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3
제주어선(濟州漁船)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 갈 제
이제 큰 배(漁船/어선)를 빌려 타고 온 백성을 구제(濟州/제주)하려 남쪽지방(海南/해남)으로 건너가야 한다. 그러려면 먼저 온 백성을 구제할 그 큰 배가 있는 제주로 가야한다.
자, 그렇다면 제주는 어떻게 갈까? 전라도 쪽에서 제주 가는 길은 여럿이다. 목포, 완도, 강진, 장흥, 고흥, 여수 등지에서 배를 타고 갈 수 있다. 또 광주에서 비행기를 타면 금방이다.
자, 그럼 제주 가는 배를 어디서 탈까? 그렇지만 급하게 서두를 일이 아니다. 호남가에서 지명은 빠졌지만, 아름다운 섬 완도(莞島)를 그냥 지나친다는 건 예의가 아니다. 그래서 먼저 완도와, 완도의 아름다운 섬 중 하나인 청산도(靑山島)를 다녀오기로 한다.
청산도는 요즈음 슬로우 시티로 널리 알려졌다. 인간이건 뭐건 누구나 무엇이든 어차피 한 번은 가는 길, 그 길이 무어냐? 바로 저 세상 황천 가는 길 아니냐? 그 길 가는 날이 언제인줄 뉘 알랴? 바삐 서두를 일이 또 뭐랴?
제주도 가기에 앞서 청산도에 들려 천천히 걷는 길, 바다와 산과 마을과 들녘, 그리고 그들을 잇는 굽이굽이 길을 느릿느릿 걸으며 호남가 한 자락을 불러보련다.
정보고의 천년 역사가 깃든 아름다운 완도항
완도항을 벗어난다<!--[endif]-->
완도에서 청산도는 뱃길로 금방이다. 완도항이 멀어지는가 싶더니, 이내 저만큼 수평선에 청산도가 떠오른다.
사람은 물론이요, 자동차를 40여대 싣고 완도와 청산도를 잇는 ‘사량호’가 갑판을 내린다.
그렇게 청산도의 관문 도청항에 발을 내딛는다. 제일 먼저 나그네를 맞이하는 건 ‘아름다운 청산도’라 새겨진 돌 이정표다.
“여기요.”
저만큼 누가 손을 번쩍 든다. 김상일 화백이다. 김 화백이 뭍에서 청산도로 들어 간지 어언 3년여인 듯싶다. 해풍에 그을린 얼굴에 하얀 이를 보이며, 이제 청산도 지킴이가 다된 그 김 화백이 얼굴 한가득 환한 웃음으로 맞이한다.
“금강산도 식후경, 청산도도 식후경, 청산 향기 가득한 점심부터 먹세.”
“아무렴요. 새는 무슨 새 보다도 먹새가 제일이지요.”
반가운 악수를 나누고 가까운 식당으로 향한다. 싱싱한 생선회에 칼칼한 매운탕이 나그네의 식욕을 자극한다. 항구에서 마시는 술맛 역시 달큼한 약수 맛이다.
김상일 화백은 육지에 있을 때 해맑은 수채화를 그리고 가르쳤다. 이곳에 와서 도 바다와 섬을 화폭에 담으며 학생들을 가르치고 있다. 푸른 바다 푸른 섬 청산도에서 그의 화풍은 어떻게 변했을까?
게 눈 감추듯 점심을 먹고 김 화백의 안내로 청산도 길을 걷는다. 먼저 ‘서편제 촬영장’이다. 한 여름이라, 보리밭이나 유채꽃은 볼 수 없지만, 산천은 의구하되 인걸만 간 데 없는 것 아닌가? 작은 소리로 호남가를 흥얼거리며, 푸른 바다와 그 바다를 삶터로 살아가는 사람들이 사는 집, 옹기종기 꼬막 같은 집들을 둘러본다.
완도와 청산도를 오가는 사량 아일랜드호
도청항의 아름다운 청산도
이어 청산도 슬로길을 찾는 사람들이 들리는 ‘봄의 왈츠 촬영장’, ‘조개공예 체험판매장’, ‘화랑포 길’을 걸어 다시 서편제 촬영장으로 되돌아 나온다. 그런 다음, ‘구들장 논’을 지나 ‘범바위’에 이른다.
산을 올라 큰 범바위 아래 서서 이마의 땀을 닦으며 올라온 쪽을 내려다보니 조금 전의 ‘화랑포 슬로길’은 큰 거북이 모습의 산을 휘도는 길이었다.
“저 거북이 모양은 이쪽에도 있지요.”
김 화백의 손길을 따라 고개를 돌리니, 왼쪽으로 거북 머리를 한 산이 보인다. 머리 쪽을 바다로 향한 채, 금방이라도 푸른 망망대해로 헤엄쳐 나갈 기세다.
“맑은 날은 여기서 제주도가 보이지요.”
김 화백이 청산도 주변을 그림으로 그려놓은 안내도 앞으로 우릴 안내한다.
“청산도의 지리와 역사를 간략히 알려드리지요. 청산도의 위치는 완도에서 남쪽방향으로 약19.2km고, 주변에 동쪽으로 거문도, 서쪽으로 소안도, 남쪽으로 제주도, 북쪽으로는 신지도를 바라보고 있지요.”
청산도는 신라시대(新羅時代)부터 주민이 살았을 거라는 것이 여러 가지 정황으로 추측되며, 선산(仙山), 선원(仙原)이라고도 했다. 허나 구전(口傳)만 있고 기록은 찾아볼 수 없으며 고려시대에는 탐진현(현 강진군)에 속하였다.
임진왜란 뒤, 왜적의 침입이 빈번하여 도서금주령에 의해 한 때 사람이 살지 않았으나, 선조 41년(1608)에 주민이 입도하였으며, 1681년(숙종7년) 수군만호진(水軍萬戶鎭)이 설치된 이후부터 서남해안을 방어하는 군사적(軍事的) 요충지로서의 역할을 담당하였다.
그후 1866년(고종3년) 청산도에 첨사진(僉使鎭)이 신설되면서 당리에 청산진성(靑山鎭城)이 축조되었고 진의 높이는 15척, 길이는 10리이며, 성문은 동, 서, 남의 3문을 두었다.
“당시 청산진의 군사는 420여명, 당리마을 서편의 원천정에서 남문까지는 매일 시장이 개설되었다 하지요. 성내 호구 수는 약 460여호, 인구는 약 2000여명(남1465명, 여1150명)였고요. 1896년(고종 33년) 완도군이 신설되자, 완도군 산하 청산면으로 편입되었지요.”
1964년 10월 1일 대모도 동리에 모도출장소를 설치하였고 빼어난 자연 경관으로 인하여 1981년 12월 23일 다도해해상국립공원으로 지정되어 오늘에 이르며, 청산도라는 지명은 나무가 무성하였다 하여 청(靑) 산(山)이 되었다고 한다.
범바위 앞 청산 바다를 내려다보는 곳에 빨간 우체통이 설치되어있었다. ‘느림 우체통’이란 하얀 글씨가 정겹다.
서편제 마을
서편제 길
범바위
청산도의 특이한 조개로 만드는 조개공예 체험장
김 화백의 설명을 들으며, 느림 우체국에서 설치한 느림 우체통 앞에서 느림 편지를 쓴다. 수취인도 없고, 또 언제 받아볼지도 모르는 마음의 편지다. 조상이 물려준 이 땅의 아름다운 자연을 삽질하지 않고 또 아름다운 자연 그대로 후손에게 물려줄 사람에게 쓰는 편지다. 우표도 붙이지 않은 그 편지를 우체통에 넣고 인증샷까지 찍는다.
이어 범 바위의 전망대에 잠시 들려 막걸리로 목을 축인 뒤, 아름다운 돌담길이 있는 동촌 마을로 간다.
동촌 마을에는 청산도에서 가장 어린 김 화백의 제자가 살고 있다. 바로 다섯 살 수민이가 그 아이다. 수민이는 동촌마을에서 태어나, 현재 동촌리에 거주하는 사람들 중 50세 이하로 유일한 아이라고도 한다.
마을의 버스 정류장 벽화는 김 화백이 그린 것인데, 바로 그 옆에 다섯 살 수민이가 본 내 마음의 고향, ‘첫 번째 차수민 전’ 의 그림이 있었다.
푸른 바다 푸른 섬의 지킴이가 된 김 화백과, 동촌 마을의 차수민의 만남! 이는 섬 마을의 아름다운 동화이고, 따뜻한 꿈과 사랑의 노래이며, 한 폭의 행복한 그림인 청산화(靑山畵)다.
“저 소나무는 푸른 청산도의 상징이고 그 옆 할아버지와 할머니는 바로 포근한 고향의 상징이지요. 바다에서 조개와 게랑 놀고 있는 아이는 수민이인데, 이 청산도의 미래이고 꿈을 상징하지요. 그리고 저 빨강 우체통은 우리 모두를 이어주는 정이고 나눔이고 사랑이지요.”
김 화백의 정류장 벽화 얘기를 들으며, 인간이 어떻게 서로 보듬고 살아가야 하는 가를 생각한다.
입만 열면 거짓말이요. 사기꾼 언행으로 우리 마음을 허탈하게 만드는 인간이 이곳에 와서 저 그림을 감상해보면 어떨까? 꼭 그랬으면 싶었다.
하지만 아서라. 방문했다가는 큰 봉변당할 게 뻔하다. 2011년 5월 MB 독일 방문시 오죽하면 교민들이 ‘녹색분칠’이라 쓴 현수막을 들고 사대강 반대 시위를 했을까? 당시 한 교포 예술가는 MB 얼굴 옆에 ‘그는 항상 거짓말을 한다’는 문구를 적은 초상화를 직접 그려 들고 나왔다는데, 우리 김 화백은 어떤 그림을 그릴까? 아마 저 푸르른 소나무를 갉아먹는 큰 쥐 한 마리를 그리지 않을까? 한 마디로 그 쥐도 사기꾼 쥐일 게다.
그 때다.
“김 화백님! 한 평이 가로 세로 몇 미터지요? 마을 일을 하려고 계획을 세우는데, 잘 생각이 나질 않네요.”
마을 일을 하는 분이 김 화백을 보자, 반가운 얼굴을 한다. 한 평의 크기에 대한 설명과 이러 저런 정담이 오간다.
동촌 마을을 지키는 할머니 당산 나무의 포근한 풍광 앞에서, 이마에 주름이 깊은 마을 어른과 김 화백이 다정하게 얘길 나누는 모습 역시 한 폭의 ‘청산화(靑山畵)’였다.
김상일 화백이 그린 동촌마을 벽화
김상일 화백의 다섯살 제자 수민의 첫번째 전시전
동촌마을의 아름다운 돌담길<!--[endif]-->
이어 송림이 아름다운 ‘지리’ 해수욕장을 지나 김 화백의 숙소로 왔다. 김 화백과 저만큼 어둠에 쌓인 청산 바다를 보며 소주잔을 기울인다. 그렇게 청산의 밤이 깊었다.
송림숲이 운치있는 지리 해수욕장<!--[endif]-->
청산중학교의 벽화
청산중학교
청산의 달을 맞는 청월루
청산도에 가기 전이다. 완도항 2층에 있는 ‘(사) 장보고 연구소’에 잠시 들렸었다.
연구소를 지키는 회장님과 ‘오늘에 살아 숨쉬는 장보고’ 등 여러 권의 저서를 집필한 정영례 사무국장님이 반갑게 맞아주었다. 완도의 자랑과 장보고의 활동에 대해서도 흥미로운 얘길 들려주었다.
장보고가 믿었던 부하 ‘염장’에게 피살당한 뒤, 그를 추종하던 2만여의 무리는 김제 벽골제 보수 공사에 끌려갔다는 얘기, 그들의 후손이 매년 화순 운주사가 있는 곳에서 만남을 가졌고, 운주사의 천불천탑은 그들의 작품일 거라는 얘기 등을 들었다.
다음 날 청산도에서 완도로 나와 장보고와 관련된 명소 몇 군데를 둘러봤다.
완도 전망대, 장보고 동상과 기념관, 마지막으로 장보고가 해상 무역과 해적소탕의 본거지로 사용했던 장도에 들렸다.
완도와 장도를 잇는 바다가 얕다. 바닥이 보인다. 잔물결이 찰랑이는 그 바다를 보며 만일에 장보고가 여기서 계속 활동을 했다면, 바로 이곳이 베네치아와 같은 해상도시가 되지 않았을까? 상상이 상념이 되어 꼬리를 물고 뭉게구름처럼 피어난다.
하지만, 역사에 가정은 없다고 했다. 이제 MB와 같은 무리들이 더 이상 이 땅과 역사를 망치지만 않는다면, 삽질과 콘크리트 밖에 모르는 그 인간이 온 땅을 삽질로 파헤치고 콘크리트로 덥지만 않는다면 더 무엇을 바라리. 눈을 들어 먼 대양을 보며 나아가는 진취적이고 진보적인 지도자가 나와 이 땅을 사랑한다면 또 더 무엇을 바라리.
장보고 장군상
청해진 유적지인 장도
장보고 기념관<!--[endif]-->
청산도를 느릿느릿, 완도읍도 느릿느릿 그렇게 둘러보았다. 푸른 바다의 섬 마을 완도, 무어라 말할 수 없이 아름답기만 하다. 특히 향토인 완도를 지키며 어려운 여건에서도 장보고연구소를 세우고 연구활동을 하는 정영례 선생님을 비롯한 향토학자들, 붓 하나로 청산도를 화폭에 담아내는 청산도 지킴이 김상일 화백이 있어서 우리는 또 행복하다. 그들 모두에게 건강과 행복이 가득하길 빌며, 온 세상을 구제할 제주의 큰 배를 타러 발길을 옮긴다.
쓸데없는 삽질로 나라를 망치는 쥐들은 이 칼로 용서치 않으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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