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4

운당 2013. 12. 8. 07:59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4

 

심산유곡(深山幽谷) 산골(谷城)의 묻힌 선비 예()를 구()하여, 큰 덕(興德)을 일으키니 서로 돕고 의지하는 편안한 가정 부안제가(扶安齊家)가 바로 이 곳 아닌가?

호남가 한 자락이 흥덕 고을에 이르렀다. ()으로도 감사한데 더하여 일어나는구나(). 등 따습고 배부른 고을이 바로 흥덕(興德)이다.

낯선 길 지나가다 , 아름다운 고을이구나. 이런 곳에서 살았으면 하는 곳이 있다. 흥덕(興德)은 바로 그런 고을이다.

지장, 덕장, 용장 중에 그중 제일은 덕장이라 한다. 덕으로 흥할 흥덕이란 이름처럼 좋은 이름이 또 있을까?

이 고을 이름으로 본관을 삼은 흥덕 장씨(興德 張氏)의 유래를 살피면 이 고을의 유래도 알 수 있다.

흥덕 장씨(興德 張氏)의 시조 장유(張儒)는 신라 말에 난을 피해 중국에 건너가 중국말을 배우고 고려 태조가 3국을 통일한 뒤 환국했다. 광종이 예빈성에서 중국 사신의 영접을 전담케 했다. 벼슬이 태봉국(泰封國)과 고려 태조 때 중앙의 최고 관부인 광평성(廣評省)의 차관격인 광평시랑(廣評侍郞)에 이르렀다.

또 장유의 아들 장연우는 고려 현종 때 거란군이 침입해오자 왕을 호종하였고, 중추원사, 호부상서를 역임하였고, 뒤에 상서우복야에 추증되었다.

그렇게 후손들이 지금의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인 상질현에서 여러 대에 걸쳐 살았다. 그러다 6세손 장기가 고려시대의 정2품 관직인 평장사(平章事)를 지내고 흥덕군에 봉해졌기에 본관을 흥덕으로 했다 한다. 흥덕현을 한 때 흥성(興城) 또는 흥산(興山)으로도 불려 흥덕 장씨를(興德 張氏) 흥성 장씨(興城 張氏)라고도 한다.

이렇듯 흥덕은 전라북도 고창군 흥덕면 일대에 위치하는 지명이다. 백제 때에는 상칠현(상촌현)이라 하다가 757(신라 경덕왕 16)에 상질현으로 고쳐 고부군의 관할이 되었다. 1018(고려 현종 9) 이후 장덕현으로 고쳐서 감무를 두고 고창을 겸해 다스리게 하였다가 1308(충선왕 1)때 왕의 이름이 장()이어서 장을 흥으로 바꾸어 흥덕이 되었다. 1401(태종 1) 고창현을 분리하고 흥덕현으로 독립하였으며, 흥성현이라고도 하였다. 1895(고종 32) 지방제도 개정으로 전주부 흥덕군이 되었고, 1896년 전라남도 흥덕군이 되었다. 1914년 군면 폐합으로 흥덕면으로 축소되어, 고창군에 통합되었다.

삼국사기지리지에 흥덕에 대한 지명 유래가 있다.

상질현(尙質縣)은 본시 백제의 상칠현(上漆縣)으로 경덕왕이 개명하여 지금도 그대로 한다.’고 하였다.

신증동국여지승람에 흥덕은 본래 백제 상칠현(上柒縣)이었는데, 신라 경덕왕이 상질(尙質)로 고치어 고부군에 붙였다. 고려에서는 그대로 붙였다가 후에 장덕현(章德縣)으로 고치어 감무를 두고 고창을 겸임하였으며, 충선왕이 즉위하여 왕명을 피혐하여 지금 이름으로 고쳤다.’라는 기록이 있다.

201210월 하순, 흥덕에 도착하여 맨 먼저 들린 곳은 흥덕 동헌이다. 지역이 좁다보니 곧바로 찾을 수 있었다.

동헌은 배풍산(培風山)으로 올라가는 길가에 있었다. 동헌 앞 찻길은 지역주민들을 위해 벼를 말리도록 내주고 대문을 활짝 열어 나그네를 맞이했다.

이 동헌은 지금의 배풍산에 있던 흥성읍성에 있었는데 조선 순조 7(1807)에 이곳으로 이건했다고 한다.

옛날 서슬 시퍼렇던 현감이 정무를 보던 곳이지만 이제 찾는 이 없어 고즈넉하기만 하다. 목민관이 청백리였을 때는 백성들의 웃음소리가 동헌 담장을 넘었을 거고 탐관오리일 때는 거꾸로 신음 소리가 대들보까지 울렸을 거다.

하지만 이제는 다지나간 일, 인생무상, 제행무상이다. 동헌 안마당에는 작은 우물에 푸른 하늘을 흘러가는 흰구름이 담겨 있었다.

잠시 허망한 삶의 궤적을 되새기며 텅 빈 동헌 안마당을 기웃대다, 이정표 따라 흥덕 향교로 갔다. 건물만 보고 좁다란 길을 돌아서니 향교가 버티고 있었다.

이번 호남가 기행을 하면서 나그네는 되도록 향교는 들리지 않았다. 그 고을의 오랜 역사와 문화의 중심지 역할을 한 곳이 향교다. 그 앞에 가만 서 있어도 배움이 있을 것이다. 하지만 구름처럼 떠도는 나그네에게 그토록 답답한 장소가 또 있을까? 어쩌다 의관을 정제한 유생을 만나면 주눅부터 들 것이 뻔하다.

아무튼 모처럼 찾은 흥덕 향교의 오래된 나무와 유서 깊은 건물 앞에서 나그네는 유생들의 낭랑한 글 읽는 소리를 듣는다. 격렬한 시국 토론도 듣는다. 

흥덕향교는 태종6(1406)에 현남(縣南)쪽 목화정(木花亭) 부근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에 소실되어 광해 13(1621)에 현 위치인 흥덕면 고운리로 이건했다. 경내에는 대성전, 명륜당, 동재, 서재, 제관실이 있다. 대성전은 정면 3, 측면 2칸으로 된 맞배지붕의 건물이고 명륜당은 정면 5, 측면 2칸의 팔작지붕이며, 동재와 서재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맞배지붕이다.

대성전에는 대성지성 문선왕 공자를 중심으로 중국의 오성과 중국송대의 4현을 배향하고, 우리나라 18현인 설총, 최치원, 안유, 정몽주, 김굉필, 정여창, 조광조, 이언적, 이황, 김인후, 이이, 성훈, 김장생, 조헌, 김집, 송시열, 송준길, 박세채를 배향하고 있으며 매년 두 차례 봄과 가을에 이 분들의 뜻을 기리는 석전대제를 지낸다고 한다.

한 바퀴 둘러보고 나오는데 은행나무 한 그루가 눈에 띈다. 고사 직전으로 보이는 나무가 오늘날의 향교의 모습과 같아보여서 안쓰러웠다.

나라의 기본과 인간의 근본을 바로 세우고자 했던 학자들, 선비들의 기개가 사라져버린 현대사회 아닌가? 돈과 권력으로 재단되는 현실에서 얼어 죽어도 곁불은 쬐지 않겠다고 하던 굳은 의기와 기상의 그분들이 새삼 그립다.

향교에서 100m 쯤 거리에 전라북도 유형문화재 제36호인 당간지주가 있었다. 당간은 절에 행사가 있을 때, 기를 매달던 깃대이며, 당간지주는 당간을 세우기 위한 받침이다. 고려 초기에 만든 이 당간지주는 예전에 이 부근에 있던 절집 갈공사(葛空寺)의 것이라 했다. 

살펴보니 좌우 대칭으로 꼭대기의 바깥 면은 둥글지만 안쪽은 네모꼴이며 바깥 면 가운데에 불교의 상징인 연꽃을 새겨 운치를 주었다. 문외한의 눈으로도 빼어난 솜씨의 장인이 세운 잘 생긴 당간지주였다. 또 우람한 당간지주의 크기로 보아 당시 절집의 규모가 대단했음을 짐작해볼 수 있었다. 당간지주만 보아서는 지금의 순천 송광사나 구례 화엄사 정도의 사찰이 아니었을까? 여겨진다.

그런데 어쩌다 갈공사는 흔적도 없어지고 이 당간지주만 남았을까? 어쩌면 향교 터가 갈공사 자리가 아닐까? 초등학교 시절 배웠던 조선조 초의 국가 4대 시책 중의 하나가 억불숭유였다. 혹여 그 탓 아닐까? 하지만 아무도 아는 이 없으니 역시 무심한 세월에 물을 뿐이다.

돌아와 자료를 찾아보니 이런 기록이 있다. ‘흥덕향교는 1406(태종 6) 흥덕현(현 흥덕면) 남쪽 400m 거리의 목화정(木花亭) 부근에 창건되었다. 임진왜란 때 불타 없어져 1621(광해군 13) 현재의 위치로 이전하였다. 구전에 의하면, 명륜당 자리는 원래 갈산사 자리였는데 갈산사가 폐치되자 향교를 세웠다고 전한다. 그 후 유림들의 숙원으로 1675(숙종 1)에 어명에 의해 중창됐다.’

절집 이름이 갈공사와 갈산사로 달리 표기되긴 하지만, 나그네의 예측이 맞아떨어진 셈이다. 절집이건 향교건 민초들의 삶에 위안과 도움이 된다면. 그저 두 손 모아 합장할 뿐이다.

이어 다시 동헌 쪽으로 와서 배()가 엎드려 있는 형상이라는 배풍산 공원을 오른다. 흥덕읍(興德邑)성터를 찾아보려함이다.

개가 짖는다. 자그마한 절집이 있는데 이름이 흥덕사다. 스님은 어디가고 개 혼자 뭐가 무서운지 컹컹 짖으며 나그네를 쳐다본다.

저만큼 아래쪽에서 보니 훵하니 뚫려 읍성터지로 보였던 게 와서 보니 등산로였다. 그 사납게 할퀴던 태풍 볼라벤에 쓰러진 나무들이 많아서 더 훵하니 보였던 것이다. 땀을 줄줄 흘리며 가파른 언덕길을 숨 가쁘게 오르니 흥덕면이 한 눈이다.

마침 촌로를 만나 읍성터지를 물었다.

저 것이 읍성터요. 이 배풍산 허리를 주욱 두르고 있지요.”

아무리 봐도 읍성터로 보이지 않는 길이 배풍산 7부 능선쯤의 허리를 뚫고 있었다. 가까이 다가가 쭈그리고 앉아 자세히 살펴봐도 석축을 단단히 쌓은 흔적은 찾을 수 없었다. 아마 토성이었던 것 아닐까? 역시 짐작만 할 뿐이다.

낮은 언덕이라 해야 맞을 배풍산 꼭대기에는 팔각정이 있었다. 우거진 나무 때문에 조망이 별로였지만, 사방이 확 트인 이곳이 고을의 방어에 중요한 장소였으리라 여겨졌다.

우리 아배 어매의 아배 어매, 우리 할배 할매의 할배 할매를 대대로 먹여 살려온 너른 들판이 또 눈 두는 곳마다 펼쳐진다. 고대인들에게 이 들녘은 삶의 터전이요, 후손을 기르는 보물 곳간이었다.

그 들녘에서 한줄기 시원한 바람이 불어온다. 날 어루만져 주시던 할배 할매의 손길이요, 아베 어매의 마음이다. 이 순간을 살아가게 해주시는 그 은혜와 사랑을 이 흥덕에서 다시 새긴다.

이곳 배풍산은 흥덕면의 주산으로 배()가 엎드려 사뢰는 복주(伏奏) 형상이어서 산 이름이 되었고 흥산이라고도 부른다 한다. 또한 이곳 흥덕의 지형 역시 배의 형국이라 한다. 따라서 배()가 무거운 짐을 싣게 되면 위험하다고 생각해 신분에 관계없이 지붕에 기와를 얹지 않고 초가지붕을 하는 풍습이 있었다고 한다. 그리고 마을 가운데에 우물을 파면 배() 바닥에 구멍을 내는 것과 같다 하여 식수도 시냇물을 이용하였다고 한다. 참으로 선조들의 깊은 통찰과 넓은 아량이 너른 바다와 같다.

목장지폐(木長之廢), 인장지덕(人長之德)이라 했고, 지용덕장(知勇德將) 중에서도 덕장(德將)이 제일이다. 크게 덕이 일어날 이 흥덕(興德)에서 인간으로서의 귀중한 가르침을 얻는다.

이어 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倡義碑)에 참배하고 국창(國唱) 만정(晩汀) 김소희(金素姬) 생가를 찾았다.

 

호남흥성창의비(湖南興城倡義碑)는 고창 흥덕의 의병(義兵)이 배풍산과 호벌치, 장등원 전투에서 싸운 기록을 적어 기념하기 위해서 세운 비다.

흥덕 버스터미널에서 정읍방향 동사 삼거리 막 지나 오른쪽에 위치한 이 호남흥성창의비와 관련된 유물로는 처음 창의를 했던 흥덕면 용반리 남당마을의 남당회맹단기적비(南塘会盟壇紀績碑)와 모충사(慕忠祠), 그리고 부안군 상서면 감교리 유정의 전라북도 기념물 제30호인 호벌치전적지(胡伐峙戦蹟址)’가 있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을 일으킨 왜적은 1597(선조 30) 2월에 다시 12만 명의 대병으로 정유재란을 일으켰다. 이에 무장과 고창, 선운사가 크게 병화를 입었으며 323일에 흥덕이 짓밟혔다.

그러자 이곳 흥덕 배풍산에서 의병장 채홍국(蔡弘國) 등 남당회맹단의 100여 의사(義士)들이 영암과 해남 의병들과 합세하여 2일간 전투를 벌여 왜적을 물리쳤다. 그 뒤 퇴각했던 왜적과 414일 부안 호벌치에서 다시 격돌하였고, 다음날인 15일에 흥덕 남당 장등원(長灯原)에서 1주일여의 혈전 끝에 모두 순절하였다. 그러나 왜적도 피해가 커 정읍 방면으로 패주하였으니 그들의 거룩한 희생이 민초들의 더 큰 참화를 막은 것이다.

 

고창군 흥덕면 용반리에 있는 임진창의남당회맹단(壬辰倡義南塘會盟壇)은 혈맹단(血盟壇)이라고도 한다. 채홍국(蔡弘國), 고덕붕(高德鵬), 조익령(曺益齡), 김영년(金永年) 등이 격문을 돌려 창의(倡義)하니 92명의 의사(義士)500여 명의 의병이 모였다. 이들은 단()을 쌓은 뒤 백마(白馬)의 피를 마시며 나라를 구하기 위해 목숨을 바칠 것을 천지신명께 혈맹(血盟)하였다.

특히 채홍국(蔡弘國)은 마지막 전투에서 아들 명달, 경달과 함께 순국하였으니, 오늘 우리가 밟고 있는 이 땅은 그 분들의 피로 지켜진 땅인 것이다.

 

정유재란호벌치전적지(丁酉再亂胡伐峙戰蹟地)는 흥덕에서 부안 쪽 방향 길인데, 부안군 보안면 소재지를 지나 조금가면 낮은 오르막길이 나오고 그곳에 순절비(殉節碑)와 기념관이 세워져 있다.

호벌치라는 지명은 당나라 소정방(蘇定方)이 이곳에 상륙하여 유진치(留陳峙)와 주류성(周留城) 일대에 통수부(統帥府)를 설치하였던 데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도적을 끌어들여 동족을 학살한 흔적이다. 그 백제 멸망의 부끄러운 역사를 거룩한 민초들이 덮고 있으니 그나마 다행인 셈이다.

 

흥덕의 마지막 여정은 김소희(1917~1995) 생가 방문이다. 판소리 명창 만정 김소희(晩汀 金素姬), 본명 순옥(順玉)은 고창군 흥덕면 사포리에서 태어났다. 15세에 1회 춘향제전 명창대회에서 장원을 했는데, 최초의 여류명창을 진채선’, 판소리의 여왕을 이화중선김소희는 하늘이 내린 소리라 일컫는다 한다.

창극의 선구자 국창(國唱) 송만갑(宋萬甲 1866~1939)요런 애물은 천에 하나 나오기 힘들제라며 김소희를 애지중지 무료로 가르쳤다고 한다.

만정 김소희는 평소에 소리만 잘 하려고 허지 마. 우선 사람이, 인간이 돼야지 올바른 국악인이여.’라는 말을 입버릇처럼 했다고 한다. 그렇게 예술이나 일상이나 흐트러짐 없는 삶으로 귀감이 됐으며 매사에 처신이 당당하고 맺고 끊음이 분명했다고 한다.

 

아무튼 인성과 도덕이 앞이고 법과 능력은 그걸 훼손하는 걸 막는 장치일 뿐이다. 그런데 현실은 그렇지 않아 민초들을 을로 놓고 고혈을 빠는 갑의 작태는 쥐무리에 그치지 않고 닭무리로 이어지니 이제 실망을 넘어 절망뿐이다. 그렇게 2012년을 보내고 새 해를 맞으며 나그네는 아예 이름을 클라우드. 더불유. (Cloud. W. Kim)으로 개칭하였다. 서양놈이 되고 싶어서가 아니라, 바위섬에 유폐된 유민(遺民)의 아픔, 그 절망과 고독 때문이다.

참으로 고단한 나그네는 흥덕에서 마음의 위로라는 큰 덕을 받는다. 그렇게 이름만으로도 고마운 고을을 나서 부안(扶安)으로 간다.

 

<흥덕 동헌>

<흥덕 향교>

<향교의 은행나무>

<갈공사 당간지주>

<토성 흔적>

<배풍정>

<판소리 명창 김소희 생가>

<생가의 주인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