약속했으니 두 번 죽어도 싸우겠다고 했다. 또 어릴 적 의형제를 맺었던 형이 경상우병사 최경회였다. 그날 황진은 성 밖에 있던 최경회의 아내 논개를 만나 함께 입성했다.

진주성에서 황진의 활약은 용이거나 호랑이의 기세였다. 날이 덥기도 했지만, 웃옷을 벗어 던지고 흙과 돌을 날라 토산을 쌓아 28일에는 진두지휘로 왜병 천여 명을 죽였다. 하지만 시체 속에 숨어있던 왜병이 쏜 조총 한 발이 성의 목판에 튕겨 황진의 왼쪽 이마에 맞았다, 성루에 있던 황진은 장검을 쥔 채 적진을 노려보며 전사하였다. 그렇게 황진이 순절한 다음 날 진주성은 함락되었다. 하지만 왜 역시 임란 전투 중 가장 많은 4만여 사상자를 내고 물러났다. 육지에서는 황진, 바다에서는 이순신이 곡창 호남을 차지하려는 왜의 야욕을 막은 것이다.

그렇게 조선의 운명을 바꾼 황진의 시신을 남원 의병이 고향으로 모셨다. 그 뒤 황진의 말이 묘 앞을 지날 때면 걸음을 머뭇대며 슬피 울었다. 남원시 주생면에 황진기념관, 묘와 사당 정충사가 이웃이다. 그 정충사와 묘를 향해 고개 숙인 소나무를 보며 황진의 말처럼 머뭇머뭇 걸음이 헛디뎌진다. 고인 눈물이 앞을 가리며 점점 붉어지더니 핏빛으로 뚝 떨어진다.

황진 소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