산청군 이사재 박호원 배롱나무
지리산 들머리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의 이사재(尼泗齋)는 박호원(1527~1585)의 재실이다. 밀양이 본관인 박호원의 아버지는 호조 소속의 정3품 ‘내자시 부정’을 지낸 박이, 어머니는 황희의 5대손으로 한성부판윤을 지낸 황맹헌의 딸이다.
사대부 집안에서 태어난 박호원은 명종 1년(1546)에 사마시에 급제, 1552년 문과에 급제하여 1555년 함경도 북평사가 되었다. 1562년, 중종 무렵부터 나라를 시끄럽게 하던 임꺽정 토벌 때에 반국대적토포사 남치근의 종사관으로 공을 세웠다.
임꺽정은 홍길동, 장길산, 전우치와 더불어 조선의 4대 도적이다. 임꺽정의 아버지는 동네 우물물도 먹지 못하는 경기도 양주의 고리백정으로 관에 끌려가 죽었다. 이에 도적이 된 임꺽정은 경기도 양주에서 황해도 구월산에 이르는 지역을 장악했는데 지략과 통솔력을 갖추고 힘이 장사였다. 관은 임꺽정 무리의 토벌에 나섰지만, 빈민들이 이들을 도와 어려움이 컸다. 위정자들의 수탈과 학정에 시달리던 천민계층에게 이들은 의적이었던 것이다.
박호원은 이 임꺽정 토벌의 공으로 어느 역에서든지 말을 이용하는 숙마 1필을 상으로 받았다. 또 이듬해에 세자시강원 보덕이 되고 1565년에는 동부승지가 되었다. 그리고 선조 9년(1576) 대사헌, 1581년에 호조판서가 되었고 임진왜란 발발 7년 전인 1585년 세상을 떠났다.
박호원은 호조의 참판과 판서를 지낸 유능한 경제관료였다. 훈구파의 자손으로 동인과 가까웠으나 선조 시대의 사림파들과 원만한 관계를 유지한 너그러운 인품의 정치인이었다.
박호원은 증조부 시절부터 한양에서 지냈으나, 산청군 단성면 사월리에 꽤 너른 임야와 농지를 소유했다. 이곳 박호원의 재실 이사재 상량문의 기록 ‘세정사팔월’은 1857년이니 사후 270여 년 뒤 지어진 건물이다. 또 이사재는 여기 니구산과 사수천에서 한자씩 이름을 따왔다. 또 니구산은 공자의 고향인 산동 곡부의 뒷산, 사수도 그곳의 사수현에서 비롯된 이름이다.
이사재는 왼쪽의 니구산, 앞쪽의 사수천이 훤히 보이는 언덕배기에 있는데, 들어가려면 회화나무와 소나무가 수문장으로 지키고 있는 거유문을 지나야 한다. 거유라는 말 역시 맹자의 말씀 ‘인에 머물고 의를 따른다’는 ‘거인유의(居仁由義)’이다
이 재실 앞에 박호원의 외거노비가 살던 집이 있었다. 1597년 6월 1일(양력 7월 14일) 이순신이 하룻밤을 묵은 곳이다. ‘비 오다, 일찍 떠나 청수역에 도착하여 말을 쉬게 하였다. 저물녘에 단성 땅 박호원 농노의 집에 머물려는데 주인이 흔쾌히 맞아주었으나, 잠자리가 좋지 못하여 어렵게 겨우겨우 밤을 보냈다.’는 기록이 그것이다.
거유문을 들어서면 담 곁에 매화나무가 있다. 당시 농노 집 뜨락에도 매화나무가 있었다. 죽음의 문턱까지 갔던 옥살이와 고문 후유증, 모친상의 슬픔 속 이순신의 백의종군은 고난의 길이었다. 오늘의 이사재 매화는 그날 이순신의 마음을 어루만져준 나무를 대신하고 있다.
이사재 왼쪽 담 곁에는 유난히 연리지가 많은 2백여 살 배롱나무가 있다. 나무 아래 연못은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의 천원지방이다. 네모난 못 가운데의 둥근 바위가 마주봄이요, 한여름 노오란 어리연꽃과 붉은 배롱꽃은 바라봄이다. 다 연리지의 함께함의 인연이다.
이순신이 1576년 봄 식년무과에 급제하여 그해 12월 함경도 동구비보의 권관을 지내고 1579년 2월 귀경하여 훈련원봉사를 지냈으나, 당시 궁궐에서 여기 집 주인 박호원과 친분이 있었는지는 확인할 길이 없다. 하지만 이곳에서 보는 두 분의 인연도 매화처럼 향기롭고 배롱처럼 아름답기만 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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