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61(끝)
여산석(礪山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삼천리(三千里) 좋은 경(景)은 호남(湖南)이 으뜸이라.
거어드렁 거리고 살아보세.
숫돌(礪山石)에 칼을 갈아 반인반신 괴수의 목을 베고 마침내 남평루(南平樓)에 올랐다. 이제 풍경(風景) 좋은 이곳에서 거어드렁 거리며 노래나 한 곡 부르련다.
남평은 남평 문씨(南平文氏)의 시조가 탄생한 탄강지다.
내려오는 얘기에 의하면 이렇다.
남평 문씨의 시조(始祖) 무성공(武成公)의 휘(諱-사후에 지은 이름)는 다성(多 省)이고, 자(字-본이름)는 명원(明遠)이다. 세칭(世稱)인 호(號)는 삼광선생(三光先生)이다.
신라 20대 자비왕 15년 2월에 이곳 남평 풍림리에서 태어났다. 이곳 동쪽 장자지(長者池)라는 못가에 우뚝 솟은 큰 바위가 있었다.
하루는 군주가 그 바위 아래를 지날 때 갑자기 오색구름이 바위를 감돌고 갓난아이의 울음소리가 은은히 들려왔다.
기이하게 생각한 군주가 사다리를 가져와 바위에 오르니 석함(石函)이 놓여 있었다. 뜻밖에도 함속에는 피부가 옥설처럼 희고 맑은 갓난아이가 있었다.
군주가 아이를 거두어 기르니 5세에 문사(文思)에 통달 사물의 이치를 깨달았으며 무략(武略)이 뛰어난지라, 문(文)을 성으로 삼고 이름을 다성(多省)으로 했다는 것이다.
또 석함(石函) 표면에 문(文)자가 씌어져 있어서 문씨(文氏)로 사성(賜姓)했다는 설도 있다.
아무튼 그 석함 속 아이는 무럭무럭 자라 14세에 대사도(大司徒), 18세에 대사마대장군(大司馬大將軍)에 이르렀다.
그리고 후일 후삼국 통일에 공을 세워 고려초 9품계의 향직 중 첫째등급인 삼중대광보국삼한벽상공신(三重大匡輪國三韓壁上功臣)이 되었다. 98세에 세상을 떴으며 남평개국백(南平開國伯) 태사태전(太師太傳)에 추증(追贈) 되고 식읍 3천호를 하사 받았다 한다.
이 분의 묘소가 남평면 덕룡산 웅치동(熊峙洞)에 있었다 하나 지금은 실전(失傳)되었고, 후손들은 탄강지인 풍림리 문바위 옆에 제단을 설단, 매년 3월 20일에 단제를 모신다고 한다.
아무튼 나그네는 우리들의 훌륭한 조상이 탄강하신 남평에 이르러 맨 처음 문바위를 참배하러 갔다.
뒤이어 옛 현청 자리인 남평초등학교에 들려 비석들을 살펴본다. 구한말 대원군이 이곳에 들려 잠시 유했다고 한다. 그 기념비가 있었다고 기억했는데 다시 찾아보려 아무리 둘러봐도 없다.
헛 기억의 꿈이었을까?
아무튼 오래된 느티나무는 말이 없고, 공원화 사업으로 잘 정리된 화단에 옛 현감들의 송덕비들만 둥그렇게 둘러앉아 지나버린 세월을 세고 있었다.
이 송덕비를 세우기 위해 민초들은 또 얼마나 고생했을지? 그래도 송덕비라도 세워줄만한 인물은 되었겠지?
나그네는 여산석에 갈지 못한 칼을 빼보지도 못하고 마지막 여정지인 드들강으로 간다.
하지만 무딘 칼이라도 휘둘러 괴수의 목을 벨 용기와 의지만은 용솟음이다. 하여 드들강 맑은 물에 칼을 씻어서 언제든 쓸 수 있게 남평루에 걸어놓을 속셈이다.
마침내 푸른 소나무 우거지고, 수양버들 늘어진 아름다운 드들강에 이른다.
이 드들강은 70년대까지만 해도 광주 사람들에게 가장 가까운 유원지였다. 한 여름에는 발 디딜 틈 없이 북적거린 곳이었다.
그 물놀이 계절이면 여기 저기 냇가에 걸린 솥에서 멍멍이와 달구 삶는 냄새가 사람들의 회를 동하게 했다. 먹을 게 귀해 쥐새끼라도 삶아 먹을 즈음에 그렇게 냇가에 걸린 솥에서 푹 삶아진 멍멍이, 달구새끼는 서민들의 호사스런 보양식이었다.
고등학교 시절 나그네의 친구 중에 돌팔매질을 기가 막히게 잘하는 친구가 있었다. 돌을 들고 있다가 번개처럼 휙! 던지면 달구 아니면 쥐새끼는 그 자리에서 즉사였다. 털이나 껍질을 뜯지도 않고 황토에 싸서 구우면 중국판 거지닭은 저리 가라였다. 여드름 돋는 한창 때, 흙이나 돌멩이도 소화시킬 그런 시절의 얘기다.
아무튼 또 안 좋은 기억 하나가 있는데 70년대 중반 놀이 배가 뒤집어져 이팔청춘 아리따운 아가씨들이 여럿 희생되는 참사가 있었다. 그렇게 인파가 몰리다 보니 드들강 유원지는 물놀이 안전사고가 잦은 곳이기도 했다.
이 드들강은 도곡천을 데리고 온 능주강을 받아서 영산강으로 들어가는 강인데, 드들 처녀의 슬픈 전설이 서린 곳이기도 하다.
얘기인즉슨 이렇다.
이곳 남도 제일의 곡창 남평 고을의 대지주 최 진사는 매관매직으로 벼슬을 샀으나 일자무식에 똥고집이었다. 뱉은 말이 곧 원칙이고 법이었다. 더하여 탐욕스런 그에게 ‘방종’이라는 외아들이 있었는데 부전자전으로 개망나니였다.
어느 해다. 벌써 여러 해 강물이 범람하여 농사를 망친 농민들은 최 진사에게 도지(賭只)를 갚지 못했다. 민심은 흉흉하고 최 진사의 표독스런 달구 눈은 농민들을 주구장창 볶아댔다. 그렇게 빛 독촉에 시달리며 농민들은 마른 침만 삼켜도 목구멍을 벌려 조사를 당했다.
드들 처녀의 아버지도 돼지움막 같은 최 진사네 아래채에서 서너 마지기의 땅을 부치며 살았다.
그 때에 이르러 만삭이던 사랑하는 아내가 딸 드들을 낳았다. 그렇게 몸을 푼 지 이태쯤 되었을 무렵이다. 드들 아버지가 화전을 일구러 간 틈에 최 진사에게 겁탈을 당한 드들 어머니는 그 자리에서 자결해버렸다.
이에 드들 아버지는 낫을 들고 최 진사의 침소로 들어갔으나, 오히려 살인미수죄로 몰려 변방 노역형을 살게 되었다.
홀로 남은 드들은 동네아낙들의 손으로 성장하였는데, 또 최 진사의 가노인 수양 총각이 ‘너는 크면 내 색시다’며 오빠처럼 극진히 돌봐주었다.
드들도 수양이 좋아 훗날 색시가 되기로 마음먹었고, 매일같이 감나무 아래에 정화수(井華水)를 놓고 아버지의 무사귀환을 빌고 또 빌었다.
그 지극한 기도가 하늘에 전해졌는지 드들이 16세 되던 해에 아버지가 돌아왔다.
하지만 드들 아버지의 몰골은 처참했다. 국경축성(國境築城)의 험한 일에 모진 매를 맞고 반신불구 폐인이 되었다.
그래도 드들은 아버지가 살아서 돌아온 게 기뻐 온갖 허드렛일을 하며 효성을 다했다.
이러한 효녀 드들의 아름다움은 날이 갈수록 빛났다. 댕기들인 금빛 머릿결의 아리따운 용모는 멀리서도 한 눈에 알아 볼 수 있었다.
하지만 호사다마다. 최 진사와 그의 망나니 아들 방종은 짝짜꿍으로 드들이를 범할 기회를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다.
그러던 중 마침내 기회가 왔다. 드들이 아버지의 병 구환을 위해 최 진사를 찾아가 도움을 청했던 것이다.
침을 흘리며 기회를 엿보던 최 진사는
‘이게 바로 궁조입회(窮鳥入懷)의 기회다.’며
‘내 첩이 되면 네 아비의 병을 고쳐주고, 너 역시 호의호식 시켜주마.’
라고 꾀었다.
이에 드들은 단호히
‘저는 이미 수양의 색시가 되기로 언약한 몸’
이라며 거절했고, 순간 최 진사의 태도가 돌변 드들을 강제로 덮쳤다.
이 때에 또 최 진사의 망나니 아들 방종이 제 아비를 몽둥이로 후려치면서
‘어느 후레자식이 이리 무례한고!’
먼 산을 보며 동문서답을 하였다.
천만다행, 그 틈에 드들은 도망을 쳤고, 닭 쫒던 개처럼 두 부자는 조선판(朝鮮版) 조선찌라시 방가가 되어 침만 질질 흘렸다.
그해, 폭우가 유별났다. 장대비가 연일 퍼붓자 언제 또 둑이 무너질까? 하고 마을 사람들은 전전긍긍이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날, 한 시에 모든 주민이 똑같은 꿈을 꾸게 되었으니 그 내용인즉슨 이렇다.
머리가 허연 산신령이 나타나더니
‘둑이 무너지지 않게 하려면 숫처녀를 제물로 바쳐라.’
하는 것이다.
하지만 누가 선뜻 ‘내 딸을 제물로 바치시오’ 하겠는가?
그러던 어느 날 밤이다. 드들이 아버지의 약값을 마련키 위해 밤을 지세며 삯바느질을 할 때였다.
그날도 비는 거칠게 퍼붓고 있었다. 새벽 축시(丑時) 무렵이다. 방종이 욕정을 누르지 못하고 기어이 드들의 방에 침입하였다. 이에 드들 아버지가 사력을 다해 방종의 다리를 잡고 늘어졌다. 그러다 그만 방종의 발길에 차여 머리를 벽에 찧고 즉사하였다. 당황한 방종은 드들까지 죽이려고 바느질감으로 덮어 눌렀다.
드들이 질식하자 죽은 걸로 판단한 방종은 부리나케 최진사에게 달려가 도움을 청했다. 최 진사는 아들이 살인자로 고초를 당할 것을 염려하여 드들 아버지를 암매장하고, 숨이 돌아와 살아난 드들마저 거친 강물에 던져버렸다.
그러자 이상한 일이 일어났다. 해마다 터졌던 둑이 드들 부녀가 죽은 뒤로는 큰물에도 불구하고 무너지지 않았다.
그렇지만 매일 밤 축시(丑時) 무렵이면 강에서 ‘드들, 드들!’ 소리가 들렸다.
“드들아! 드들아!”
드들을 사랑한 수양은 드들 부녀가 사라진 게 최 진사 부자(父子)의 소행이라 짐작했다. 하지만 아무 힘도 없는 자신의 무능력이 저주스러울 뿐이었다.
드들 부녀를 찾아 헤매던 수양은 강가(지석강)에 움막을 짓고 하염없이 강물만 바라보면서 ‘드들아, 드들아!’ 온종일 드들을 부르며 통곡하였다.
그러던 어느 날 수양의 모습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가 울부짖던 자리에는 헤진 짚신 한 켤레만 가지런히 놓여 있었다. 얼마 뒤 그 곳에서 버드나무 한 그루가 자라났다.
사람들은 수양이 죽어 나무로 환생했다며 그 나무를 수양버들이라고 불렀다. 그리고 강둑이 터지지 않고 ‘드들드들’ 우는 강을 드들강이라고 불렀다.
한편, 죽어서도 한에 사무쳐 구천을 떠돌던 드들의 원혼은 수양까지 죽자, 마침내 현감의 처소를 찾았다.
깊은 밤, 꿈속에 나타난 드들을 보며 가위에 눌린 현감이 허우적대다 눈을 뜨자, 머리맡에 진짜로 처녀 귀신이 서 있었다. 이에 놀란 나머지 현감은 드들의 원한을 듣기도 전에 죽어 버렸고, 그렇게 죽은 현감이 어느덧 세 명이나 되었다. 그러자 아무도 남평 현감으로 부임하려는 자가 없었다.
한편, 증광문과에 병과로 장원급제 사관을 역임하고 삼남지방 암행어사로 민심을 살피던 한 직지(直指)가 남평 고을에 이르렀다.
그리고 현감의 의문사를 보고받고, 사건의 진상을 파헤치고자 자신이 직접 현감으로 부임했다.
그날 밤이다. 역시 드들이 귀신의 모습으로 나타났다.
“너는 누구며 무슨 원한이 있느냐?”
직지의 말에 드들은 큰 절을 올리고 자신과 아버지 그리고 수양의 사연을 낱낱이 고했다. 직지는 드들의 모습이 비록 귀신이었지만, 그 사연이 워낙 생생한지라, 사실을 밝혀 그 원한을 반드시 풀어주겠노라고 약조하였다.
다음날 직지가 최 진사를 문책하니, 처음에는 발뺌하였으나 조목조목 따져가니 결국 죄를 실토하였다. 이에 직지는 최 진사의 전 재산을 몰수하여 마을주민들에게 똑같이 나누어 주고 팽형(烹形)을 언도했다.
팽형은 나라와 백성의 재산을 탐한 관리나 관직을 매매한 관료들에게 내리는 중형이다.
이 팽형은 사람이 많이 다니는 저자거리에 커다란 솥을 걸고 흰 옷을 입힌 죄인을 데려와 솥 속에 넣고 장작에 불을 지피는 시늉을 한다. 그렇게 죄인을 삶아서 꺼내면 죄인의 식솔들은 장례절차에 따라 빈소를 차리고 조문을 받으며 호곡한다.
이런 절차를 마치면 죄인은 살아있어도 호적과 족보에 사망으로 기록되고, 혹여 외출 시에는 흰옷을 입고 머리를 산발한 채 시체처럼 다녀야 한다.
그러니까 팽형이란 직접 사형이 아닌 간접 사형이라 할 수 있는 바, 이 형을 받으면 대부분 수치심을 못 이겨 스스로 자결을 했다.
최 진사도 역시 팽형 언도를 받고 그 자리에서 심장마비로 죽었다. 이에 그의 망나니 아들 방종도 미치광이가 되어 떠돌다가 목을 맸다.
마침내 남평 고을에 평화가 찾아왔다. 마을사람들은 생전 처음 자신의 땅을 가질 수 있게 해준 직지에게 감사의 표현으로 곧은 성품과 강직함을 상징하는 소나무를 드들강에 심었다. 해마다 그 나무 수가 늘어 길이가 십리에 이르는 송림십리길이 되었다. 또한 밤만 되면 ‘드들드들’ 울던 강도 조용해 졌다.
그리고 수양이 죽은 자리에서 자란 버드나무들이 이내 강을 감싸고, 그 가지들이 강물에 닿았다.
드들의 금빛 머릿결처럼 빛나는 그 강물에 늘어진 버들, 그 모습이 마치 애틋한 연인의 만남 같았다.
그래서일까? 이곳 수양버들 늘어진 드들강에서 사랑을 고백하면 반드시 이루어진다고 한다. 또 드들강에서 멱을 감으면 머릿결이 빛나고 피부는 백옥같이 된다고 한다.
아! 그래서 남평에 선남선녀들이 많았던 거구나.
아무튼 슬픈 사랑이 기쁨으로 살아나는 강, 민초들의 애환을 치유하는 강, 악행은 반드시 대가를 치르게 된다는 교훈의 강이 곧 드들강이다.
또 이곳 드들강에 이 고을 출신 작곡가 안성현의 노래비 ‘엄마야 누나야’가 서 있다.
안성현은 ‘부용산’의 작곡가이기도 한데, 한국전쟁 중 월북, 공훈예술가 칭호를 받았고 2006년 작고했다 한다.
소월의 시 ‘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뜰에는 반짝이는 금모래 빛/뒷문 밖에는 갈잎의 노래/엄마야 누나야 강변 살자.’는 우리 귀에 익은 정겨운 노래다.
하지만 빨갱이, 종북만 갖다 붙이면 ‘게임 끝’인 이 나라다.
안성현은 전설적인 무용가 최승희의 남편이자 시인이었던 안막(安漠1910~ 1958?)의 조카로 일본 유학을 했고, 해방 뒤 광주사범학교 병설중학교에서 잠시 교편을 잡은 적이 있었다. 하지만 그가 작곡한 부용산 노래를 호남지역 조선인민유격대(빨치산)들이 애창했고, 또 월북하여 공훈예술가가 된 사유로 그동안 독재 군사 극우정권의 냉대를 받았다.
그렇게 쥐닭 무리 종자와 그 추종자들의 종북 프레임 광기를 보면 섬뜻하지만, 이 나그네는 추호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이미 나그네는 그들을 팽형(烹形) 시켰으니까. 하하하!
남평은 전라남도 나주시의 읍으로 백제 시대에는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 신라 영토 확장 뒤 경덕왕이 형웅현으로 고쳐 무주(武州)에 속하게 하였다.
고려에 이르러 남평(南平) 또는 영평(永平)으로 불렸고 현대에 이르러 읍이 되었다.
이 남평 고을에서 마침내 호남가 기행을 마친다.
2011년 7월 15일 첫 기행을 떠났으니 햇수로 3년만이다.
이제 다시 만인화(萬人話)기행을 나서 이 땅에 얽히고설킨 얘기를 풀어볼 생각이다.
끝은 새로운 시작, 하지만 여정을 마치며 감회가 새롭다.
시대가 시대인지라, 무엇보다 기행기에 쥐닭 욕을 자주 한 것이 조금 맘에 걸린다. 미안해서가 아니라, 친일수구파, 독점자본가, 반인반수 괴물들이 판치는 이 세상이 너무 편향적 이어서다.
하지만 정처없이 떠도는 기행은 가장 개인적인 일상에서 시작되는 삶의 연장 아니겠는가? 그럼에도 불편했다면 하는 수 없지만, 시국에 대한 나그네의 견해를 널리 해량하여주길 바라며 발길을 거둔다.
그리고 모든 것에 감사드릴 뿐이다. <끝>
<문다성의 탄강지>
<문암>
<단비>
<장자지터>
<남평동헌터>
<동헌터의 노거수>
<드들강>
<반인반수 괴수를 물리친 남평 고을은 날로 새로워지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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