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5

운당 2012. 8. 24. 10:05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5

 

나라를 지키는 고장 해남

 

제주어선(漁船) 빌려 타고

해남(海南)으로 건너 갈제,

 

이 제주 어선은 온 백성을 구제(濟州/제주)하는 큰 배다. 그리고 이 큰 배는 사람살이의 희망을 담은 그릇이요, 험난한 시대의 평온을 염원하고 관통하는 대칭어이리라.

 

유난히도 더웠던 2012년의 여름이었다. 나이는 숫자에 불과하다고 하지만 필자도 지금까지 살면서 금년 같은 더위는 첨이다. 선풍기 붙들고 있으면서도 낮이고 밤이고 시달렸다. 온 몸이 불덩이처럼 느껴지는 열대야에 잠을 못 이루고 뒤척이던 참으로 힘든 여름이었다.

 

더욱이 쥐새끼는 2012810일 난데없이 독도를 다녀와, 그동안 쇠고기로 점수 땄던 미국놈들에게 점수 잃고, 일왕놈에게 90도로 고개숙여 인사하며 뼛속까지 친일 점수 받았던 것도 단박에 까먹으면서 찰떡궁합 한미일 공조를 삐걱이게 하는 큰 공훈을 세웠다. 정말이지 이 어이없는 해프닝이 아시아의 평화를 위협하는 일본과 미국 일변도의 정치외교의 지형까지 변하는 일대 사건으로 발전했으면 싶다. 치밀한 계획과 준비 속에서 이루어져야 하는 고도의 정치외교적인 사안이 개그처럼 웃기는 일로 일어났지만 결과로 보면 비웃기만 할 일도 아니다. 사대강 녹조라떼며 원전사고를 비롯한 각종 실책, 지놈 일가족과 측근비리 등을 덮으려 꼼수를 부리다가 소새끼 뒷걸음질 치다 쥐 잡듯 좋은 일 한 번 한 거다.

꼭 그런 놈이 있다. 잘 되면 남의 것도 내 자랑, 못 되면 무조건 남의 탓으로 돌리는 유체이탈로 미운 짓만 골라하다가 어쩌다 실수로 좋은 일 하게 되면 나 잘했지?’ 칭찬해주라고 개기름 흐르는 얼굴 내미는 그런 잘난척 인간 말이다.

그런 인간 부류 중 또 남의 돈 강탈한 걸 물려받아 평생을 호의호식해온 육순노파가 대통령 해보겠다고 군침 삼키며 설레발치며 나섰다. 그렇게 강탈해서 축적한 자기 재산 지키기 위해 사립학교법 개정을 결사반대하고 반값 등록금을 요구하는 대학생들에게 벌금폭탄을 안기드니, 내가 언제 그랬냐는 듯 반값등록금을 재탕 공약으로 내세우며 입에 침도 안 바르고 진정성을 믿어달라고 한다. 철면피 사기꾼들에게 어디 낯짝이 있으랴 만은 막바지 늦더위가 더 덥기만 한 이유다.

그나마도 다행인 것은 저녁이 있는 삶이나 평화, 정의, 복지를 화두로 내세우는 손학규, 안철수 등의 현자들이 있다는 것이다. ‘장물을 남에게 맡겨놓으면 장물이 아닌가라며 더위를 식혀주는 문재인 같은 정의인이 아직도 이 땅에 있다는 것이다.

더욱이 장준하 선생께서 돌아가신지 37년여 만에 부활하듯 201281일 피멍든 맨얼굴로 우리에게 돌아왔다. 그러니까 20118월 중순에 경기도 일원에 내린 집중호우로 파주시 광탄면 신산리 소재 천주교 나사렛공동묘원의 장준하 선생 묘소 뒤편 석축이 붕괴되었다. 이에 장준하기념사업회와 유가족은 국립현충원으로 묘소를 이장하려 추진하던 중, 파주시(시장 이인재)로부터 새로운 묘소지 제공 및 장준하공원 조성에 대한 제안을 받았다. 기념사업회와 유가족은 이 제안을 받아들여 지난 81일에 묘소를 이장하려고 봉분을 열었던 것이다. , 그런데 백골이 진토 되어 넋이라도 있고 없고라더니선생의 유골이 생생하게 그날의 참상을 안은 채 우리들 눈앞에 나타난 것이다. 인과응보라는 말이 있다. 독재자 박정희에게 역사가 내리는 천벌이라는 생각을 하면서 끓어오르는 분노는 새로운 열정이 된다. 이정희, 이석기, 김재년 등의 진통과 통진으로 허탈과 자괴감에 빠져 사망선고를 받은 진보의 숨통에도 한 가닥 생명수가 된다. 죽어서 사는 경우가 바로 이런 걸 말하나 보다.

 

<언론에 보도된 장준하 선생 유골 사진>

사설이 너무 길었다.

해남 땅, 한 때 석유가 나온다고 해서 복 받은 땅이라는 말도 있었지만, 그게 아니라도 해남은 복 받은 땅이다. 아니다. 우리 한반도에 복 주는 땅이다.

약무호남 시무국가(若無湖南 是無國家)란 말이 있다. ‘호남이 없으면 국가도 없다.’라는 뜻의 성웅 이순신 장군이 친구인 사헌부 지평 현덕승에게 1593716일 쓴 편지글 구절이다.

이 시기는 임진왜란이 일어난 지 1년이 지난 때로서 전라좌수사 이순신이 전라좌수영 여수를 떠나 한산도로 군진을 옮기는 시점이다. 이 해 이순신은 8월 중순에 삼도수군통제사가 되어 오늘의 한국이 있게 하였다.

그 호남에서 농토가 넓고, 수산물이 풍부한 곳이 바로 해남이다. 명량이라 부르는 울돌목은 천혜의 해협으로 왜란 3대 대승지다. 이순신이 나라를 구할 수 있게 인적, 물적 자원을 제공한 곳이 호남이요, 그중에서도 해남은 수훈갑의 고장인 것이다. 그러니 해남이야말로 우리나라를 지키는 땅이라 할 수 있다.

예전에 해남을 풋나락(익지 않은 벼)이라고 비하하듯 말하기도 하고, 해남 물감자란 대명사가 있기도 했다. 해남의 너른 들에서 자란 그 이른 나락이 배에 실려 목포로 나왔고 그 풋나락이 목포를 비롯 대처 사람들의 목구멍을 살렸던 것이다. 또 단물이 가득 배어나오는 해남 물감자는 겨울철 별미 중의 별미였다.

 

  <진도쪽에서 바라본 울돌목, 진도대교 건너편이 우수영쪽이다>

이 나라를 살리는 고장 해남에서 반드시 들려야 할 곳은 바로 이순신 장군의 호국혼이 깃든 울돌목이다.

마치 용이 폭풍우를 부르듯, 호랑이가 그 용을 보고 포효하듯 세찬 물살이 휘돌아치는 울돌목은 해남 우수영과 진도를 가로 지르는 좁다란 해협이다. 그 천혜의 지형과 호남인의 애국심이 나라를 구한 것이다.

이순신 장군의 사당 충무사가 바로 그 울돌목 가까이에 있다. 또 이곳 충무사의 대첩비는 나라에 어려운 일이 있을 때면 마치 충무공의 충절처럼 핏물을 흘린다고 한다.

이 영험한 대첩비에 대해 좀 더 살펴보자.

대첩비는 정유년(1597) 916일 충무공이 우수영 울돌목에서 거둔 명량대첩을 기록한 것으로 비문은 숙종 때 대학자 예조판서 이민서가 짓고 당대의 명필(名筆) 판돈령부사 이정영이 글씨를 썼다. 또 홍문관 대제학 김만중이 전자로 쓴 통제사충무이공명량대첩비비명을 돌에 새겼고 전라우도 수군절도사 박신주가 해남군 문내면 동외리에 건립(16883, 숙종 14)했다.

그러나 일제강점기에 이르러 왜란당시 크게 패한 기록이 담긴 그 비()를 조선총독부가 어찌 가만두겠는가? 1942년 전남 경찰부에 비를 뜯어서 서울로 올리라고 했고, 지령을 받은 친일경찰들은 인부들과 목수, 학생들까지 강제 동원하여 높이 2.67m, 1.14m나 되는 거대한 비석을 500m 떨어진 우수영 선창으로 침탈하면서 비각은 흔적도 없이 헐어버렸다.

그런데 와중에 인부가 죽고, 또 목수 두 사람이 원인 모를 병으로 죽자 대첩비를 아예 없애버리려던 조선총독부는 두려움에 떨다가 경복궁 근정전 뒤뜰에 파묻어 버렸다.

1945년 해방이 되자 우수영 유지(有志)들은 대첩비를 찾기 위한 '충무공 유적 복구 기성회'를 만들어 수소문한 끝에 천만다행으로 파묻혀 있는 대첩비를 발견하였다.

하지만 거대한 대첩비를 우수영으로 옮길 일이 막연했다. 백방으로 노력 미군정청(美軍政廳)의 협조를 얻어 서울역까지는 미군 트럭으로, 목포까지는 열차로, 배를 이용하여 우수영 선창까지 가져왔다.

그러나 비()를 세울 장소가 없어져 버렸기 때문에 제각(祭閣)을 짓기 위한 모금 운동을 시작했다. 풍물패를 조직, 나주 무안 등 8개 군을 돌기도 했고 대첩비를 수백장 탁본하여 여러 시와 학교 관공서에 팔기도 했다. 갖은 노력으로 마침내 1950년 비각이 완공되어 비를 모실 수 있었다.

이렇게 못난 후손들로 인해 수모를 겪은 명량대첩비는 믿기 어려운 영험을 나타내는 비로도 알려져 있다. 국가의 대난이 있을 때면 땀 흘리듯 핏빛물이 흘러나오는 것이다. 1910년 일제침탈 때도 필자의 할아버지를 비롯하여 인근 어르신들이 흰 무명배로 장군의 대첩비에서 흐르는 핏물을 닦아냈다고 했다. 19506·25사변과 19805·18민중항쟁 때도 이 비는 또 우국의 눈물을 흘렸다 한다.

명량대첩비는 1965년 보물 503호로 지정, 다음 해인 66년에 건립된 사당은 75년 성역화 사업이 이루어졌고 그해 428일 충무공 탄신일에 박정희가 쓴 충무사라는 현판이 걸렸다.

하지만 그 현판은 다까끼마사오란 이름으로 독립지사를 살육한 일본군 장교 출신 독재자 박정희의 글씨요, 더욱이 고개 숙여 참배하는 장군의 영정은 친일화가 김은호가 그린 것이어서, 장군께 부끄럽고 고개를 숙여도 마음이 영 찜찜하다. 요즈음 쥐새끼가 독도에 세워 독도를 무덤처럼 만들어버린 묘비같은 비명도 이와 다를 바 있으랴? 과거를 무시하는 자들이 저지르는 슬픈 역사의 되풀이다.

독립지사의 후손들은 3대를 빌어먹고 친일파의 후손들은 떵떵 거리며 사는 이 세상이 바로잡혀야 한다고 생각한다면 해남에 가거든 울돌목을 꼭 둘러보시라. 왜란 당시 울돌목 해협 양쪽에 쇠줄을 걸어 왜선을 몰살 시켰다는 쇠줄을 걸었던 흔적도 그곳에 가면 볼 수 있으니, 과거가 현재의 원류이고 한 몸임을 인식하시라.

왜 과거에 사느냐고 핀잔을 주는 종자들, 자신들의 죄업이 드러날까 봐 전전긍긍 과거가 무서운 허접 쓰레기 사이비 인간들의 입에 그 쇠줄을 걸어보시라.

 

<충무사> 

아무튼 따뜻한 땅 해남은 호국의 땅이요, 물산이 풍부하고 산수가 아름다운 고장이다. 그 너른 땅 해남 땅 우수영 울돌목에서 화원 공룡 발자국을 둘러보고 땅끝 마을 송지면 갈두에 이르른다.

 

<화원의 공룡 박물관>

<땅끝 가는 길의 조각공원>

그리고 달마산에 올라 아름다운 남해의 푸른 섬들을 바라보며, 이 땅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에게 평화와 행복을 주라고 기원을 한다.

 

<달마산 도솔암>

<우리 선열이 지킨 남해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