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동 옥종면 강민첨 은행나무
거란족은 고구려와 발해의 옛 땅은 물론 몽골까지 차지하며 요나라를 세운 북방 기마민족이다. 이 거란족이 크게 3번 고려에 쳐들어왔으니, 993년(성종 12)의 1차, 1010년(현종 원년)의 2차, 1018년(현종 9)의 3차가 그것이다. 이때의 영웅이 강감찬이다. 거란과의 2차 전쟁 때에 모두가 항복을 말했으나, 강감찬은 끝까지 싸울 것을 주장했다. 이에 현종은 ‘강공책을 쓰지 않았으면 우리 모두 좌임(左衽)이 되었을 것이다.’며 강감찬을 문화평장사에 임명했다. 좌임은 ‘옷깃을 왼쪽으로 여민다’이니 곧 머리 풀어헤치는 거란족을 가리킨다. 이렇듯 거란 대신 여진이 북방의 패자가 되게 한 강감찬의 귀주대첩, 수나라를 무너뜨린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왜의 도쿠가와 막부시대를 연 이순신의 한산대첩은 세계사의 흐름을 바꾼 한국사의 3대첩이다.
1018년 12월이다. 거란의 3차 침입에 고려는 평장사 강감찬을 상원수, 대장군 강민첨이 부원수로 출전하였다. 이때 고려군은 평북 의주 흥화진 동쪽의 하천 삼교천의 물을 굵은 줄로 쇠가죽을 꿰어 막았다가 터뜨렸다. 그렇게 기선을 제압했지만, 거란군은 굴하지 않고 개경까지 진격했다. 하지만 고립무원으로 사태가 불리해지자 철군하기 시작했다.
그렇게 해를 넘겨 1019년 2월 1일(양력 3월 10일)이다. 퇴각하는 거란군 10여만 명을 고려군 20여만 명이 지금의 평북 구성시인 귀주 벌판에서 기다리고 있었다. 그리고 고려군은 삼교천, 거란군은 청천강을 두고 배수진을 쳤다. 고맙게도 하늘이 고려군을 도왔다. 북풍이 불던 시기인데 갑자기 세찬 남풍이 억센 비를 뿌렸고, 때맞춰 도착한 김종현의 1만 기병이 거란군의 등을 쪼개어 청천강으로 밀어 넣었다. 거란군의 시체가 들판을 뒤덮고 포로와 낙타, 말, 갑옷 등 전리품이 산더미였다. 고려사절요 권3의 ‘살아서 돌아간 자 겨우 수천 명이니 거란이 이토록 참혹한 패배는 전례가 없었다.’가 그때의 기록이다.
이때 부원수 강민첨은 흥화진 전투 뒤 곧장 개경으로 가는 거란군을 막으며 내구산에서 크게 이겼다. 귀주 전투 뒤에도 별동대를 이끌고 퇴각하는 거란군을 끝까지 추격 섬멸하였다. 거란군이 평북 삭주군 반령에서 압록강을 건너며 군사를 점검하니 겨우 수천 명이었다.
고려의 대장군 강민첨(963~1021)은 경남 하동군 옥종면 두방마을에서 태어났다. 진주 향교에서 공부하고 15살 무렵 고향으로 돌아와 활을 쏘는 사대를 세워 무술을 익혔다.
옥종면은 지리산의 덕천강이 진주 남강으로 흘러드는 산청, 사천, 하동의 경계 고을이다. 여기 두방산(569.7m)의 두양천이 내려와 첫 마을이 두방, 조금 내려와 두양, 덕천강에 이르러 숲촌 등 세 마을이 있다. 이 두방산에 강민첨의 사당인 두방재와 활 쏘는 사대 가까이 천여 살 은행나무가 있다. 바로 강민첨이 심은 나무이다.
또 강민첨의 무덤은 충남 예산에 있다. 무덤 아래에 마부 묘, 또 그 아래에 말 무덤이 있는데, 장군이 죽자 마부가 말의 목을 치고 자결하였기 때문이다.
아무튼, 거란 왕 현종은 3차 침략에서 혼쭐이 난 소배압에게 ‘적을 얕잡아 보고 경솔하게 깊이 들어가 이 지경에 이르렀으니 무슨 낯으로 나를 보느냐? 너의 얼굴 가죽을 벗긴 뒤 죽이겠다.’며 관직에서 쫓아냈다. 귀주대첩의 역사는 그렇지만, 역사는 끝나야 끝나는 것이다.
그렇다. 수든, 거란이든, 왜든, 아니면 지금의 누구든 역사를 거스르며 세상이 자기 것인 양 으스댄다면 그 ‘탐욕의 얼굴 가죽’을 벗겨야 역사가 바로 설 것이다.
여기 옥종면 두방리 천여 년의 세월을 품은 강민첨 은행나무는 올해도 노랗게 물들어 역사 앞에 한 점 부끄럼이 없다. 그 강민첨 은행나무를 올려다보며 천년도 한순간이구나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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