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9

운당 2014. 3. 31. 08:50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9

 

호남(湖南)의 굳은 법성(法聖) 전주(全州) 백성(百姓)거느리고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고 돌아

 

호남(湖南)의 곧고 바른 거룩한 정신(法聖)으로 온 백성(全州) 위하며, 만리장성(長城)을 쌓고, 긴 강(長水)으로 둘러막았다. 충의와 절의의 고을 장수(長水) 땅에서 천년만년 살고 지고, 살고 지고.

 

장수(長水)는 물 맑은 고을이다. 맑기만 한 게 아니라, 이름만으로도 행복하니 인간의 오욕을 씻어주는 고을이다. 장수(長水)는 흘러흘러 우리를 충의와 절의, 사랑과 헌신으로 오래 살게 하는 장수(長壽) 고을이다.

이따금 장수 고을을 지나치며 작은 인연만 닿아도 이 물 맑고 산 좋으며, 풍광 환한 장수(長水) 고을에서 장수(長壽)하고 살면 행복할 텐데.

그렇게 눈을 멈추고 바라보며 부러워했다.

 

아무튼 장수(長壽)는 그저 목숨만 길게 사는 것이 아니다.

스무 살 꽃다운 나이에 순절했지만 이곳 장수 고을 태생 주논개처럼 충의와 절의, 사랑과 헌신으로 올바르게 사는 사람이 길게 사는 것이다.

입 더러워지니 더 말하고 싶지는 않지만 쥐나 달구새끼 종자의 발가락에 코를 묻고 똥구녁을 빠는 인간들은 아무리 오래 살아도 허접 쓰레기일 뿐이다.

 

그런데 도둑, 사기, 부정비리 등을 잡아 조사하고 죄를 묻고 응징하여야 할 경찰, 검사, 판사 종자들과 그들을 주구(走狗)로 부리며 권부(權富)를 움켜쥔 갑()들의 변함없는 행태와 작태를 보라.

멀리 갈 것 없이 나그네가 살고 있는 광주고을만 봐도 그렇다. 세계수영선수권대회를 유치한다고 공문서를 위조한 우두머리는 또 다시 우두머리가 되겠다고 기염을 토한다. 세계적 망신살을 뻗친 사기 행태에 대해 경검판(警檢判)들이 어떤 책임을 묻고 벌을 줬는지, 사기꾼 우두머리와 짜고 치는 고스톱만 쳤는지 알 길이 없다.

또 어떤 잘난 놈은 향검, 향판을 특유의 능구렁이 요리 솜씨로 삶고 구워서 일당 5억의 짝짜꿍 황제노역 판결을 만들었다. , 일요일을 놀고도 25억의 죄값을 탕감 받았다.

호남가의 광주 고향이란 노래가 부끄러울 뿐이다.

 

지난 2004년이다. 나그네는 노무현 탄핵이 부당하다는 내용의 주장을 광주 우체국 앞에서 공개적으로 했다가 검찰의 기소로 몇 차례 재판을 받고 벌금형을 선고받았다. 그리고 벌금을 완납했다.

당시 검찰은 고법의 벌금판결이 부당하다고 구속실형을 주장하며 대법원에 항고까지 하는 바람에 벌금 액수가 많아지기도 했다.

‘5만원짜리들이 까불고 있어

그런 표정으로 빙싯빙싯 비웃으며 나그네를 쳐다보지도 않고 지 할 말만 주절대던 그 검사 놈 낯짝이 지금도 눈에 선하다.

 

하긴 누굴 탓하랴? 경검판들을 주구(走狗)로 부리는 세력을 선거 때마다 뽑아주고, 그런 싸가지 없는 인간들에게 굽실대는 우리 민초들이 병신이거나 노예 아니겠는가? 일차적인 책임이 바로 우리에게 있는 것이다.

하지만 진정으로 신이 있어 그런 나쁜 놈들을 응징한다면 나그네는 그 신을 부모님 섬기듯 하고 목숨이라도 바치겠다.

하지만 신이 있고 천국 극락이 정말 있다면 그걸 내세우는 자들, 돈과 권력에 환장한 쥐나 달구새끼, 또 그 추종자들이 먼저 갈 건데. 그러지 않은 거 보면 개똥밭에 굴러도 이승이 좋긴 좋은가 보다. 하긴 그 쓰레기 잡것들에겐 민초의 고혈과 기름을 짜 챙긴 장롱의 현금다발이 곧 천국, 극락일 테니 죽은 뒤의 신국(神國)이 어찌 눈에 차기나 하겠는가?

 

하여 그만 투덜대고 변영로 선생의 시를 읊으며 장수 고을로 들어간다.

 

논개

 

거룩한 분노는

종교보다도 깊고

불붙는 정열은

사랑보다도 강하다.

!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아리땁던 그 아미(蛾眉)

높게 흔들리우며

그 석류(石榴) 속 같은 입술

죽음을 입맞추었네!

! 강낭콩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흐르는 강물은

길이길이 푸르리니

그대의 꽃다운 혼()

어이 아니 붉으랴.

! 강낭콩꽃보다도 더 푸른

그 물결 위에

양귀비꽃보다도 더 붉은

그 마음 흘러라.

 

왜란 뒤 구전돼 오던 논개의 순국이 문자로 기록된 것은 1620년 무렵 유몽인(柳夢寅)어우야담(於于野談)’에 채록되고서다. 또한 순국한 바위에 의암(義岩)’이라는 글자를 새겨 넣은 것도 이 무렵이라 한다.

아무튼 논개의 충절을 임란직후 거들먹거리던 사대부(士大夫)란 자들은 제대로 평가하지 않았는데, 장수와 함양사람들이 얘기하는 논개의 생은 다음과 같다.

논개는 장수군 장계면 주촌리에서 훈학에 종사하던 선비 주달문과 밀양 박씨의 무남독녀로 1574(선조7) 태어났다. 출생 연월일시가 1574년 갑술년, 갑술월, 갑술일, 갑술시의 사갑술이고 술()은 개 술()이라서 놓은 개(낳은 개)’라 하여 논개라 하였다 한다. 또 어머니가 개를 태몽으로 꾸고 낳아서 놓은 개(논개)라고 하였다는 말도 있다.

주논개가 열네 살 나던 해인 1587년이다. 아버지가 죽고 천하 건달인 숙부가 토호(土豪)인 김 풍헌(風憲)에게 논개를 민며느리로 팔고 행방을 감추었다. 이 사실을 안 논개 모녀는 외가인 안의의 봉정마을로 피신하였다. 그러자 김 풍헌이 당시 장수현감인 최경회에게 논개 모녀의 심문을 요청하였다.

논개 모녀를 심문한 최경회는 사실을 파악, 이들을 무죄로 인정하고 관아에 머물게 한 뒤 병약한 부인의 시중을 들게 하였다. 그 뒤 논개의 재색에 감탄한 현감 부인이 최경회에게 논개와 혼인할 것을 권유하고 숨을 거둔다.

18세 되던 해 1591년 봄, 논개는 최경회와 부부의 인연을 맺고 무장현감으로 부임하는 최경회를 따라 장수를 떠났다.

1593년 최경회가 경상우도 병마절도사로 진주성싸움에 참가하게 되자 논개도 함께 갔고, 진주성 함락과 함께 남강에서 왜장 게야무라 로쿠스케(毛谷村六助)를 끌어안고 순절하였다.

그 뒤 진주성싸움에서 살아남은 장수 의병들이 최경회와 논개의 시신을 수습 고향으로 운구하다 함양군 서상면 방지리 골짜기에 묻었다.

 

여기서 잠깐 일인의 흉계(凶計)에 놀아난 기막힌 흉담(凶談)을 소개하겠다.

1970년 초, 일인 건축설계사 우에쓰카 하쿠유(上塚博甬)는 은퇴 후 후쿠오카현 다가와시의 히꼬산 자기 소유의 밭을 갈다가 오래된 묘비를 발견했다. 뜻밖에도 그 비석에 임진왜란 때 이름을 떨친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이야기가 써있었다.

신의 칼이란 별명을 가진 게야무라 로쿠스케는 임란때 쇼군으로 승승장구한 전설적인 사무라이였다. 그의 죽음은 그러나 명성에 걸맞지 않았다. 진주성싸움의 승리를 기념하는 자리에서 술을 마시다 논개라는 조선여인에게 죽임을 당한 것이다.’

이 비문을 읽은 우에쓰카 하쿠유는 평소에 존경하던 게야무라 로쿠스케의 억울함을 풀어주고 싶다는 생각에 참으로 기가 막힌 흉측(凶測)한 음모를 꾸몄다.

그는 1973년 처음으로 진주시청에 찾아가 자신은 논개를 존경하는 일본인이라며 진주 남강에서 논개와 게야무라의 넋을 건지는 일본식 의식을 치르며 국화를 뿌리고 1천마리의 종이학까지 띄웠다.

그리고 진주에서 가져간 나무, , 모래와 돌로 히꼬산에 두 사람의 무덤을 꾸미고 논개와 게야무라의 영혼결혼식을 치렀다. 또 논개의 영정과 똑같은 영정을 만들어 게야무라 영정 옆에 걸었다.

더하여 논개와 게야무라는 사랑을 했고, 전쟁이 끝난 후 일본에서 해로하다 죽었다는 기가 막힌 거짓 이야기까지 만들어냈다. 따라서 사람들은 논개를 부부금실을 좋게 해주는 섹스의 신으로 여기고 모시게 되었다.

그런데 기가 막힌 것은 당시 진주시는 그의 주장을 철석같이 믿고 흡족해하며 적극 협조했다. 1976년 음력 629일 우에쓰카가 세운 보수원 준공식 때는 진주문화원장 등 그를 도운 사람들이 부부동반으로 참석했고 시장은 감사장까지 수여했다고 한다.

그 우에쓰카가 1996년 여름에 다시 진주에 와서 진주 의기사(義妓祠)에 걸려 있는 논개 영정이 일제강점기 때 금차봉납도(金釵奉納圖)의 친일파 이당 김은호(金殷鎬)가 그린 것으로 적절치 못하니 자신이 사고 싶다고 했다 한다.

친일파가 그린 영정이니 일본으로 가져가는 것이 최선의 해결방법이 아니겠냐는 말이 타당하기도 하지만, 참으로 벨도 꼴도 없는 쥐닭무리들의 세상이 분명하다.

 

그러더라도 유쾌 상쾌 통쾌한 뒤 소식이 있다.

2008523일 논개 표준영정(79, 작가 윤여환) 봉안고유제(奉安告由祭)가 경남 진주 촉석루의 의기사에서 열렸던 것이다.

이는 2005510일 박노정 진주민예총 회장 등 4명이 친일파 김은호의 논개 영정을 떼어냈고, 곧바로 공용물건손상 등의 혐의로 불구속 입건되어 2007515일 대법원 상고심(주심 이홍훈 대법관)에서 피고인들의 상고는 이유 없다며 벌금 500만원을 선고한 원심을 확정 받고 일당 5만원짜리 노역까지 감수하며 얻어낸 결과다.

참으로 감사한 마음 금할 길 없다.

 

아무튼 더러운 얘기는 안들은 것만 못하여 귀와 눈을 씻고 장수 군청 앞마당으로 간다. 논개가 심은 천연기념물 제397호인 의암송(義巖松)과 젊은 시절 이곳에서 현감을 지낸 최경회가 심었다는 은행나무를 보기 위함이다.

! 이게 바로 의기(義氣)와 절개(節槪), 만고청풍(萬古淸風)의 기상 아닌가?

일개 소나무에 저절로 머리가 수그려진다.

논개가 심은 의암송은 420여 년이 지난 지금도 그렇게 그녀의 굳은 충절처럼 청청함을 잃지 않고 있었다.

이어 장수읍 두산리의 논개사당 의암사(義巖祠)에 들려 참배하고 길을 나선 김에 덕유산 육십령이 시작되는 전북 장수군 계내면 대곡리(장계) 주촌(朱村)마을의 논개 생가로 갔다.

예전 마을에서 조금 비껴 조성했다고는 하지만 의랑루(義娘樓), 단아정(丹娥亭)과 논개 생가 등을 둘러보며 임금이 버리고 간 땅에서 그 땅을 지키고 살아온 논개의 후예들과 눈 맞춤을 하니 날마저 화창하고 맘은 평화로웠다.

임이여! 그리 서서 후손들을 어여삐 여겨주소서.’

마지막으로 논개의 상 앞에서 강낭콩보다 더 푸른, 양귀비보다 더 붉은 그 이름에 머리 숙이고 장수와 작별한다.

 

장수는 우리 민족혼에 큰 영향을 끼친 의미가 있는 고장이다.

조선 선조 25(1592) 용의 해인 임진년에 도요토미 히데요시의 대군이 바다를 건너왔다. 임금은 도망을 갔고, 백성들은 왜군의 창검과 조총 앞에 맨몸으로 맞서야 했다.

장수 여인 주논개도 맨 몸으로 그 왜적에 맞섰고 20세 꽃다운 나이에 순절했다.

 

하지만 내가 내게 묻는다. 너는 나라를 위해 네 목숨을 버릴 수 있느냐고?

그리고 고개를 흔든다. 무엇 때문에 일당 5만원짜리가 일당 5억짜리를 위해 죽는단 말이냐?

 

나라가 나라다우려면 나라를 위해 목숨을 바치겠다는 사람들이 많아져야하지 않을까?

물 맑은 고을 장수. 맑기만 한 게 아니라, 인간의 오욕을 씻는 물이다. 그 장수를 돌았으니 이제 여산석에 칼을 갈아 남평루에 꽂으로 가야겠다.

 

<장수 군청 의암송과 은행나무>

 

 

 

<의암사>

 

 

 

<논개 생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