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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운당 2024. 1. 19. 07:55

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

 

화순 이양면 쌍봉사 절집은 그 창건연대를 알 수 없다. 839년 신라 신무왕 때 적인선사 혜철이 하안거를 보냈다 하니 오래된 절집이구나 할 뿐이다. 또 문성왕 9년인 847년에 22년간의 당 유학을 마치고 금강산 장담사에 머물던 쌍봉화상 철감도윤이 이곳에 있었다. 절 이름 쌍봉사는 속성이 박씨로 이곳에서 입적하여 철감의 시호를 받은 쌍봉 도윤의 부도탑과 탑비, 우뚝 솟은 중조산 두 봉우리가 절을 향해 고개 숙인 것과 인연이 닿아있다.

장보고는 젊은 시절 당나라 쉬저우(徐州)의 무령군(武寧軍) 소장(小將)이었다. 용맹하여 말을 타고 창을 쓰면 감히 맞설 자가 없었다. 828년 신라 흥덕왕에게 당나라 해적의 노략질과 사고파는 노비의 근절책을 주장하고, 이의 해결책으로 완도 장도의 청해진 대사(大使)가 되어 왜와 당을 잇는 해상무역을 주도했다.

남북국시대 말기에 신라 왕정은 매우 불안정했다. 836년 흥덕왕이 재위 10년 만에 죽자, 왕의 사촌 김균정과 조카 김제륭이 왕위 다툼을 벌였다. 김제륭이 김균정을 죽이고 희강왕이 되자, 김균정의 아들 김우징은 장보고에게 몸을 의탁했다. 희강왕 재위 3년인 838년에 상대등 김명이 왕을 죽이고 민애왕이 되었다. 이듬해인 839년 장보고가 민애왕을 죽이고 김우징이 왕이 되니 신무왕이다. 하지만 신무왕은 3개월 만에 죽고 그의 아들은 문성왕, 장보고는 진해장군이 되었다. 청해는 바다를 맑게 함이고 진해는 바다를 억누름이니 두 말뜻이 같고, 장보고는 해상왕을 넘어 육지의 왕까지 되고자 했다.

845년 장보고는 딸을 문성왕의 왕비로 만들려 했으나 귀족들이 반대하자, 반기를 들었다. 846년 문성왕은 염장을 시켜 장보고를 죽이고 851년 청해진도 없앴다. 청해진 유민 10만여 명을 김제 벽골제 보수 노역장으로 보내니, 청해진도 진해장군도 한낱 폐허의 헛꿈이 되었다.

장보고는 823년에 중국 산동에 법화원을 세운 불교도이다. 청해진 10만 유민도 불교도였다. 이들이 벽골제 보수공사를 마치고 장보고가 지원하던 화순 이양 쌍봉사와 중장터의 운주사에 머물렀다. 철감선사가 경문왕의 요청으로 금강산 장담사에서 쌍봉사로 온 것은 그 청해진 유민으로 인해 흉흉해진 민심을 불심으로 위무하기 위함이었다.

이곳 철감선사탑은 국보이며 탑비는 보물이다. 또 후삼국의 견훤을 거쳐 고려 최씨무신정권의 실권자 최항이 환속하기 전 주지였다. 정유재란에 소실되어 현종과 경종 때 중창했다. 영조 때 여러 물품을 만들어 조정에 바쳤고 정조 때 절의 규모가 4백여 칸에 이르렀다. 그리고 중종 때 양팽손이 후학을 가르친 학포당과 한말 의병들의 의소와 격전지가 이웃이다.

여기 대웅전은 보기 드문 국내 유일의 3층 목탑이었다. 한국전쟁 때 절이 모두 불에 타고 이 대웅전과 극락전만 남았으나, 안타깝게도 19844월 대웅전은 연기가 되었고, 보물지정마저 사라졌다. 이때의 일이다. 농사일하던 노인이 불길에 휩싸인 대웅전에서 석가, 아난과 가섭존자의 삼존불상을 한 분씩 등에 업고 나왔다. 하나의 무게가 100kg이 넘어 장정 4명이 겨우 옮긴 불상이었다. 이 믿기지 않은 신통한 일을 대웅전 앞 두어 아름 감나무가 지켜봤다.

아직도 주먹만한 감을 주렁주렁 매다는 이 감나무에게 어찌 노인이 불상을 업었겠느냐는 물음을 입에 올리지 못한다. 세상사 아무거나 전설이 되고 민담이 되는 게 아니기 때문이다.

사람은 나이와 세월을 지혜와 현명함으로 쌓아야 빛이 된다. 하지만 나무는 그저 몸 안에 금 하나 그어 빛이 된다. 신묘한 약초가 아닌, 아궁이 불쏘시개도 마다하지 않으니, 어찌 빛이 나지 않을까?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에 천년 고찰의 역사가 또 주렁주렁 매달려 있음을 본다.

능주 쌍봉사 대웅전 감나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