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9
빛의 의미를 찾아서(5) - 3
오늘 날과 유사한 해군의 창설자이고, 광주 경열로(景烈路 광주역~농성동 광로 1호)의 주인공 정지 장군을 찾아가며 마음이 착잡했다.
요즈음 독도문제로 시끄럽다. MB가 부시의 골프카 운전기사를 한 것이야, 그렇다 치더라도, 고개 꼿꼿하게 세운 일왕에게 고개 숙여 공손히 인사를 하는 것은 정말 자존심 상하는 일이었다.
박정희가 썬그라스를 끼고 케네디를 만난 것은 눈싸움에 자신이 없어서 그랬다는 말이 있다. 중국의 등소평이 존슨을 만나 악수를 나눌 때 배를 향해 주먹을 내질러 존슨이 본능적으로 허리를 90도로 굽혔고, 그 순간을 노린 중국의 사진기자였다. 짜고 친 고스톱, 허리 꼿꼿한 등소평과 허리 굽힌 존슨의 사진이 그것이다. 또 등소평은 가래침 뱉기의 일인자였다. 존슨과 회담 중 곤란할 때면 ‘으커억’ 하고 가래를 모아 탁 뱉는데, 그게 정확히 1m쯤 떨어진 타구에 들어가는 것이다. 그렇게해서 존슨의 논리를 흐트러뜨렸다는 것이다.
어쨌든, 해봐서 잘 아는 MB가 독도문제에 대해 ‘지금은 때가 아니다. 기다려 달라(요미우리 신문의 2008년 7월 보도)’라는 말이 사실이라면, 오늘의 독도는 문제가 아니라, 자초한 결과다.
더욱이 미국도 일본 편을 들어 동해는 일본해가 맞다고 했다. 감정적으로 대응할 일은 아니지만, 이 나라 위정자, 가진 자들의 기조는 죽어도 친미요, 친일이니, 그나마 남은 애국심마저 반납하고 싶다.
정치인, 별을 단 군인까지, 바짓가랑이라도 잡아서 미군을 붙잡아야 한다고 하는 나라에서 무슨 자존과 자긍을 기대할 것인가만, 오늘 찾아뵙는 경렬공, 정지 장군에게 미안하고 죄송한 마음 금할 길 없다.
<한 여름의 햇살이 빛나는 경열사 전경>
일본이 누구인가? 바로 지척에 있는 우리의 이웃이자, 적대국이다. 일설에 멸망한 백제의 후손들이 일본을 다스렸고, 그 때의 한으로 다시 빼앗긴 땅을 찾기 위해 본능적으로 괴롭히는 것이라고도 한다.
고려 중기부터 우리나라의 해안에서 약탈을 일삼던 일본해적 왜구의 피해는 여·원연합군의 두 차례에 걸친 일본원정 실패 후 더욱 심해졌다. 공민왕 때에 이르러서는 동·남·서 연안뿐만이 아니라, 강화도와 예성강 입구까지 출몰 개경의 치안마저 위협받기에 이른다.
뿐만 아니라, 왜구의 피해로 장흥 회진과 강진지역의 주민들을 화순 능주지역으로 집단 이주시킨 바도 있으며, 연안 해안을 이용한 조세 운반마저 약탈을 당하는 실정이어서 국가재정 또한 어려움을 겪게 된다.
이러한 시기에 최영 장군을 비롯하여 이성계 · 최무선 · 정지 · 박위 등이 왜구 토벌에 혁혁한 공을 세운다. 그중에서도 최무선과 정지 장군의 업적은 남다르다 하겠다. 최무선은 화통도감 설치를 건의하여 개발한 화포를 이용하여 진포(군산)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다.
정지 장군은 관음포(경남 남해)싸움에서 왜구를 크게 무찔렀을 뿐만 아니라, 우리나라 본격적인 수군 창설의 공로자이다. 당시 군대의 편재는 육군과 수군의 구분이 없었다. 정지 장군은 백성들의 피해를 줄이기 위해서 왜구가 육지에 상륙하기 전에 섬멸해야 한다고 했다. 그러기 위해서 수전에 능한 군대를 편성하자고 주장했다.
경열공 정지 장군의 본관은 하동, 초명이 준제(准提)로, 1347년(고려 충목왕 3) 나주에서 아버지 정이(鄭履)와 어머니 밀양박씨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아버지 는 공민왕 때에 문과에 급제하여 군기시정(軍器寺正)을 거쳐 광정대부도첨의(匡靖大夫都僉議)에 이르렀다.
정지 장군의 집안이 지금의 나주에 정착한 것은 할아버지 정성(鄭盛)이 충목왕의 훈업대신(勳業大臣)으로 대광보국숭록대부(大匡輔國崇祿大夫)의 벼슬과 함께 금성군(錦城君)의 군봉(君奉)과 토지를 하사 받았기 때문이다.
정지의 나이 17세 무렵이다. 나주남문 밖을 지나던 중 황소가 사람을 들이받아 생명이 위급한 상황을 보고 황소에게 달려들어 두 뿔을 잡아 둘러 메쳤다고 한다. 그리고 그게 인연이 되어 당시 나주목사였던 박춘(朴椿: 후일 좌정승에 오름)이 정지를 사위로 삼았다고 한다.
19세에 사마시에 장원급제 하였고 이듬해인 1366년(공민왕 15) 문과에 급제하였다. 1374년(공민왕 23) 이름을 지(地)로 개명하였고 중랑장(中郞將)이 되어 왕을 측근에서 모시게 되었다. 이때 검교중랑장 이희(李禧)가 ‘배를 저을 줄도 모르는 병사로서 해전을 치르게 하니 늘 질 수밖에 없습니다. 배에 익숙한 사람들로 수군을 편성하여 싸우면 이길 수 있습니다’ 상소를 올렸다.
공민왕은 ‘초야의 미관인 이희 같은 사람도 이런 계책을 올리는데 백관이나 위사 중 이만한 사람이 없는가?’하고 개탄하였다. 이때 위사 유원정이 ‘중랑장 정지가 일찍이 왜구를 평정할 계획을 세웠으나 아직 올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하였다. 마침 함께 있던 정지가 품에서 문서를 꺼내 올리며 말했다.
‘육지의 백성들은 배를 부리는데 능숙하지 못함으로 왜구를 막기 어렵습니다. 섬에서 나서 섬에서 자란 사람들을 골라 신(臣)들로 하여금 거느리게 하면 5년을 기한으로 하여 바다에 임해 있는 여러 도를 깨끗이 정돈할 수 있습니다. 지금 군인들이 헛되이 군량을 소비하고 백성을 괴롭히는 일을 그치게 하소서’
공민왕은 정지를 전라도 안무사, 이희를 양광도 안무사로 임명 수군 창설과 양성에 진력하게 하였다.
<경열사 안내도>
<경열사 영정각>
<장군의 영정>
1377년(우왕 3) 예의판서겸 순천도병마사로 순천·낙안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연파했다.
1378년 영광 · 담양 · 광주 · 화순지역에 침입한 왜구를 격파하고 전라도 순문사로 승진하였다.
1381년(우왕 7) 밀직(密直)으로 해도원수(海道元帥)가 되어 수차에 걸쳐 서남해의 왜구를 소탕했다.
1382년 진포(鎭浦:군산)에 침입한 왜구를 소탕하고, 전선(戰船)을 새로 건조하여 왕으로부터 금대(金帶)를 하사 받았다.
1383년 왜선 120여척이 경상도 연해로 침입해 오자 불과 47척의 전선으로 남해의 관음포에서 통쾌한 대첩을 거두는데, 이것이 바로 관음포해전(또는 박두량해전)이다.
이와 같은 정지 장군의 업적을 기리고자 경상 · 전라도 사람들이 탑을 세웠는데, 이 ‘정지탑’은 현재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에 있다.
이 공으로 정지는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로서 해도도원수(海道都元帥) 겸 양광전라경상강릉도도지휘처치사가(楊廣全羅慶尙江陵道都指揮處置使 육군 총사령관) 되었다.
1384년(우왕 10) 문하평리(門下評理)에 임명되어 보다 근원적인 방왜책으로 왜구의 소굴인 쓰시마(對馬島)와 이키도(壹岐島)의 정벌을 건의하였다.
1388년(우왕 14) 요동정벌이 추진되면서 우군도통사 이성계의 휘하에 안주도도원수로 출전하였다가 이성계의 회군시 함께 회군하였다. 이때 다시 왜구가 창궐하므로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楊廣全羅慶尙道都節制體察使)가 되어 남원 등지에서 왜구를 대파하는 공로를 세웠다.
<남해군 고현리에 있는 정지탑>
<장군의 환삼>
그러나 이러한 공적에도 불구하고 정지 장군의 말년은 새 왕조 창업이라고 하는 역사의 전환점에서 시기와 중상모략으로 인해 극심한 고통을 겪게 된다. 1389년(공양왕 1) 양광전라경상도도절제체찰사겸 총초토영전선성사가 되었으나, 우왕을 복위시키려는 김저(金佇) · 변안열(邊安烈)의 옥사에 연루되어 이듬해인 1390년 경주로 유배되었다가 곧 풀려났다.
같은 해에 또 다시 이성계를 반대한 윤이(尹彛) · 이초(李初) 등의 옥사에 연좌되어 청주옥에 갇혀 심한 고문을 받았다.
그러면서도 ‘사람이 태어나면 한번은 죽는 법이라 죽는 것이 대단한 일은 아니다. 다만 왕씨의 나라를 찾는 데 내가 죄 없이 죽는 것이 비통할 뿐이다’고 주장하였다.
그가 옥에 갇혀있는 동안 대홍수의 천재지변이 일어나 다른 죄수들은 대부분 익사하였는데 정지 장군만 살아남았고 무죄가 밝혀져 사면되었다.
그 후 광주에 물러나 있던 중, 1391년(공양왕 3) 위화도회군의 공으로 2등공신의 녹권과 전50결을 하사 받고, 판개성부사로 부름을 받았으나, 부임하지 않았다. 계속된 옥고로 병을 얻어 45세에 세상을 떠났다.
1402년(조선 태종 2) 경열(景烈)의 시호와 함께 사패지(賜牌地 나라에서 공신에게 왕이 내려준 논밭)를 하사 받았다.
1644년(인조 22) 광주 동명동에 경열사를 세워 경열공의 9세손인 금남군 정충신 장군과 함께 제향되었다.
이 경열사는 1871년(고종 8) 대원군의 서원철폐령에 의해 없어지고 말았는데, 그 터(동명동 74번지)에 호남사림들이 1896년 ‘경열사유허비’를 세웠다.
그후 1974년 경열공의 애국충절을 현양하기 위한 정지장군유적보존회를 결성, 문화공보부 및 전라남도의 지원을 받아 정지 장군의 예장석묘가 있는 광주광역시 북구 청옥동(망월동) 산 176번지에 경열사를 복원 준공(1981년) 하였다.
이곳 유물관에는 정지장군 환삼(環衫: 철제갑옷, 보물 336호, 광주시립민속박물관)과 경열공정지탑(경남 문화재자료 42호, 경남 남해군 고현면 대사리 765-1) 등의 모형이 있다.
또 정지 장군의 9세손이 바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지고 충무(忠武)의 시호를 받은 정충신(鄭忠信) 장군이니, 그 뜨거운 애국, 애민의 피가 대대로 흘렀음을 알 수 있다.
예로부터 뼈대 있는 집안이란 말은, 그냥 핏줄로 이어받는 것이 아니다. 핏줄보다 정신으로 이어받는 것이 맞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오늘 날 부의 대물림에 혈안이 되고, 친일파의 후손이 친일과 친미에 앞장 서는 것을 보면서 정신과 피가 둘이 아님을 또 생각한다.
국가 권력이나, 재벌의 돈이 그냥 하늘에서 떨어지고 땅에서 솟은 게 아니다. 민초들의 피와 땀과 눈물의 결과인 것이다.
그렇다면 광주의 빛은 무엇인가? 세상이 삶의 길을 만들고, 그 길에서 백성을 위해 헌신적인 열정과 사랑을 나누고 베푼 사람들 아닌가? 그래서 감히 생각해본다. 광주의 빛은 길이요, 사람이요, 나눔과 베풂이라고 말이다.
삶의 길에서 애국, 애민을 실천하며 백성을 위해 나눔과 베풂을 실천한 분이 정지 장군이다. 이 정지 장군에 대한 기록이 ‘고려사 열전편’과 ‘고려사절요’ 및 홍양호의 ‘해동명장전’ 등에 있다.
<고려말 왜구 침입과 격퇴 정벌도>
<정지 장군 전신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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