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7
보배로운 땅 보성
우도 분교장
황금빛 햇살이
남쪽바다에 섬 그림을 그렸는데
저녁 바다에선 가장 아름답다는데
섬 이름이 뭔지 알아?
우도섬
하루에 두 번 섬으로 가는 길이 열리는데
짱뚱이와 망둥어, 꼬막이랑 낙지,
갈매기도 공부하는 학교라는데
학교 이름이 뭔지 알아?
우도 분교장
작은 분교장 교실에서
하루 종일 웃음소리가 넘친다는데
왜 그러는 줄 알아?
김미선 선생님과 박지은 어린이가
만드는 행복한 세상이래.
우도분교장에 시 한 수 붙여놓고 고흥과 아쉬운 작별 인사, 보성으로 향한다. 득량만이 보성의 득량면에서 따온 이름인 만큼 우도섬에서 보성군은 바로 건너편이다. 그러니까 고흥 사람들과 보성 사람들은 득량만에서 낙지와 꼬막, 짱뚱어와 숭어와 우럭을 함께 잡는 사이좋은 이웃이다.
순풍을 돛에 받아 배를 띄우면 눈앞이지만, 찻길로는 고흥읍에서 벌교쪽으로 가다가 남양면 검문소에서 좌회전해야 한다. 그리고 대서면 소재지를 지나 삼거리에 이르러 우회전하면 보성군 조성면 소재지로 나올 수 있다. 하지만 삼거리에서 좌회전하여 예당들(고흥군 대서면, 보성군 득량면과 조성면을 함께 아우르는 간척지)을 가로지르면 곧바로 득량면 예당리 소재지로 나올 수 있다.
맛좋은 쌀로 유명한 예당 간척지 너른 들은 보성강이 만들어놓은 천혜의 산물이다. 보성강 발전소는 일제강점기인 1936년 7월 위치가 높은 윗동네인 보성군 겸백면(兼白面) 용산리(龍山里) 보성강(寶城江)을 막아 댐을 만들고 아랫동네 득량면(得粮面)에는 발전소를 세워 1937년 2월에 완공하였다.
이 발전소는 보성강댐의 물이 2.5km 가량의 터널을 지나 득량쪽으로 떨어지는 낙차를 이용하는 이른바 유역변경식(流域變更式) 발전소다. 83.65m의 높이에서 쏜살같이 미끄럼을 탄 물은 발전용량 3,120KW의 전기를 만들어 낸 다음 너른 예당들의 젖줄이 되고 양어장으로도 들어가서 고기를 키우니 1석 3조의 고마움이다.
얻을 득(得), 양식량(粮) 그러니까 양식을 얻을 땅, 득량(得粮)은 괜한 이름이 아니다. 더욱이 어느 때부터의 지명인지는 모르나 댐이 있는 용산리 2구 지역을 바늘골, 취수구 지점은 실밭등, 물 떨어지는 저수조 탱크를 설치한 낙차 지점은 수락등(水落嶝/물 떨어지는 고개), 그 물로 발전을 하는 발전소가 위치한 골자기 들녘은 광청(光廳/빛의 집, 관청)인데 그 지명이 그대로 적중되었다. 그러니까 바늘에 꿴 실을 따라 물이 떨어져 흘러 빛을 일으키는 빛집(光廳)이 되었다는 뜻이 된다.
내일을 내다본 듯 싶은 우리 조상들의 예지에 머리 숙이지 아니할 수 없다.
그 보성강발전소가 만든 바다처럼 너른 들의 풍성한 곡식을 보면 저절로 배가 부르다. 비록 일본이 지네들 군량미 등을 조달할 수탈의 목적으로 축조한 보성강댐과 발전소지만 결과적으로 당시 배고픈 조선 사람을 더불어 먹여 살리기도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선 미친(美親)놈 홍사덕의 말을 빌면 ‘일제가 우릴 강점한 것은 조선의 식량난을 타개하여 배고픈 조선인을 잘 먹게 해준 은혜로운 일이다’는 말이 성립된다. 목적을 위해 수단 방법을 가리지 않는 풍조가 지금 이 사회에 어떤 병폐를 끼치고 있는지, 그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 것이다. ‘나의 꿈이 이루어지는 나라’를 만든다고 하는데 그 꿈은 결국 그들만의 꿈인 것이다. 일제에 빌붙어 동족을 학살하고 도탄에 빠트린 박정희 이하 친일파들과 금세 변신하여 미국 소새끼 똥구녁을 핥는 이명박 일당, 애비가 물려준 장물로 호의호식해온 새누리당 박근혜 같은 착취자들이 지네들만의 만년영세를 누리려는 악몽일 뿐인 것이다.
그래서일까? 이곳 득량면에 특별한 인물을 기리는 장소가 두 곳이나 있다.
한 곳은 군두(軍頭), 군머리라 부르는 곳에 있는 최대성 장군의 사당 충절사다. 모의장군(募義將軍) 최대성(崔大晟) 장군은 임진(壬辰), 정유(丁酉) 두 왜란 때 의병을 일으켜 국난을 극복한 분이다.
장군은 1585년(선조18년) 무과에 급제하였고 임진왜란(1592년)이 일어나자 충무공 이순신 장군과 함께 한산대첩 등을 비롯한 남해 곳곳의 해전에 참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다.
정유재란(1597년)이 일어나자, 송대립, 김덕방, 황언복, 전방삭 등 의병장, 두 동생 대민과 대영, 두 아들 언립, 후립 그리고 가노 10여명을 비롯한 의병 2,000여명을 거느리고 보성은 물론 순천, 광양, 고흥 등지에서 20여회의 크고 작은 전투에서 연전연승하였다. 1597년(선조30년) 보성 안치에서 적군을 대파하고 달아나는 왜장을 추격하다, 그만 적의 암탄에 맞아 장렬히 순절하였다. 당년 45세였다. 이 후 사람들은 장군의 순절을 추모하기 위해, 그가 순절한 이곳을 군두(軍頭)라 이름하고 사당을 세워 기리고 있다.
또 한 곳은 군두에서 가까운 곳에 있는 김구 선생 은거지다.
백범(白凡) 김구(金九, 1876~1949) 선생은 황해도 해주에서 태어나 31운동 후 상해로 망명, 대한민국임시정부 조직에 참여하고, 결사단체인 한인애국단을 조직 이봉창, 윤봉길 의사 등의 의거를 지휘하였고, 1944년 대한민국임시정부 주석에 선임되었다. 815광복으로 귀국하여 신탁통치 반대운동을 주도하였고, 통일정부수립을 위한 남북협상을 제창하다가 1949년 6월 26일 이승만의 인간 사냥개인 안두희에게 암살 당하였다. 저서로는 백범일지가 있다.
1898년 5월경이다. 김두호라는 청년이 보성군 득량면 쇠실 마을에서 45일여를 기거했는데, 이 분이 바로 온 겨레가 민족의 지도자로 숭앙하는 백범 선생이다. 백범은 일제의 명성황후 시해를 응징코자 일본군장교를 살해하고 옥고를 치르던 중 1898년 3월 7일 인천감옥에서 탈옥한 뒤 이 곳 쇠실 마을을 찾아 든 것이다. 백범은 이 곳 종친 김광언의 집에 머물면서 광언, 덕언, 사중 등과 더불어 학문과 시대를 논하고, 중국역사가 아닌 우리 역사를 공부하며 민족정기를 일깨웠다.
백범이 떠날 때 그간의 은덕에 감사하며 이 집의 종친 김광언에게 한국 역사책을 주었는데, 책의 속표지에 이별을 아쉬워하는 한시 한수와 김두호라는 서명을 남겼다.
‘이별하기 어렵구나 이별하기 어렵구나./헤어지는 곳에서 일가의 정이 솟는다/꽃 한 가지를 반씩 나누어, 한 가지는 종가에 남겨 두고 떠나네/이 세상 살아 언제 만날 것인고, 이 강산을 떠나기 또한 어렵구나/벗이 함께 놀기 한 달이 넘었는데, 일이 어긋나 아쉽게 헤어지며 떠나는구나.’
해방 후 상해에서 귀국한 김구 선생은 김기옥(김광언의 손자)에게 안부를 묻고 한번 방문하겠다는 편지를 보냈다. 그리고 48년만인 1946년 9월, 백범은 22살 청년 김두호가 아닌 민족의 지도자로 쇠실 마을을 다시 찾았다. 백범은 쇠실 마을을 다시 찾은 소감을 ‘감격에 넘치었다’고 그의 ‘백범일지’에 썼다.
이렇듯 최대성 장군과 김구 선생의 유적지가 있는 득량면(得粮面)은 식량뿐만이 아니라 우리의 몸과 마음을 일깨우는 양식을 얻게 하는 곳이다. 보배로운 땅 보성에 이르러 제일 먼저 두 분께 참배할 수 있어서 나그네의 마음이 흡족하다.
이어 봄날이면 물결치는 보리와 유채꽃이 흐드러지게 피는 아름다운 예당들을 지나 공룡화석지가 있는 득량면 비봉 마을로 간다. 이제 득량만을 사이에 두고 고흥의 풍광과 어울려 천혜의 절경과 풍부한 해산물을 자랑하는 해안이 주욱 이어진다.
회천면에 들어서면 이순신 장군의 숨결이 출렁이는 그곳에 또 녹차해수탕이 있는 율포해수욕장이 있다. 마시기만 해도 좋은 그 녹차해수탕에 속인의 몸을 통째로 담가 찌꺼기를 말끔히 씻어낸 다음 봇재를 오른다. 해무가 밀려오면 구름 위 나라가 되는 봇재 일대는 국내 최대의 녹차밭이다.
그렇게 짙푸른 녹차밭을 둘러보며 잠시 영화 속 한 장면의 주인공이 되어 본 다음 이번엔 소리꾼의 생가를 찾는다. 이때쯤 이런 곳에선 타령 한곡조가 제격 아니겠는가?
회천면은 보성과 장흥의 경계면이다. 그래서 예전에는 장흥군에 속하다 1914년 행정구역 통폐합 때 보성군 회천면 회령리 도강 마을로 바뀐 곳에 소리꾼 송계(松溪) 정응민(鄭應珉1896~1964)의 송계초당과 예적비가 있다. 유심히 살피지 않으면 지나쳐버리기 십상인 18번 국도변의 이정표를 따라 도강 마을로 들어가면 된다.
이어 보성읍으로 나오면서 보성읍 대야리 강산(江山)마을의 강산(江山) 박유전(朴裕全1835-1906) 예적비까지 찾아본다.
보성은 민중의 삶이 촉촉이 묻어나는 판소리의 고장이다. 보성의 소리는 조선 후기 철종 때 보성읍 대야리 강산마을에서 성장한 서편제의 시조 강산 박유전에 이르러 일가를 이뤘는데, 강산제(江山制)라는 칭호는 대원군이 주었다 한다.
이 박유전의 강산제는 제자 정재근에 이어 다시 송계 정응민에게 이어져 동편제와 서편제를 넘나드는 보성소리가 되었다 한다.
서편제의 특징은 활달하고 우렁찬 동편제와 대조적으로 가창의 성색(聲色)이 부드러우며 구성지고 애절한 느낌을 준다고 한다. 소리의 끝도 길게 이어져서 이른바 꼬리가 달렸으며, 부침새의 기교가 많고 계면조를 장식하여 정교하다고 한다.
하지만 어렵고 모르는 그 전문적인 것들이 무삼 중요하랴? 그저 ‘쑥대머리 귀신형용!’ 하고 제 멋대로, 흥 나는 대로 춘향가 한 곡조를 뽑아본다.
그렇게 도강 마을의 송계 정응민의 송계초당과, 강산 마을의 잡초 우거진 정유전 예적비까지 둘러보고 보성읍으로 나온다.
아직도 가볼 곳이 많다. 등산을 좋아한다면 봄날 어린이날을 전후한 무렵에 회천면과 웅치면에 걸쳐있는 일림산을 오르면 된다. 보성강의 시원인 용추계곡이 있는 해발 664m의 일림산의 100만여평에 철쭉꽃이 피면 그곳은 별천지가 된다. 철쭉꽃을 좋아한다면 그 일림산에서 출발하는 보성강을 따라와 겸백면의 초암산을 또 찾으면 된다. 그곳 철쭉풍광도 명품 중의 명품이다.
다시 보성강을 따라 겸백면에서 복내면으로 간다. 복내면에서는 봉천리 당촌마을을 놓쳐선 안 된다. 산이라기보다 낮은 당촌 마을 뒷동산에 자리 잡은 별신당에는 남근석들이 여럿 놓여있다. 건강한 자녀의 출산이나 다산을 기원하거든 꼭 들려서 그 강렬한 기운을 받아보시라. 그런 다음 보성강 큰 줄기를 문덕면쪽으로 올려 보내고, 복내중학교 담 옆길을 돌아 보성강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건너면 율어면이다.
<복내의 별신당, 말 그대로 복내에 가면 복을 그냥 마구마구 내준다>
바로 그 곳 율어의 긴 골짜기는 보성강 쪽으로만 길이 트여 공격과 방어에 좋은 천혜의 지형이라 한다. 625 때는 빨치산의 해방구라는 전설을 간직한 곳이다.
그곳 율어면의 율어초등학교가 앉아있는 자리는 한 눈에 보기에도 명당자리다. 금계포란형이라고 금닭이 알을 품은 자리라고 하는데, 여름에는 걸핏하면 천둥번개라 한다. 어찌나 벼락이 잦던지, 죄 지은 놈들은 특히 각별하게 조심해야 한다고 한다. 아무튼 금닭이 천둥벼락을 불러 크게 소리하여 큰 인물이 낳는지, 그곳 율어 출신으로 범출한 인물이 많다고 한다.
<걸출한 인물을 많이 배출한 금계포란지형의 율어초등학교>
그 율어 골짜기를 거슬러 오르면 자동적으로 소설 태백산맥 기행으로 들어선다. 순천시 외서면과 보성 율어면의 경계인 석거리재에 다다르면 길 양쪽으로 펼쳐지는 지명들은 바로 소설 태백산맥의 주무대를 이르는 명칭들이다.
이번 2012년 8월말로 정년퇴임을 한 벌교초의 박승재 교장 선생은 보성 출신으로 보성의 문화와 유적에 대해 대단한 식견을 가진 분이다. 이제 공직에서 퇴임하였기에 벌교 현지에서 그 분의 안내를 받기 어렵게 됐다. 이 분의 구수한 입담과 함께 남도여관이며 소화교, 현부자 집 등을 둘러보면 기행의 멋과 격이 한층 높을 터인데 무심히 지나가버리는 세월이 아쉽기만 하다.
누군들 역사의 뒤로 물러서지 않으랴? 세상이 자기 것인 양 교만과 건방에 떠는 쥐와 닭 무리들이 그걸 깨닫지 못하는 것이, 그들의 떡밥 노릇을 하는 우리의 불행일 뿐이다.
이곳 벌교에서 꼭 들려봐야 할 곳은 채동선 음악당이다. 시간이 있다면 부용산 공원에 있는 그 분 묘소까지 찾아보자.
가을부터 봄까지는 벌교에서 꼭 먹어봐야할 음식은 꼬막이다. 여름에는 짱뚱어탕이 좋다. 잰피(초피나무 가루)를 넣어 톡 쏘는 그 맛과 함께 먹는 짱뚱어탕이 또 이곳의 별미다.
다시 보성강을 찾아 문덕면으로 나오면 보성강이 만든 주암호의 멋진 풍광과 함께 서재필 박사의 기념관을 참배할 수 있다. 호숫가에 웬 독립문이? 하는 의아심과 함께 이곳이 서재필 박사의 고향이란 걸 알게 된다.
보성 문덕에서 태어난 서재필 박사는 갑신정변에 참여한 개혁파 인물로 독립신문 발행, 독립문을 세우며 한국 근대사를 수놓은 주역의 한 사람으로 파란만장한 삶을 사신 분이다.
<서재필 기념관>
<서재필 선생, 보성 문덕 출신이시다>
아직도 보배로운 땅 보성에는 둘러볼 곳이 많다. 하지만 나그네의 정취는 헤어진 짚신을 털며 지는 해를 바라보는 여유로움인 것이다. 서재필 기념공원의 휴게소에서 조각공원의 오묘한 인체조각을 훔쳐보듯 감상하며 잎새주 한잔을 걸친다.
‘대원사도 볼만한 곳이지요.’
봄 벚꽃이 피면 인파에 밀려 가보기가 쉽지 않다는 대원사는 그곳 서재필 박사 기념관에서 엎드리면 코 닿은 곳인데, 가는 길에 백민미술관과 송계 정응민의 제자로 똥물을 마시며 득음을 했다는 조상현의 판소리 연구소도 있어 눈요기와 공부를 더할 수 있다.
이제 보성을 떠나 어디로 갈 것인가?
‘고산의 아침 안개 영암을 둘러있다.’
그러니까 높은 산(高山/고산)의 아침 안개는 신령한 바위(靈岩/영암)에 둘러 있다 한다. 그렇게 호남가 한 대목이 이제 발길을 영암으로 돌리라 한다.
'호남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0 (0) | 2012.09.22 |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8 (0) | 2012.09.15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6 (0) | 2012.08.26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5 (0) | 2012.08.24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4 (0) | 2012.03.23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