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7
빛의 의미를 찾아서(5) - 1
2011년 8월 4일, 폭염주의보가 내렸다 한다. 그래서인지 가만있어도 목덜미를 타고 땀이 흐른다.
가만있어도 덥다면 가만있을 이유가 없다. 나주에 들려서 약속한 모임에 참석하고 이른 점심을 먹은 뒤, 오늘 계획한 기행을 떠날 생각이다.
오늘은 광주의 옛 사람들을 만나보는 일이다. 그리고 그들에게 빛의 의미를 묻고, 또 듣고자 함이다.
먼저 광주 제봉로(광주역~남광주역 사거리)의 주인공 충렬공(忠烈公)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1533∼1592) 선생의 포충사에 들린다. 제봉 선생은 임진왜란의 의병장이자 학자이고, 문인이다. 선생이 쓴 무등산 기행기 유서석록의 일부는 앞서 소개드린바 있다.
포충사는 광주광역시 남구 원산동에 있다. 제봉 선생은 이곳 남구 압촌동에서 출생, 조선 선조 때 호남의병을 일으켜 왜적을 무찌르는 큰 공적을 남기고, 충남 금산전투에서 순절하신 분이다.
포충사는 고경명 선생과 그의 아들 고종후(高從厚), 고인후(高因厚)와 유팽로(柳彭老), 안영(安瑛) 등 5인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1601년 건립되어 1603년 사액(임금이 사당이나 서원 등에 이름을 지어 그것을 새긴 편액(扁額)을 내리던 일)을 받은 사당이다. 이곳 유물관에서는 제봉 선생의 저서인 제봉문집 목판본 481개(유형문화재 20호)와 교지 문적(유형문화재 21호)을 볼 수 있다.
<배롱나무 꽃이 활짝 피었다>
경내 곳곳에 배롱나무(백일홍)가 활짝 피었다. 8월 염천의 따가운 햇살 아래 푸른 숲과 기묘한 조화를 이룬다. 잘 가꾸어진 경내는 선생에 대한 후손들의 정성이 지극함을 알 수 있지만, 둘러보는 나그네의 심사는 편하지만은 않다.
통일은 도둑처럼 온다고 나불거리더니, 바로 이런 걸 슬쩍 해치우려고 그랬구나. 5공 비리와 광주시민 학살의 주범인 전두환의 하수인이고 감옥살이까지 한 안현태를 국립묘지에 도둑처럼 슬쩍 묻는 이 능욕의 땅 아닌가? 이렇듯 진실과 정의, 나라의 정기가 무너지면 누가 위태로운 시기에 목숨을 바칠 애국, 애향, 애민심을 갖겠는가? 안현태를 옹호하고 비호하는 무리들은 위기가 되면, 말 그대로 먹튀(먹고 튀기)하여 스위스은행, 미국은행에 숨겨놓은 돈으로 희희낙락 살아가겠지만…. 임란 때도 임금과 고관대작들은 왕도와 백성을 헌신짝처럼 버리고 황망히 도망쳐 버렸지 않았던가?
그 때에 제봉 선생은 왜군에게 생명과 재산을 약탈당하는 백성을 보고 분연히 일어섰고 두 아들, 딸까지 나라를 위해 순절했다. 영당에 들려 고개 들어 제봉 선생 보기가 부끄럽고 민망할 따름이다.
<포충사 정문을 들어와서>
임진왜란이 일어난 해가 1592년이니 제봉 60세의 일이다. 4월13일 왜적은 부산을 함락하고 파죽지세로 북상하였다.
이에 방어사 곽영(郭嶸)은 4만의 군사를 모아 근왕군(近王軍)을 편성했다. 그리고 병력을 둘로 나누어 전라감사 이광(李洸)에게 2만을 주고, 자신이 2만을 지휘하여 권율을 중위장(中尉將), 조방장(助防將 오늘날의 소대장급으로 ‘군관’과 ‘조방장’이 있는데 군관은 대규모 부대에 속하여 활동하지만, 조방장은 독립적인 부대를 구성하여 활동했음) 백광언을 선봉장으로 삼아 북상하였다.
2만의 병력을 거느린 전라감사 이광(李洸)은 나주목사 이경복을 중위장, 이지시를 조방장 겸 선봉으로 삼아 북상하였다. 그러나 안타깝게도 북상 중 용인에서 왜적에게 대패하였다.
이 소식을 듣고 마침내 제봉이 나섰다. 제봉은 사림과 함께 담양 추성관에 단을 세우고 하늘에 맹세한 다음 창의의 깃발을 높이 들었다. 이 자리에서 제봉은 의병대장에 추대되었다.
제봉 고경명은 도내에 격문을 띄웠다. 이때 제봉이 말위에서 쓴 마상격문(馬上檄文)은 제갈량의 출사표, 최치원의 황소격문과 함께 널리 애송되어 온 3대 격문의 하나다. 제봉이 유려한 문체로 쓴 무등산 기행기 유서석록의 일부를 소개해드린바 있다. 이번에는 읽는 이의 가슴에 뜨거운 피가 끓는 제봉의 마상격문이다.
<포충사 옛 사당>
<옛 사당 안내문>
전라도 의병장 고경명은 삼가 각도의 군인과 백성들에게 고하노라.
오늘의 나라 운수가 비색하여 섬 오랑캐가 쳐들어 왔다. 우리가 방심한 틈을 타서 왜적이 허점을 찌르고 기고만장하게 굴며 하늘 무서운 줄 모르는구나! 미친 듯 날뛰고 우리나라를 마구 유린하면서 북상하여 마침내 서울에 육박했도다! 우리의 장수들은 우왕좌왕하고, 수령들은 숲속으로 깊숙이 도망치는구나.
저 왜적에게 임금과 내 가족의 목숨을 내주는 것이 어찌 우리가 할 짓이냐? 지극히 존귀하신 임금으로 하여금 사직을 근심하시게 하면 네 마음이 편안하냐? 수백 년 조국의 품에서 살아온 수많은 백성들 중에 의롭고 용기 있는 남아가 어떻게 한 사람도 없단 말이냐? 조선에 대장부 없다는 비웃음을 사게 되니 실로 통탄할 일이요, 너무 불행한 일이 아니냐. 어찌하다 나라 형편이 이 지경에 이르렀느냐. 북상한 어가는 돌아오지 못하고 상주의 군사는 이미 무너졌다. 왜적에게 함락될 운명에 있는 서울 장안의 백성들은 불붙은 초막에서 날개 짓을 하는 제비와 같은 형상이다.
그렇지만 왜적이 일으키는 자욱한 먼지로 임금의 얼굴에 찾아 든 깊은 근심을 덜어드리고 적을 숙청하는 일은 정녕 그대들에게 기대할 일이 아닌가?
경명(敬命)은 백발의 늙은이다. 밤중에 놀란 닭 울음소리를 듣고 견딜 수 없어 마지막 남은 조국애의 한 조각 붉은 마음을 갖고 일어섰노라! 강물에 뜬 뱃전을 두들기며 스스로 죽음의 길을 나서기로 하였다. 이는 오직 견마(犬馬)가 주인을 위하는 정성일 뿐이요, 모기가 태산을 짊어진 격이라 내 힘을 요량하지 않은 것이다.
이에 의병을 규합하여 곧장 서울로 치닫기로 하고서 옷소매를 떨치며 단상에 올라 눈물을 뿌리고 군중과 맹세하였도다. 이제 범을 넘어뜨릴 장사들이 모여 천둥 울리듯 바람 치듯이 수레에 뛰어 오르고 관문을 넘어가는 무리가 구름 모여 비 쏟아지듯 하는구나!
이는 누가 강요해서 응한 것도 아니요, 억지로 따른 것은 더욱 아니다. 오직 충의(忠義)의 마음이 생겨 다 같이 지성에서 울어난 것이다. 나라가 존망(存亡)의 갈림길에 처하였으니 감히 하찮은 몸뚱이를 아끼지 않았을 뿐이다. 당초부터 의병으로 전쟁터에 나서 마음이 바르고 씩씩한 법이니 강약을 따질 것도 없다. 그래서 크나 작으나 상의하지 않고 의견이 같으며 머나 가까우나 소문 듣고 일제히 분발하는 것이다.
아! 우리 열읍 수령, 각처 인사들아! 충성스런 그대들이여 어찌 내 나라 내 겨레를 잊으리오. 의리는 의당 나라 위해 죽는 것이니, 혹은 무기를 구하고, 군량을 모으며, 말에 올라 남 먼저 전장으로 달리고, 분연히 쟁기를 던지고 밭 두렁에서 일어나 제 힘이 미치는 데까지 오직 의(義)로 돌아가라. 능히 임금을 위해 난(亂)을 막는 자 있다면 그와 더불어 함께 행동하기를 원한다.
우리 임금이 묵고 계시는 별궁은 멀리 서도에 있거니와 그 곳에 풍속이 아름다웠으며 병마(兵馬)가 강하여 일찍이 수·당(隋唐)의 백만 대군을 무찔렀다. 조정에서는 장차 계산이 있다. 임금이 어찌 한 구석에 주저 앉아계시겠느냐!
밀리는 듯 하여도 끈질기게 싸우면 망하지 않는 법이며 복과 덕은 심한 근심 끝에 얻어지는 것이다. 보라! 호걸들이 국운을 바로 잡을 터이니 공연히 눈물 지을 까닭 없고, 부로들이 임금을 기다리매 서울로 돌아오시는 날을 기약하리라. 의당 기운을 내서 남 먼저 나서기를 바란다.
전라도 의병장 절충장군 행 부호군 고경명은 삼가 전라도 도순찰사 절하에게 고합니다.
섬 오랑캐가 작란하여 임금께서 북쪽으로 파천을 하셨으니 조야는 오직 호남을 믿고 있습니다. 절하의 심중에는 반드시 이유가 있겠지만 ‘난에 급히 대처하라’는 어명을 받고도 돌연히 근왕의 군사를 해산했으니 절하의 행동은 변명할 여지가 없습니다. 조정의 호령은 비록 단절되어 있지만 한 도내 사람의 말도 역시 두려운 것입니다.
근자에 용인에서 무너진 일도 실은 선봉의 패배로 말미암은 것이니 절하가 주장이 된 이상 그 책임을 모면하기 어려울 것입니다. 절하는 오늘날에 있어 어떻게 할 생각입니까. 진실로 그간의 잘못을 수습하여 임금의 근심을 위로하며, 기왕의 허물일랑 지나간 일로 돌리고, 단호한 결의로 배가(倍加)의 노력을 기울인다면 구국평정의 공적을 쌓을 뿐만 아니라 절하에게도 전화위복의 날이 될 것입니다.
본도 의병이 처음 북로로 향하여 왜적을 깨끗이 소탕하고, 어가를 모실 결심이었는데 길에서 들은 즉 윤상국이 서북의 정병을 거느리고 양경의 적을 토벌하여, 북방의 일은 거의 염려가 없게 되었다 합니다. 그러나 호서의 적이 금산에 들어 왔는데도 방어사의 군사가 아직 용계에 주둔하고 있으며 한 사람도 군중 앞에 맹세하고 앞장 서 나가는 자가 없다고 합니다.
절하가 이 시기에 진실로 군사를 널리 모집하여 크게 형세를 떨치지 못하면 우리 호남지방의 애처로운 백성들이 장차 모두 적의 칼날에 쓰러지고 말 것입니다. 절하가 위로 국가를 회복하지 못하고 아래로 한 지방도 지키지 못하다가 어느 날 아군이 적을 다 무찌르고 임금께서 환궁하시게 되면 호남 사람만 천지간에 얼굴을 들고 다닐 수 없게 될 뿐 아니라 절하 역시 어떻게 과거의 허물을 씻을 수 있으리까?
절하가 혹시 ‘왜적이 너무 악독하여 맞붙어 싸우기 어렵다’는 생각이 든다면 군사를 나누어 험한 곳을 사수하며 그 요충을 막고 때로 기병을 내어 그 예기를 꺾는다면 적의 습성이 본시 경솔하고 조급해서 오래 견디지 못하리니 열흘이 못가서 큰 공을 이룰 수 있을 것입니다. 다 같은 왕의 신하이요, 모두 나라 일이라 피차가 간격 없이 서로 의지하는 처지니 각자의 의견을 자세히 듣고서 계획을 잘하여 후회가 없도록 하기 바랍니다.
이러한 제봉의 간절한 호소는 호남 사람들의 뜨거운 호응을 얻었다. 격문을 보고 감동한 이들이 모여 들어 그 수가 6000명에 이르렀다. 참봉 이굉중, 강항, 강락, 임수춘 등은 의병 500여인과 함께 고경명의 의병소에 합류했다. 이들은 군량을 모아 의곡장 기효증이 있는 법성포를 통하여 의주 행재소에 보냈다. 여기에는 유영해도 동참했다. 유영해는 고흥 유씨로 진사 호의 손자이다. 해주오씨 참판 용로 현손 오윤도 병량을 모아 법성포로 보내고 54인과 함께 영광군성을 지켰다. 직제학 선경의 후손 정국공신 보의 손자 오귀영도 창의하여 군량과 무기를 고경명에게 보냈다. 김해김씨 극일의 후손 세호, 광산김씨 극기의 손자 득종, 광산김씨 교리 윤제의 종손자 독흠 등이 모두 고경명의 의병소로 모여들었다.
<포충사 정기관>
<제봉 장군의 영정을 모신 곳>
(제봉 선생의 영정>
고경명은 군사를 거느리고 여산에 이르렀다. 방어사 곽영과 함께 군사를 좌우익으로 나누어 토성에 있는 적병과 대치하였다. 그러나 적의 기습 공격으로 관군이 무너지자 고경명군도 맥없이 무너졌다. 후퇴하자는 주위의 권유를 뿌리치고 유팽로(29세), 안영(28세)과 함께 장렬한 죽음을 맞이하였다. 고경명의 둘째 아들인 인후는 싸움터에서 죽고 장자인 종후는 목숨을 건져서 부친의 시신을 거두었다. 다시 심기일전하여 복수 의병장(復讐 義兵將)으로 자처하고 의병을 모아 진주성 싸움에서 최후를 마쳤다. 고경명의 딸과 질녀도 왜적을 꾸짖고 칼을 끌어안고 순사하였다. 쉽지 않은 일문삼절(충,효,열)의 가문이 되었다. 비록 싸움에서는 패배하였지만 불의에 굴하지 않는 강건한 정신은 왜적의 침입을 더디게 했고, 격퇴시킬 수 있는 밑바탕이 되었다.
포충사를 돌아나오며 ‘충노비(忠奴婢)’라는 돌비 앞에서 크게 절한다. 바로 제봉 선생의 집안 하인이었던 가노(家奴) ‘봉이’와 ‘가인’의 충절을 새긴 비다. 금산 전투에 의병으로 참전하여 순절한 제봉 선생과 차남 인후의 시신을 거두어 정성껏 장사 지내고, 다시 제봉 선생의 장남 종후를 따라 진주성 싸움에 참전하여 순절하였는데, 국난을 당해 신분을 떠난 나라 사랑과 희생정신을 기리기 위해 자연석에 새긴 비다.
<충노비>
<안내문>
<부끄러운 자는 이곳에 오지마라. 아니 와서 자신을 돌아보라>
그 비 앞에서 과연 이들의 거룩한 희생정신과 헌신, 나라 사랑의 정신이 어디서 기인했는지를 냉철하게 생각해볼 필요가 있음을 생각한다.
오늘 날 잘못(과)은 아랫사람에게 돌리고, 잘함(공)은 자신이 나서서 독식하는 정치권과 관료, 군대의 행태, 부자들의 가슴에 대못 박지 말라며 99개 가진 자가 1개 가진 사람의 것을 빼앗아 100개를 채우는 재벌과 시장경제의 냉혹함, 1등만이 살길이라고 그걸 가르치는 교육과 학교는 ‘봉이’와 ‘가인’의 묘비를 꼭 다녀갈 필요가 있다.
그래서 이 충노비(忠奴婢)는 그 어떤 비보다도 높고, 거룩하며, 귀감이 되는 묘비라 여겨진다. 노비와 같은 미천한 사람, 이름 없이 숨진 의병들의 숭고한 희생과 헌신 없이 어찌 제봉이 있으리오? 고경명 선생의 훌륭함도 이와 같은 충노비에서 시작된다는 생각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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