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0
빛의 의미를 찾아서(5) - 4
경렬사를 나와 둥실한 무등산을 바라보며 그 품으로 들어간다. 좌우로 낮은 산이 함께 가며 마을과 논밭을 군데군데 만들어 놓고 있다. 길 옆 시냇물이 재잘거리고, 뜨거운 햇볕과 소나기에 여러 알곡들이 튼실하게 자라고 있다.
제 4수원지를 지난다. 518 민중항쟁과 관련 의문사한 이철규 열사가 발견된 곳이다. 그곳 삼거리 청풍쉼터는 김삿갓과 함께 쉴 수 있는 곳이다.
오늘은 삿갓 선생을 그냥 지나쳐 충민사를 찾는다.
충민사는 정묘호란(1627년 인조 5년) 때 안주에서 후금(後金)의 3만 대군을 막다가 장렬히 순절한 전상의(全尙毅 1575-1627) 장군의 사당이다. 그리고 광주의 구성로(龜城路 광고앞~월산로터리)는 그 전상의 장군의 아호를 딴 길이다.
<전상의 장군의을 모신 충민사 전경>
전상의 장군은 1575년(선조 8년) 2월 17일, 지금의 광주군 도천면(지금의 광주시 구동)에서 아버지 용(蓉)과 어머니 평산 신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장군의 집안은 명문이었다. 5대조인 구생(俱生)은 광주목사를, 7대조인 영좌(永佐)는 전라감사를 그리고 8대조인 익(翊)은 대제학을 역임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아버지 용(蓉)과 증조할아버지 완(琬)은 관직에 나아가지 못하였으며, 할아버지 개(漑)만이 기자전 참봉을 역임했을 뿐이다.
전상의는 어려서부터 총명하고 용력이 뛰어나서 글 읽기와 무예를 함께 익혔는데 활솜씨가 특히 뛰어났다.
29세 때(1603 선조 36년) 무과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첫 벼슬로 훈련원 주부를 거쳐 변방의 만호, 첨사 등 수군의 장수로 관직의 길을 걷는다.
43세 때(1617 광해군 9년) 일본에 건너가 막부의 우두머리 덕천수층과 담판하여 포로 150명을 생환케 하는데 공헌했다.
44세 때(1618 광해군 10년) 내금위 어모장군(內禁衛 禦侮將軍)에 임명되면서 광해군의 최측근이 된다. 어모장군(정3품)은 임금의 호위와 대궐의 경비를 맡는 내금위의 최고 책임자로 오늘날 청와대 경호실장에 해당하는 직책이다.
49세 때(1623 광해군 15) 인조반정 후 평안도의 개천군수(종 4품)로 좌천된다. 서인 편에 서지 않은 것에 대한 정치 보복이었다.
50세 때(1624 인조 2) 이괄의 난을 평정하는데 큰 공을 세웠다.
53세 때(1627 인조5년) 1월에 정묘호란이 일어났다. 인조반정으로 서인이 집권하면서 친명배금 정책을 실시하자, 조선과 후금 사이가 멀어졌다. 명나라를 치기 위해 기회를 엿보던 후금은 배후를 위협하는 조선을 먼저 정벌 후환을 없앨 생각을 했다. 더욱이 반란을 일으켰다 후금으로 달아난 이괄(李适) 등이, 광해군이 부당하게 폐위되었음을 주장하며 힘이 약한 조선을 침략할 것을 종용했다.
<정려각의 충신 정려판>
드디어 인조 5년(1627) l월 13일, 아민(阿敏)이 이끄는 3만의 후금군이 압록강을 건너 의주를 기습 공략한 후 곽산의 능한산성을 무너뜨리고 청천강을 넘어 안주성에 온 것은 20일이었다. 평안병사 남이흥과 안주목사 김준, 구성도호부사 전상의에게 안주성 수성의 임무가 내려졌지만, 이틀을 채 버티지 못했다.
이튿날(21일) 적들이 대오를 정비하여 안주성을 향해 진격해오자 남이흥은 병졸을 시켜 화약고에 불을 지르게 하고 김준 부자와 함께 불 속에 뛰어든다. 홀로 남은 장군은 끝까지 백상루를 지켰지만, 적의 화살을 맞았다. 그러자 임금이 계시는 한양을 향해 4배를 올린 후 장렬한 최후를 맞는다. 인조5년(1627) 1월 21일, 장군의 나이 53세였다.
그 해에 인조는 장군을 ‘자헌대부병조판서겸지의금부사(資憲大夫兵曹判書兼知義禁府事)’에 증직하고, 사패지 30리를 하사하였으며, 무등산 자락 평두산에 예장하여 그 충절을 기렸다.
숙종 8년(1682)에 안주 충민사에 배향되었고, 숙종 10년(1684) 충신정려가 내려졌다.
헌종 15년(1849) 광주 경렬사에 배향되었다가, 1985년 10월 21일 충민사를 준공하여 모시게 되었다. 이곳 유물관에는 활과 칼 등 장군의 유물이 있고 정려각에는 충신정려를 명한 현판이 있다.
<장군이 입은 갑옷과 투구 등의 유물>
<장군의 유품>
<장군의 유품>
‘광주읍지’의 ‘충신전’에 이 고장 충신 총 14분의 충절이 기록되어 있다. 그 중 임진왜란 당시 의병을 일으켰던 고경명과 김덕령, 그리고 정묘호란 때 안주성에서 순절한 전상의 장군만이 나라로부터 정려(旌閭 충신, 효자, 열녀 등을 그 동네에 정문(旌門)을 세워 표창함)를 받았다. 그렇게 충신의 정려를 받은 이 세분을 광주의 3충신이라고 한다.
<장군의 어린 시절>
<병조판서와 어모장군 교지>
<전투도>
<정묘호란 안주성 전투, 장군은 이 전투에서 순절하였다>
하지만 이 충민사는 일부 광주시민들의 오해와 불신을 받은 곳이기도 하다.
1985년 무등산 자락(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에 장군을 기리는 사당인 충민사가 건립된다. 그러나 당시는 광주항쟁을 무자비한 탄압으로 진압한 전두환 정권 시절이다. 그러니 전두환과 같은 성씨인 전상의를 기리는 사당이 고운 눈으로 보일리 만무하다. 특히 눈치코치 없이 세운 전두환의 동생 전경환의 공적비 건립은 광주 시민들의 분노를 일으켰다. 마침내 공적비가 박살나는 상황에 이른다.
전경환의 공적비가 박살난 사연은 이렇다. 전두환 정권 시절 서울 인사동에서 전상의 장군의 유품이 나오자, 담당자는 그 유품을 당시 실세였던 전경환에게 보냈다. 그러나 유품을 확인해 본 결과 전상의는 천안(天安) 전씨였다. 완산(完山) 전씨인 전경환은 그 유품을 서울 민속박물관에 기증하였다.
그러다 광주에 전상의를 기리는 충민사가 세워지자, 기증자 전경환의 이름으로 유품의 일부가 충민사 유물관에 보내졌다. 그런 연유로 전경환의 공적비가 충민사에 세워지고, 파괴되는 일이 일어났다.
전상의 장군을 기리는 충민사는 전두환 정권과 관계없이 계획되고 건립되었지만, 시점이 문제였다. 그리고 일부 아부파들의 전경환 공적비 건립이 오해를 일으킨 것이다.
그러나 이런 사실을 아직도 자세히 아는 사람은 드물다. 그래서 지금도 무등산 산장 가는 길에 지나치는 전상의 장군의 사당은 많은 사람들의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다.
“저 것이 전두환이 집안이어서 좋게 세워놨다제.”
“근께, 전 머시기 장군이라 했는디.”
이런 대화가 오갈 정도이니, 성씨라는 게 아직도 한국 사회의식의 중심에 있다는 증거다. 그래서 후손을 위해서도 나쁜 짓을 해서는 안 되는 것이다. 횡령, 탈세, 위장전입은 기본이요, 병역기피는 반찬이고, 밥 먹듯이 부의 대물림과 돈벌이에만 혈안이 되어 노동자를 죽음으로 내모는 재벌기업들이 되새겨 봐야 할 현실이다.
<충민사 영정각>
<전상의 장군 영정>
전상의 장군에게는 참으로 미안하고 죄송한 일이다. 장군의 영령에 안식 있음을 기원하며 충민사를 나와 다음 기행지인 충장사를 향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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