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1
빛의 의미를 찾아서(5) - 5
김덕령 장군에 대한 민간설화가 많다. 그것은 장군이 민초들의 큰 사랑을 받았음을 알 수 있는 명확한 근거다. 장군이 백성을 사랑하지 않았음, 그들이 장군을 어찌 사랑하겠는가? 장군의 나눔과 베풂의 은혜에 백성들이 자발적으로 보답한 것이 바로 민간 설화다.
<김덕령 장군을 모신 충장사 전경, 익호문>
충장공 의병장 김덕령(忠壯公 金德齡 ; 1567∼1596)은 광주시 무등산 석저촌에서 출생하여 20세에 형 김덕홍(金德弘)과 함께 대학자인 성혼(成渾)에게서 수학했다.
1592년 25세 때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형과 함께 의병을 일으켜 고경명(高敬命)의 막하에 들어갔다. 전주에 이르렀을 때 돌아가서 어머니를 봉양하라는 형의 권고에 따라 귀향하였다. 그리고 형은 고경명의 참모로 금산 전투에서 순국한다.
1593년 8월 어머니의 상을 당하였다. 그중에도 담양부사 이경린, 장성현감 이귀 등의 권유로 담양에서 의병을 일으켜 세력을 크게 떨치자, 선조로부터 형조좌랑의 직함과 함께 충용장(忠勇將)의 군호를 받았다.
1594년 세자의 분조(分朝)로 세워진 무군사(撫軍司)에서 광해군으로부터 익호장군(翼虎將軍)이라는 칭호와 함께 군기를 수여받았다. 이어서 선조로부터 다시 초승장군(超乘將軍)의 군호를 받았다. 의병장 곽재우와는 막역한 사이로, 작전을 함께하기도 했으며 큰 공을 세웠다.
1596년 도제찰사 윤근수의 종이 탈영하여, 그 행방을 캐기 위해 종의 아비를 잡아들였다. 윤근수가 눈감아 줄 것을 청탁하였으나 김덕령은 거절하였고, 결국 매를 때려 숨지게 하였다. 이로 말미암아 윤근수에게 체포되었으나 왕명으로 풀려났다.
1596년 임진왜란 후 충청도 홍산(鴻山)을 중심으로 이몽학(李夢鶴)의 반란이 일어났다. 이에 김덕령은 의병을 모집하여 진압하기 위해 충청도로 향하였으나, 이미 반란은 진압된 뒤였다. 그런데 반군을 문초하던 중 최, 홍, 김이 적힌 패가 나왔다. 극심한 고문을 견디지 못한 졸개가 최홍김은 최담령, 홍계남, 김덕령 등이라고 무고했다. 이에 무과에 급제한 정식 장수이면서도 후방에 배치되거나 김덕령의 막하에서 종군했던 것을 불만으로 여기던 신경행이 이에 동조하여 김덕령은 체포되었다. 또 이몽학이 처음에 군사를 일으킬 때 ‘김덕령은 나와 약속하였고 도원수와 병사, 수사도 모두 함께 계획하였으므로 반드시 우리에게 호응할 것이다.’라고 거짓으로 선전했고 사람들이 모두 그 말을 믿었던 것이다.
난이 평정되어 선조가 친국으로 이들의 죄를 물었다.
‘선조수정실록’에 따르면, 이 때 류성룡은 김덕령의 치죄를 신중히 따져가며 하도록 간했으나 윤근수의 형제였던 서인 판중추부사 윤두수는 엄벌을 주장했다. 20일 동안에 여섯 차례의 혹독한 고문으로 마침내 정강이뼈가 모두 부러진 김덕령은 결국 장독을 견디지 못해 죽고 말았다.
덕령은 죄가 없음을 호소하였으나 받아들여지지 않았고, 죽음을 직감한 김덕령은 ‘춘산에 불이 나니’라는 시조로 자신의 마음을 표현한다. 그의 나이 29세 때다.
춘산에 불이나니 못다 핀 꽃 다 붙는다.
저 뫼 저 불은 끌 물이나 있거니와
이 몸에 연기 없는 불은 끌 물 없어 하노라.
20대의 젊은 몸에 임진왜란의 난국을 맞아 의병을 일으킨 그의 애국충정과 높은 인간미가 오늘 우리들의 심금을 울린다.
여기서 ‘춘산(春山)의 불’은 임진왜란이다. 불타서 죽은 ‘못다 핀 꽃’은 ‘적과 용감히 싸우다 전사한 청년’들의 청춘이다.
백성을 위해 고군분투하던 중 영어(囹圄)의 몸으로 혹독한 고문을 받으면서 느끼는 심정을 어찌 한 수의 시조로서 승화 시킬 수 있을까? 김덕령과 같은 인물을 죽이는 무모함은 지금도 우리 역사의 진행형이며 악순환이라 아니 할 수 없다.
죽음을 눈앞에 두고도 끓어오르는 분노를 지그시 누르며 늠름했던 덕령의 힘과 기개, 담담함이 그대로 느껴지는 시다.
<장군의 영정을 모신 영정각 충장사>
<김덕령 장군의 영정>
다행히 덕령의 부하이며 최영 장군의 후손인 별장 최담령(崔聃齡)과 최강(崔堈)은 사면되었다. 그들은 덕령이 모집한 병사와 함께 양남(兩南)의 방어사에 나누어 배속되었다. 최담령은 덕령과 함께 용맹의 명성을 나란히 하였는데 이 뒤로부터는 어리석은 겁보인 체하여 스스로 폐인 노릇을 하였다 한다. 간신배들이 득세하는 세상을 한탄하며 남은 세월을 보냈을 그분의 한이 눈에 선하다.
1661년(현종 2)에 덕령의 억울함이 밝혀져 관작이 복구되고, 1668년 병조참의에 추증되었다. 1681년(숙종 7년)에 다시 병조판서로 추증되고, 1788년(정조 12년) 의정부좌참찬에 추증되고 부조특명(不逝特命)이 내려졌다. 1678년(숙종 4) 광주의 벽진서원에 제향되었는데 이듬해 의열사(義烈祠)로 사액되었다. 시호는 충장(忠壯)이다.
<장군의 관>
<유적지 소개>
<장군의 수의, 진품을 본따 만든 것이다>
덕령은 그렇게 신원되고 난 뒤에도 역적죄가 있던 터라, 문중의 무덤이 모여 있는 곳에서 멀리 떨어져 묻혀 있었다. 그러다 장군 사후 379년인 1965년 광산 김씨의 무덤이 모여 있는 광주 무등산 이치(梨峙)로 묘를 옮겼다.
밤중에 묘를 이장하던 중 김덕령의 관을 여니 생시와 다름없이 살이 썩지 않고 있었다. 이를 본 사람들은 김덕령 장군의 한이 서린 것이라 하여, 광주에서 사진기를 가져와 모습을 남기려 하였으나, 사진기를 가져왔을 때는 이미 시신이 검게 변해 있었다고 한다. 하지만 김덕령이 입고 있던 옷이나 철릭 등은 현재 광주 무등산의 충장사(광주광역시 북구 석곡동)에서 보관하고 있다.
충장사에 들려 그렇게 김덕령 장군을 뵙고, 이어 생가가 있는 충효동으로 향한다. 수령 4백여 년의 왕버들나무 세 그루가 마을 앞에 수문장처럼 서 있고 그 아래쪽은 광주호의 생태공원이다.
생가 마당에 서서 무등을 바라본다. 금세 무등이 날개를 펴고 날아와 가슴에 안길 것만 같다. 그 높은 산이 앞산 봉우리이니, 장군의 기개가 여기 이 마당에서 싹텄음을 알 수 있다. 날개를 달고 나는 호랑이, 익호장군이라 불리우는 의미를 알겠다.
한동안 장군과 더불어 마당을 서성이다, 가까이에 있는 취가정(醉歌停)으로 간다.
취가정은 임진왜란의 의병장 충장공 김덕령장군을 추모하기 위해 1889년에 난실 김만식을 비롯한 후손들이 세웠다. 취가정이란 이름은 선조 때의 시인 석주(石州) 권필(1569~1612)이 충장공 김덕령을 꿈속에서 만나 서로 시가를 교환한 것에서 비롯된다. 김덕령이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원통함을 호소하는 한 편의 시가를 읊었고, 석주가 이에 화답하는 한 수의 시를 지어 그의 원혼을 위로했던 것이다.
술에 취해 부른 노래 어느 누가 들을 손가/ 꽃과 달을 즐겨함도 나의 소원 아니었네/ 높은 공을 수립함도 나의 바람 아니로다/ 공을 세운 그 업적도 구름처럼 사라지고/ 꽃과 달을 즐겨함도 쓸모없는 허사로다/ 술에 취해 부른 가곡 어느 누가 알아줄고/긴 칼 들고 일어서서 임금 은혜 갚으오리(김덕령)
칼을 잡고 일어섰던 지난 옛날 장한 뜻이/ 중도에서 꺾였으나 운명인 걸 어떠하리/ 한이 서린 그 영혼이 지하에서 통곡하며/ 마음속의 그 울분을 술에 취해 읊었도다(권필)
뜻있는 이들이 꿈에서나마 만나 서로를 위로하는 감격적인 모습이고 시다. 이러한 뜻을 기리기 위해 1890년에 후손들이 정자를 지었고 또 술에 취한 모습으로 나타나 읊은 ‘취시가(醉時歌)’에서 그 뜻을 취하여 정자 이름을 ‘취가정(醉歌亭)’이라 한 것이다.
김덕령 장군이 생존해 있을 무렵 심어졌을 왕버들나무 그늘에 한 가족이 더위를 피하고 있다. 김덕령 장군 같은 분들이 없었던들 어찌 오늘의 우리가 이렇게 평화를 누리며 살까?
그러면서 김덕령 설화를 생각한다. 그 설화는 언제까지나 우리 가슴에 살아있는 김덕령 장군이기도 하다.
덕령이의 누이는 평소 도량이 크고 힘과 지혜가 뛰어난 여장부였다. 덕령의 누나가 어머님의 병환이 걱정이 되어 친정인 석저촌에 와있을 때의 일이다.
덕령이 형 덕홍과 동생 덕보와 함께 화순을 다녀오면서 주막집에서 있었던 일을 자랑스럽게 얘기했다. 여자에게 행패를 부리던 주정꾼 5∼6명을 무릎 끓고 빌도록 했다는 것이다. 덕령의 얘기를 자초지종 듣던 누이가 조용히 타일렀다.
“덕령아, 힘은 함부로 쓰는 것이 아니다. 꼭 쓸데에만 써야지.”
“…….”
“네가 그렇게 힘이 센다면 나와 경주를 한번 할까?”
“무슨 경주를?”
“나는 정오까지 이 무명배로 너의 도포를 지을 테니, 너는 그동안 환벽당 밑의 언덕에 돌성을 쌓아라.”
그래서 두 남매는 서로의 지혜와 힘을 겨루게 되었다.
누나는 무명배를 끊어 도포를 만들고, 덕령은 10여리나 떨어진 무등산 중턱까지 뛰어 다니며 돌을 날라 성을 쌓았다. 막상막하 누가 이길지 모르는 숨막히는 시합이었다.
하지만 누나는 이미 도포를 지었으나, 마지막 마무리인 동정을 달지 않고 서성대고 있었다. 정오가 약간 못되어 덕령이 숨을 헐떡이며 집으로 왔다. 덕령은 누나가 그때가지도 오른손에 바늘을 들고 왼손에 동정을 들고 있자,
“천하 여장부 누나도 별수 없네. 자, 보세요. 환벽당의 성을, 내가 이겼지요?”
덕령은 승리감에 자신만만한 미소를 지으며 밖으로 나갔다.
누나는 덕령이 견고하게 잘 쌓은 50m의 성을 보며 흡족해 했다. 누나는 덕령에게 무엇이든 노력하면 이룰 수 있다는 자부심을 갖도록 해주었던 것이다.
또 누나와의 씨름 얘기도 전한다.
“남자가 어려서 너무 뛰어나면 화를 당한다는데”
김덕령은 어려서부터 무등산에 들어가 무술을 익혀 여러 큰 씨름판에서 이겨 기고만장 했다.
누나는 그러한 덕령의 기를 꺾어 겸손함을 가르쳐주고 싶었다.
그러다 9월 9일 중구날, 창평장에 씨름판이 서고 여기에 덕령이 출전한다는 소식을 듣고 덕령의 누나는 남장을 하고 씨름판에 나왔다.
덕령은 이미 창평 출신의 ‘홍장사’를 물리친 뒤였다.
“누구 이 총각 당할 사람 없소?”
“여기 있소.”
상대방을 얼핏 바라본 덕령은 안심했다. 덩치도 만만하고 별 힘도 없어 보였다.
“자 마음대로 잡으시오.”
덕령은 상대방을 깔보았다.
“내 동생의 이런 교만을 기어이 고쳐줘야지.”
덕령의 누나는 다짐하며 덕령의 앞무릎을 짚고 허리를 뒤로 쭉 뺏다. 덕령의 장기인 ‘반들음’을 피하려는 것이었다. 그때야 덕령은 정신이 번쩍 들어 바짝 다가가서 삽바를 잡으려 했으나 맘대로 되지가 않았다.
초조해진 덕령은 오른팔로 상대편의 허리를 잡고 업어치기로 성급히 승부를 내려 했다.
누나는 덕령의 힘에 끌린 듯 바짝 다가가 덕령을 번쩍 안아 올렸다. 그리고는 두서너 발 앞에다 바동대는 덕령을 살짝 내려놓았다. 승부는 쉽게 끝났다.
구경꾼들은 환성을 질러 낯선 씨름꾼을 치하했다. 하지만 덕령의 패거리는 ‘덕령의 엉덩이가 땅바닥에 닿지 않았다.’ 며 재 시합을 요구했다.
덕령의 누나는 조용히 동생의 태도를 지켜봤다.
땅바닥에 앉아 있던 덕령은 엉덩이를 툭툭 털고 일어났다.
“내가졌습니다. 정말 어른 한번 만났습니다.”
뜻밖에 덕령이 겸손하게 나오자, 덕령의 누나는 구경꾼들을 그 자리를 피했다.
“과연 내 동생은 큰 그릇이구나. 내 괜한 생각으로 사내대장부의 의기를 꺾은 것은 아닌지 모르겠다.”
그렇게 걱정했지만 그 뒤부터 덕령은 씨름판을 찾아가지 않았다. 그리고 학문과 무술 익히기에 전념하였다.
또 무등산에는 덕령과 누나가 어려서 힘자랑했다는 치마바위가 있다. 충효동 금곡마을의 깨진 바위는 김덕령이 주검동에서 만든 칼을 시험해 보았다는 바위인데, 커다란 바위가 두 쪽으로 갈라져 있다.
김덕령의 출생에 대한 이야기도 전해진다. 중국의 상인이 덕령의 아버지에게 달걀 하나를 주라고했다. 그래 곤달걀(썩은 달걀)을 주자, 그걸 앞산에 묻더라는 것이다. 하지만 곤달걀이라, 새벽이 되어도 닭울음 소리가 안 났다는 것이다.
중국 상인은 다시 달걀 하나를 달라고 했다. 이번엔 그날 낳은 달걀을 줬다고 했다. 상인은 그 달걀을 다시 앞산 그 자리에 묻었다. 그러자 다음 날 새벽에 그 달걀이 날개를 파닥거리며 울자 다른 닭들이 모두 따라 울었다고 한다.
그걸 보고 중국 상인은, 떠났고, 그 자리에 덕령 아버지는 선조 묘를 옮겨 이장을 했다고 한다. 중국 상인이 자기 선조 묘를 파가지고 와서, 그 자리를 달라고 했지만, 덕령 아버지는 끝까지 거절하였고, 후일 덕령이 그 산정기로 태어났다는 것이다.
<장군의 생가 집터>
<생가 사당, 무등이 품에 안긴다>
이렇듯 김덕령은 세월이 흘러도 광주 사람들과 함께 살아가고 있다. 후예들에게 진정한 삶이 무엇이며, 어떻게 사는 게 사람의 도리인줄을 가르쳐주고 있다.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기고, 사람은 죽어 이름을 남긴다고 했으니, 그 이름이란 게 바로 사람이 바르게 살아가는 도리와 행실로 이루어진다.
내가 해봐서 안다고 거들먹거리지만, 비웃음거리 밖에 되지 못하는 이름자는 역사의 수치요, 우리 민초들의 불행이다.
이름을 소중히 여기고 사는 세상, 그것은 바른 길을, 이웃과 함께 나누고 베풀며 살아가는 세상이기도 하다.
<정려비각>
<정려비>
<수령 4백년이 넘은 왕버들나무, 일가족이 정겹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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