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7

운당 2014. 3. 18. 09:35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7

 

호남(湖南)의 굳은 법성(法聖) 전주(全州) 백성(百姓)거느리는그 법성(法聖)과 법성(法性)이 온 백성(全州)을 편안케 하는 세상은 정녕 꿈일까?

헛된 꿈이든, 아니든 굴비고을 법성을 지나 전주에 이른다.

 

전주는 이름부터 넉넉한 고을이다.

전주와 나주의 첫 이름자가 합쳐져 전라도가 되었다는 말이 있듯 온 백성을 품어주는 평화로운 고을이다.

금강, 만경강, 동진강이 품어서 펼치는 너른 들녘을 거느리고 온 백성을 먹여 살리는 풍요로운 고을이다.

그러니 흰구름처럼 떠도는 나그네에게 이처럼 편안하고 만만한 고을이 더 있을 리 없다.

평화롭고 넉넉한 인심이 물씬물씬 묻어나는 전주 고을에 들어서 한옥마을을 찾아간다.

물 흐르듯 날렵하면서 남산과 북산의 기상을 갖추어 덩실 기와를 올린 고래등 한옥은 예전에는 부와 권위의 상징이기도 했다.

하지만 현대에 이르러 냉온방이며 취사, 보안 등의 이유로 한옥은 아파트에 밀려 과거의 유물 취급을 받는다. 보기는 좋으나 먹기 힘든 떡이 되고 만 것이다.

그래도 전통을 지키며 한옥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은 어떤 분들일까? 고마운 마음으로 멀리서 한옥 마을을 쳐다본다.

가난한 나그네에게 고래등 한옥은 그림의 떡이다. 3년 정도 살면서 장광에 채송화도 심고 돌담 아래 봉숭아도 심어보고 싶다는 꿈만 꾸고 이씨들의 조선개국성지 경기전으로 간다.

교과서에서 봤던 태조의 어진이 있고, 왕들의 일거수 일투족을 기록한 실록이 있는 곳이다. 그러니까 경기전은 조선 5백년을 누린 전주 이씨들의 사당이기도 한 셈이다.

전주는 조선을 개국한 태조 이성계의 본향으로,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가 동북면 쪽으로 이주해갈 때까지 살았던 곳이다. 조선 왕조는 건국 후 이를 기념해 전주에 경기전을 건립하고 여기에 태조 어진(초상화)을 봉안하였다. 경기전(慶基殿)이라는 이름은 왕조가 일어난 경사스러운 터라는 의미이다.’

경기전에 대한 설명이다. 일제 강점기에 터 일부가 뚝 잘려나가는 치욕과 모욕을 당하고도 잘 버텨서 박제된 역사의 눈물을 닦고 있는 경기전을 그렇게 둘러보며, 태조 어진 어좌의 뒤쪽 배경 그림인 오봉산도 앞에서 두 다리 쩍 벌리고 사진까지 찍으니 대왕의 위엄도 한낱 봄꿈이다.

 

조선 5백년, 양반의 뼈와 상놈의 뼈가 다르다는 생각을 갖고 살았던 때다.

댓글과 조작, 부정으로 나라의 권력을 침탈한 짝퉁이 눈알 부라리는 나라, 독립군 잡던 친일매국노의 자식들이 판을 치며 민초들을 훈계하고 가르치는 현실에서 차라리 조선의 그 왕뼈들이 위엄을 부리던 때가 그리워진다.

 

그러거나 말거나 경기전 한 모퉁이에 홍매가 꽃송이를 벌리고 있다. 새 봄의 꽃이라 더욱 아름답고 정겹다.

경기전을 둘러보고 가까이 이마를 맞대고 있는 전동 성당, 풍남문을 쳐다본다.

전동 성당은 천주교 최초의 순교자 윤지충(1759~1791)의 순교지인 풍남문 밖에 세웠다가, 현재의 자리에 확장하여 지었다 한다.

프랑스 인 보두네 신부가 부지를 매입, 서울 명동성당을 설계한 프와넬 신부가 설계, 23년 만에 완공한 로마네스크 양식의 건물이라 한다. 성당건축에 사용된 일부 벽돌은 당시 일본 통감부가 전주읍성을 흙으로 구웠고 풍남문 인근 성벽에서 나온 돌로 성당의 주춧돌을 삼았다 한다.

풍남문이라는 이름은 한나라를 건립한 유방의 고향 이름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유방의 고향이 풍패(豊沛)였고, 조선 시대에 전주를 풍패지향(豊沛之鄕)이라고 했다한다. 따라서 풍패는 건국자의 고향을 일컫는 말이다.

 

민초들의 입으로 내려온 이바구에 의하면 태조의 고조부 목조 이안사(穆祖 李安社)는 힘이 천하장사였다고 한다. 사랑하는 여인을 전주 산성별감(山城別監)이 탐내고 장관인 지주(知州)가 합세하자, 이안사는 여인을 등에 업고 삼척으로 한달음에 달려간 뒤, 함흥으로 이주하였다 한다.

사실이든 아니든, 참으로 부럽고 신이 나는 사랑 얘기다. 사랑하는 이를 들쳐 업고 그 어딘들 못 가랴?

만나고 헤어짐이 전광석화와 같아진 현대에서 되새겨볼 사랑의 전설인 셈이다.

 

전주 고을, 먹거리도 많은 고을이다.

먹거리가 많다는 것은 민초들의 삶이 여유롭고 인심도 후했다는 증거다. 온 백성을 거느려 먹여 살리는 고을이니 당연한 일이다.

전주비빔밥, 콩나물 국밥, 막걸리 등, 민초들의 삶과 가까운 음식을 먹고 마실 수 있으니, 전주는 그렇게 법이 없어도 살만한 호남의 제일 고을이다.

 

장성(長城)을 멀리 쌓고 장수(長水)를 돌고 돌아

여산석(礪山石)에 칼을 갈아 남평루(南平樓)에 꽂았으니

삼천리(三千里) 좋은 경()은 호남(湖南)이 으뜸이라.

거어드렁 거리고 살아보세.

이제 호남가도 마지막 구절에 이르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