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8

운당 2011. 8. 30. 15:40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8

 

빛의 의미를 찾아서(5) - 2

 

제봉 선생과 헤어져 이번엔 광주의 무등산 쪽으로 좀 더 다가간다. 광주의 서쪽 서창의 세동마을로 삽봉 김세근(金世斤) 장군의 학산사를 찾아 간다.

 

<임란 의병장 김세근 장군의 사당 학산사 전경>

장군이 생전에 살았던 세동마을은 광주의 서쪽 들녘이다. 백말이 새끼와 함께 풀을 먹는 형상이라는 동쪽의 백마산(134m)을 배산(背山)으로, 바라보는 서쪽에 넓은 들을 펼치는 극락강을 임수(臨水)로 한 배산임수형의 집촌마을이다.

지금도 우리의 전통 농경문화인 서창 만드리 풍년제7월 백중(음력 715)에 치르고 있는 곳이다. ‘만드리란 논의 마지막 김매기, 즉 맨 나중에 논에 자란 잡초를 없애는 일로 만물’, ‘만도리에서 유래된 말이다. 이날은 농사를 잘 지은 농주(農主)가 머슴과 일꾼들에게 푸짐한 아침상과 함께 휴가와 용돈을 주고, 농부들은 농사의 고단함을 달래주는 노농요(勞農謠)를 부르며 즐긴다.

백마산은 나지막한 야산이지만 그 모습이 수려하고 골짝이 깊어 임진왜란의 공신 삽봉에 얽힌 전설이 남아있다.

 

<학산사 안내판>

삽봉의 조상은 경남 함안군 마륜동에 살았다. 방조(傍祖 : 6대조 이상의 직계가 아닌 조상) 김일손(金馹孫)이 조선조 연산군의 무오사화(戊午士禍) 때 조의제문사초(弔意帝文事秒)사건에 연루되어 참살(慘殺)당하자, 가세가 기울었다.

삽봉의 어린 시절이다. 참살당한 김일손의 후손인 아버지 김석경(金碩慶)이 식솔들을 거느리고 고향을 떠나 이곳 서창으로 옮겨 정착을 했다.

그 뒤 삽봉은 문과에 급제(28)하여 종부시 주부(宗簿寺 主簿. 35) : 왕실의 계보를 찬록(撰錄)하고 왕족의 허물을 살피던 관아. 전중시를 고친 것으로, 종부시의 종6(從六品)벼슬) 벼슬을 하던 중 율곡 이이와 함께 양병설을 주장 했다. 그러나 태평시대에 양병은 부질없는 민심을 소란케 하는 사론(邪論)이라는 간신배들의 반대에 의해 묵살(黙殺)되고 말았다.

이에 실망 세동으로 낙향한 삽봉은 후일을 위해 장정들을 모아 마을 뒤 백마산에 연병장(練兵場)을 설치 4년여 동안 무술연마에 힘썼는데, 예견한대로 임진왜란이 일자, 분연히 일어났다.

삽봉은 장정 3백 명을 이끌고 의병장(義兵將)으로 출전하였다. 영동과 황간의 적을 격파하고 금산의 중간지점에서 여러 날 진을 치고 왜의 대군과 맞서 격렬히 싸웠다. 허나 중과부적으로 와평들에서 임진년(1592) 71042세의 아까운 나이로 고경명 장군과 함께 장렬히 순절하였다.

그 후 김세근 장군이 금산싸움에서 전사했다는 소식을 들은 부인 한씨는 시신없이 초혼장을 치르고 부사어충 처사어열 인지본(夫死於忠 妻死於烈 人之本지아비는 충()에 죽고 지어미는 열()에 죽으니 이는 곧 사람의 당연한 도리라.)’이라는 유서를 남기고 자결했다. 자결에 쓴 칼은 삽봉이 전장에 나가면서 부인에게 주고 간 것이라 하니, 지금 세상에서는 가당키나 한 일인가? 세월을 떠나 마음이 끊어지듯 저린다.

 

그 삽봉 김세근 장군이 살던 세동 마을은 조용하다. 뙤약볕에 강아지 한 마리도 볼 수가 없다.

마을로 들어서자, 백마산이 눈부신 햇살아래 세상을 덮칠 듯 푸르다. 저 속에 삽봉이 장정을 훈련시킨 수련골이 있고, 숙소와 휴식처로 차일을 쳤다는 차일봉’, 그 당시 사용했던 옥동샘’, 봉우리의 깊이 3미터 가량의 바위굴(삽봉이 기거(起居)하며 심신(心身)을 단련한 장수굴’), 세동마을에서 절골로 넘어가는 고개 수련재가 지금도 그날을 기억하리라.

그리고 삽봉의 뛰어난 용력(勇力)을 찬양하는 전설이 남아 있다. 백마산자락 동하마을 김성철(김장군의 후손. 세하동132-1, 동하길 47)씨의 집 담에 큰 바위 한 개가 끼워져 있다.

어느 날 백마산중의 김장사(김세근 장군)와 무등산에 사는 김장사(김덕령 장군)힘겨루기를 했다. 백마산 김장사는 무등산을 향해 바위를 던지고, 무등산 김장사는 백마산을 향해 바위를 던졌다. 그런데 백마산 김장사의 바위는 무등산에 떨어졌는데, 무등산 김장사의 바위는 목표지점(백마산) 좀 못 미쳐 이 마을에 떨어졌다 한다. 그 바위가 바로 김성철씨 집 담에 박힌 큰바위라 한다.

어쨌거나, 두 장사가 있어, 임진왜란 당시 이곳 백성들이 큰 화를 면했으니, 바위전설이 조금 과장됐다 한들 탓할 일이 아니다.

내가 대통령이 되면 어쩌고 저쩌고 잘 살게 해준다고 했다가, 선거 때 무슨 말인들 못하느냐고, 낯가죽 두껍게 둘러대는 사기꾼에 비할 일은 더더욱 아니다.

 

<세동 마을 민가 담에 박혀있는 김세근 장군이 던진 바위>

삽봉을 모신 학산사는 서창동 불암마을 팔학산 기슭에 있는데, 광주 유림들이 그의 거룩한 넋을 추모하는 사우건립을 발의 1958년 건립되어 매년 춘향(322)을 행하고 있다.

삽봉의 사당은 문이 굳게 닫혀져 있고, 개 두 마리가 사납게 짖으며 나그네를 경계한다.

빛고을 광주 충장로의 주인인 김덕령 장군의 충장사, 정지 장군의 경렬사, 고경명 장군의 정렬사, 전상의 장군의 충민사 등은 행정당국의 관리로 언제나 둘러볼 수 있다. 하지만 광주의 큰 길인 금남로의 주인 금남군 정충신 장군의 사당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地谷面) 대요리에 있고, 김세근 장군의 학산사와 고려 말의 충신 정몽주를 비롯하여 지용기 · 정충신 · 지계최 · 지여해 등 다섯 분을 모시는 병천사는 문이 굳게 닫혀있다.

문이 열려있으면 삽봉 장군의 부인 한씨의 한이 맺힌 요도()를 보고 싶었으나, 아쉬운 발길을 돌려야 했다.

<학산사 묘정비>

<굳게 닫혀있는 영정을 모신 곳>

 <학산사>


<학산사 나오는 길에 있는 항일의병대장 김의곤 묘>

<주검 없이 안치된 김세근 장군 묘>

<김세근 장군 묘>

<세동 마을의 김세근 장군 훈적비>

나오는 길에 삽봉의 주검도 없이 묻은 묘소에 들린다. 전장 터에서 주검도 거두지 못해 그의 신체는 비록 여기 없지만, 희생과 헌신적인 삶을 산 삽봉의 거룩한 뜻은 언제나 우리 곁 가까이에 있을 것이다. 두 손 모아 공손히 예를 갖추고 발길을 돌려 다음 행선지인 병천사로 향한다.

 

병천사는 광주 금남로(구 전남 도청~양동 발산교)의 주인공 정충신 장군이 네분의 선열들과 함께 배향된 사당이다.

앞서도 얘기했지만, 충무공 정충신 장군의 사당은 충청남도 서산시 지곡면(地谷面) 대요리에 있다. 이는 장군의 유언에 따른 것이라고 한다. 금남군의 고향인 이곳 광주에는 개인적인 사당은 없고, 병천사에 다른 분들과 함께 모셔져 있을 뿐이다.

 

한낮의 뙤약볕이 떨어지는 병천사에 들린다. 바로 곁이 아파트 숲이다. 호박넝쿨을 걸친 생울타리 사이로 들어서니 포장은 안됐지만 널찍한 마당이 있다.

굳게 닫힌 문, 주욱 늘어선 비석, 이곳이 병천사임을 알리는 안내판이 나그네를 맞는다.

광주의 충장로와 금남로는 광주의 상징이자, 광주 사람들이 사랑하는 길이다. 그 길, 금남로의 이름을 준 당사자가 금남군 정충신 장군임을 아는 사람이 몇일까? 알고 모르고를 떠나, 장군의 후예인 우리들의 처사가 얄궂고 야박하다. 하긴 돈을 최고의 가치로 여기는 세태에서, 돈도 안 되고 떡도 안 되는 일에 누가 관심이나 가질까? 천문학적인 국민의 혈세를 제 돈 쓰듯 쏟아 붇는 사대강(死大江) 공사, 그것도 모자라 그 제방 둑에 시멘트 처발라 만드는 자전거 도로보다도, 조상의 거룩한 정신을 이어받는 일에 우리 세금이 쓰였으면 한다.

 

정충신(鄭忠信 1576년 선조91636년 인조14) 장군은 경열공 정지 장군(1347~1391)9대손이다. 금천군(錦川君) ()의 아들로 광주에서 태어났다.

본관은 광주(光州), 자는 가행(可行), 호는 만운(晩雲), 시호는 충무(忠武).

정지 장군의 후손이긴 하나, 가문이 기울어버린 미천한 집에서 태어났다. 체구가 작았으나 힘이 세고 기개가 있었던 그는 임란이 일기 전 절도영(節度營)에 속한 정병(正兵), ()에 예속된 지인(知印: 通引)을 겸하였다. 한 마디로 머슴과 같은 미천한 직책, 지금 말로 별 볼일 없는 신세였다.

 

1592(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광주목사(光州牧使) 권율(權慄)의 휘하에서 종군하였다.

이때 권율이 장계를 행재소에 전달할 사람을 모집하였으나 응하는 사람이 없었다.

제가 가겠습니다.”

그 때 17세의 정충신이 앞으로 나섰다. 그리고 왜군으로 가득한 2천리 길을 단신으로 뚫고 의주 행재소에 도착하였다.

권력, 금력을 가진 자가 군대를 눈이 나쁘네, 폐가 안 좋네, 하고 요 핑계, 저 핑계 안 가는 세상이다. 그런데 왜병에게 잡혀 언제 죽을지 모르는 길을 자청해서 가겠다고 한 정충신의 충정을 현재의 MB 정권 아첨꾼들이 알기나 할까? 알면 손가락에 장을 지져야겠지만.

어쨌든 이 일이 정충신의 앞날을 바꾸는 계기가 되었다. 정충신의 범상치 않은 인물임을 알아본 병조판서 이항복(李恒福)이 몸소 사서(史書)’를 가르치며 학문과 무예를 연마 시켰다. 하나를 가르치면 둘을 아는 총명한 정충신을 아들같이 사랑하였다. 훗날 정충신은 이항복이 유배를 가자 함께 따라갈 정도로 아버지처럼 잘 모셨고, 이항복이 죽은 뒤에도 정충신은 3년 동안 상주처럼 생활했다.

 

1592년 가을 정충신은 의주 행재소에서 실시하는 무과에 응시하여 급제하였고, 권율(權慄:1537~1599)이 행주대첩에 공헌하였다.

1617(광해군 10)에는 오윤겸(吳允謙:1559~1636)을 따라 일본에 다녀왔다.

1618년 대북파의 음모로 인목대비가 서궁에 감금되자 주모자를 소탕하였으나 허균의 부재로 뜻을 이루지 못하였다. 이후 관직을 버리고 북청으로 유배되는 이항복을 따라 그를 받들었다. 이때 수행하며 쓴 일기가 백사북천일록이다. 이렇듯 정충신은 치밀한 전략가로서 청의 정세에 밝았기 때문에 늘 군비 확장에 주력하였다.

1621(광해군 13) 만포첨사로 국경을 수비하였으며, 이때 명을 받고 여진족 진에 들어가 여러 추장을 만나기도 하였다.

1623(인조 1) 안주목사로 방어사를 겸임하고, 다음해 이괄(李适)의 난 때 도원수 장만(張晩)의 휘하에서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이괄의 군사를 황주와 서울 안산(鞍山)에서 무찔러서 진무공신(振武功臣) 1등으로 금남군(錦南君)에 봉하여졌다.

1627년 정묘호란 때에는 부원수를 지냈다.

16305월 평안북도 철산 지방에서 일어난 유흥치의 난을 평정하였다. 이때 인조가 갑옷, 활과 화살, 검을 하사하였고, 사당에 보존되어있다.

1633년 조정에서 후금(後金: )에 대한 세폐의 증가에 반대하여 후금과의 단교를 위하여 사신을 보내게 되자 김시양(金時讓)과 함께 이를 반대하여 당진에 유배되었다가 다시 장연으로 이배되었고, 곧 풀려나와 이듬해 포도대장 · 경상도병마절도사를 지냈다.

1636년 병이 심하여지자 왕이 의관에게 명하여 치료에 진력하였으나 효험을 보지 못하고, 54일 한양 반송방 자택에서 61세로 별세하였다.

죽은 뒤에 왕이 내시로 하여금 호상하게 하고 어복(御服)을 주어 수의(壽衣)로 쓰게 하였다.

 

키가 작으면서도 씩씩하였고, 천문 · 지리 · 복서 · 의술 등 다방면에 걸쳐 정통하였으며, 청렴한 덕장이라 칭송 받았다. 그에 얽힌 많은 설화(무등산이 갈라지며 청룡과 백호가 뛰어나와 안겼다는 태몽, 이항복과의 인연, 임진왜란 때의 활약과 여진족을 다루는 영웅담 등)가 한문야담집에 전한다.

저서로 만운집(晩雲集)’, ‘금남집(錦南集)’, ‘백사북천일록(白沙北遷日錄)’ 등이 있다.

 

정충신 장군은 광주가 고향이고, 금남로의 주인공이다. 언제든 금남로에 나가면 뵐 수 있지만, 정작 이분의 사당과 묘는 충남 서산시 지곡면 대요리에 있으니, 쉽게 찾아볼 수 없음이 아쉽기만 하다. 멀리서나마 장군에게 예를 갖춰 고개를 숙인다.

이제 장군의 사당과 묘가 충남 서산에 건립된 이유를 알아보고 글을 맺을까 한다.

 

조선 인조 2(1624)에 일어난 이괄의 난 때 장군은 전부대장(前部大將)으로 토벌군을 이끌고 서울 길마재에서 반군을 전멸 시켜 난을 평정했다. 그 공으로 진무일등공신(振武一等功臣) 금남군(錦南君)이 되어 서산시 지곡면의 국사봉을 중심으로 약 45만여평의 땅을 사패지지(賜牌之地)로 하사 받았다.

장군은 생존 시 유택(幽宅)을 친히 잡아 놓고 아들 빙과 지상에게 내가 죽은 뒤에 반드시 이 자리에 장사지내 주도록 당부했다 한다.

내가 죽거든 작은 공은 이미 역사에 기록된 바이니, 죽은 뒤에 문자로 공적을 미화 찬양하거나 시호를 청하거나 비와 석물을 세우지 말고 다만 그릇만 묻어 달라는 말을 남겼다 한다.

한 때 잘 나가는 정치인, 졸부들이 친일파였던 조상의 무덤 앞에 커다란 석물을 세워 망신을 당한 일이 인구에 회자되기도 했다. 그렇게 낯가죽 두껍게 무덤 앞에 커다란 돌비를 세워놓고, 집안 자랑 돈 자랑 하는 사람들이 새겨들을 얘기다.

 

<병천사>

장군을 기리는 금남군정충신영정각(錦南君鄭忠信影幀閣)이 전북 장수군 장계면 금곡리 413-4에 있다 하니, 지나는 길에 들릴 생각이다.

장군의 얼굴도 뵙지 못하고 병천사를 물러 나와 정지(鄭地) 장군의 사당 경렬사로 향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