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0
예악(禮樂) 세상 크게 할 장흥(長興)을 믿어보세
예악을 장흥하니…. 하고 노랫가락 끝자락을 길게 늘어뜨리며 장흥 땅을 밟는다.
우주선이 뜨는 고흥이 높게 일어날 고을이면 장흥은 길게 일어날 고을이다. 그래서 세상을 평화롭게, 행복하게 할 인물이 끊이지 않는다. 그러니까 요즈음 우스개 표현으로 흥해도 너어무 기일게 흥할 고을이 장흥이다.
필자인 나그네도 무시로 자주 다니는 고을이 장흥이다. 오늘도 장흥읍의 구도심과 신도심 사이로 흐르는 탐진강 수변공원 주차장에 차를 놓고 한반도의 정남쪽 정남진 고을을 둘러본다.
<장흥 구도심의 남산공원>
<남산공원에서 바라본 장흥읍 전경>
장흥에는 산이 많다. 한반도의 70%가 산이니 어딜 간들 산이 없으랴만 장흥에는 빼어난 산이 많다는 얘기다. 그래서 장흥 나그네는 장흥의 산 이야기부터 시작한다.
책가방 둘러매고 학교에 가는 손주 아이 바라보듯 인자한 얼굴로 서있는 산이 억불산(518m)이다. 읍의 동남쪽을 둘러싼 길고 부드러운 눙선이 마치 바람결에 날리는 여인의 치맛자락 같은 산이라 하는데 탐진강과 함께 장흥의 상징이다. 요즈음 20여만 평의 편백나무 숲을 중심으로 잘 조성된 휴양림이 많은 사람을 불러 모아 돈을 벌어주기도 하는 읍내 사람들의 안산이다.
쳐다보면 제일 먼저 눈에 뜨이는 며느리 바위는 어린애를 업은 여자의 형상을 하고 있다.
<며느리 바위와 앞의 사자산 뒤는 제암산>
고려 시대쯤의 일이라고 한다. 며느리바위 옆에 부암사(夫巖寺)라는 절이 있었다. 그리고 산 아래 신흥 마을에는 오늘날 용산 철거민을 죽인, 쌍용 자동차 해고 노동자를 죽인, 제주 강정마을 주민과 구렁비를 짓밟는 그렇게 권력에 기생하여 노동자 목숨을 파리 목숨으로 여기는 악질 재벌들처럼 인심이 야박하고 고약한 부잣집 박첨지와 임첨지가 살았다.
두 사람 모두 성미가 괴팍하고 구두쇠였다. 그들은 손을 펴야만 겨우 들어가는 항아리에 쌀을 넣어 대문밖에 두었다. 그러니 쌀을 움켜쥐기는 해도 어디 꺼낼 수가 있겠는가? 탁발 나온 시주승들이 보고도 못 가져가는 떡이 아니라 쌀이었다. 또 걸핏하면 쇠똥을 던져 스님들을 쫒아버렸다.
부암사 도승의 귀에까지 박첨지의 고약한 소문이 들렸다. 이에 도승은 몸소 확인을 나갔는데 과연 듣던 대로였다.
그런데 그 집 며느리만은 마음씨가 고와서 몰래 물항아리에 쌀을 숨겨와 시주를 하며 시아버지의 부덕함을 용서해달라고 빌었다,
“이 달 조금날 비가 내리거든 절을 향해 달리되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말라.”
도승은 며느리에게 신신 당부를 하고 절로 돌아갔다.
드디어 조금날이 되고 비가 오면서 홍수가 났다. 며느리는 시아버지에게 절에 함께 가자고했지만 시아버지는 지은 죄를 아는지 들은 척도 하지 않았다,
하는 수 없이 며느리는 아기를 등에 업고 억불산 부암사를 향해 달렸다. 어찌나 빨리 달렸던지 며느리 머리의 수건이 벗겨져 떨어졌다. 그곳이 건산리인데, 지금의 장흥고등학교 뒤 모정 있는 곳이라 한다. 그래서 건산리의 건자가 수건 건(巾)자고 산은 뫼산(山)자다.
아무튼 절 법당 앞까지 아기를 업고 달려온 며느리는 그 순간 시아버지가 염려되었다. 도승이 절대로 뒤돌아보지 말라했지만 그만 뒤돌아보고 말았다. 그 순간 며느리와 아기는 석상이 되었는데 그것이 바로 며느리 바위다. 또 마을은 커다란 저수지가 되었는데 지금도 박림소(朴林沼)라는 이름으로 남아있다. 박씨 임씨가 살았던 마을이 물 못(沼)이 되었기에 그런 이름이 붙여진 것이다. 시아버지를 살리지 못한 며느리의 아쉬움일까? 지금도 박림소를 들여다보면 며느리바위 그림자가 비친다. 며느리 바위 옆에는 절터의 흔적도 남아 있다
또 이런 이야기도 있다.
흉년이 거듭 들어 사람들이 굶어 죽어가는 판국에, 관세음보살이 한 비구니로 현신하여 탁발로 구휼을 했다. 한데 부자들이 곡식을 내놓지 않았다. 한 부잣집에 들어가니 며느리가 시부모 모르게 곡식을 많이 내놓았다. 관세음보살은 ‘잠시 뒤 홍수가 져서 이 마을이 모두 잠길 터이니 당장 서둘러 저 산 너머로 피신하시오. 죽어가는 사람들이 아무리 살려달라고 아우성을 치더라도 절대로 뒤를 돌아보지 마시오.’ 라고 알려주었다.
며느리가 피신하기가 무섭게 홍수로 마을 전체가 잠겼고 사람들은 살려달라고 비명을 질렀다. 한참 뒤 정상 가까이 오른 며느리는 마음이 무거웠다. ‘죄 없는 사람들까지 다들 죽어 가는데 나 혼자만 살아 어쩌겠다는 것이냐. 저들을 구해야 한다.’
며느리가 몸을 돌리는 순간 꽈당 벼락이 떨어졌고, 며느리는 그만 ‘미륵불바위’가 되었다.
그래서 지금의 ‘며느리 바위’의 원래 이름은 ‘금(神)미륵’ 이었다. 따라서 억불(億佛)은 억 개의 부처가 있는 산이 아니고, ‘사람을 구하는 미륵부처’가 있는 산이라는 뜻이다. 옥편에 ‘억(億)’은 ‘인민’이란 뜻을 가지고 있다 한다. 그러니까 억불산은 '퓨필 붓다 마운틴(people Buddha mountain)'인 것이다.
어쨌거나 예전에나 지금에나 도둑놈들 때문에 선의의 민초가 고통을 받고 뜬금없이 죽어가는 게 똑같다. 이 글을 쓰는 2012년 9월 19일, 이틀 전 17일에는 지놈 깨끗한 척 눈 희번덕거리며 국민을 나무라던 새누리당 홍사덕이란 놈이 부정한 돈을 꿀꺽 삼킨 혐의가 드러났다. 그래도 명박이와 달리 염치는 있었는지 새새년년 지들끼리 누리며 살려던 새누리당을 탈당했고, 하루 전인 18일에는 역시 새누리당의 전 국개(鞫犬)의원인 못생긴 벌떡녀 송영선이 사고를 쳤다.
9월 18일 ‘한겨레 신문’에 실린 친박근혜계인 송영선과 서울 강남의 사업가 ㄱ씨의 대화 내용이 담긴 녹취록에는 송영선의 노골적인 금품 요구가 적나라하게 담겨 있다. 이 가운데 주요 발언 일부를 그대로 옮기는데 읽기 쉽게 극본처럼 풀어본다.
ㄱ씨 : 얼마가 필요해요
송영선(이하 송) : 12월(2012년)에 6만 표만 나오면, 내가 박 후보를 대통령 만드는 데 1등 공신이 되니까 내 자리가 확보되는 거죠. 제일 급한 거는 변호사비 3천만원….(변호사비가 필요한 거 보니, 지은 죄가 또 있나보다.) 여의도 오피스텔 하나는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월 300만 원정도 주셔야죠.
ㄱ씨 : 그러면 내게 줄 선물은요?
송 : 12월 대선에서 (내 지역구인 경기도 남양주갑에서 박근혜 후보 지지표) 6만 표를 하려면 1억5000(만원) 필요하다고 말씀드렸잖아요. 그러면 (나를 도와주면 ㄱ씨가) 투자할 수 있는 게 (경기) 남양주 그린벨트가 있어요. 그래서 내가 그 정도를 얘기한 거예요.
ㄱ씨 : 돈이 많이 드네요, 잉.
송 : 지역구 관리라는 게 딴 게 아니에요. (주민들한테) 대선 때 (박 후보를) 좀 찍어 달라. 그러려면 그 돈이 한 달에 1500만~1800만원이 들어갑니다. 투표 독려라는 게 뻔한 거야. 내가 기름칠을 안 하면 어떻게 지역구가 돌아가냐는 게 지역구예요. 12월에 6만 표만 나오면, 내가 박 후보를 대통령 만드는 데 1등 공신이 되니까 내 자리가 확보되는 거죠. 대통령이 되면 정부에 보낼 수 있는 차관급 이상 자리가 5000개입니다. 내가 원하는 건 국방부 장관, 안 되면 차관이라도 하고 싶고. 대구시장에 출마한다든지, 다른 자리를 갈 수도 있고. 그 사람(박근혜)이 내가 이뻐서가 아니라, 자기가 국정을 끌어가기 위해서 나한테 자리를 주게 돼 있습니다.
ㄱ씨 : 흐메, 진짜 대단하네요. 박근혜가 당선되면 왔다겄네요 잉.
송 : 지금 제일 급한 거는 변호사비 3000만원 그겁니다. (그 돈을 주면) 그건 기부예요. 그런데 여의도에 거처가 필요합니다. 왜 필요하냐면, 현실정치에서 떨어지면 저는 끝나거든요. 오피스텔 하나 정도는 있어야 돼요. 1주일에 사흘은 오피스텔에 근무하면서…. 남양주 운영비까지 손을 벌리면 (금액이) 너무 크고, 여의도 오피스텔 하나는 좀 도와주셨으면 합니다. 보증금 1000만원에 나 혼자 있으면 관리비 해서 (월) 120만 원 정도. 7평 기준으로 얘기하는 겁니다. (일 도와줄) 아가씨까지 있으려면 한 달에 250만원, 관리비 하면 300만원 정도 주셔야죠. 그러면 (여의도의) 연락 사무실은 됩니다. 15평이 제일 좋은데, 밥도 끓여먹고 해야 되니까. 여의도에 15평 아파트도 있어요. 현실적으로 사무실 겸 집으로는 15평이 좋죠. (그런데) 그렇게까지 남한테 손 벌리는 게 정말 싫으니까. (당신은) 한 달에 200만~300만원 주는 그런 쩨쩨한 사람이 아니니까, 후원회장으로 만들어드리겠습니다.
ㄱ씨 : 정말 정치하기도 힘드네요. 잉. 말도 많이 잘해야 하고요 잉.
송 : 목표가 있을 때는 어떤 고통도 고통이 아니더라니까. 지금 내가 계속 괴로운 게 목표가 없어서 그래요. 그렇게 돈 몇 억 원 때문에…. (내가 대구에서) 공천 받으려고 그렇게 애를 썼는데, ㄴ의원한테 3억만, (아니) 2억만 갖다 줬어도 내가 공천을 받았을 텐데. ㄴ의원이 (박 후보의) 최측근이에요. 박 후보 사람 쓰는 거 실망이죠. 나는 돈을 안 줘서 공천을 못 받았어요.(ㄴ 국개의원 이노마는 어떤 놈인지 궁금하다. 곧 밝혀질테니 좀만 참자)
녹취록이 실린 기사를 보면 참으로 가관이다. 애들 말로 어이상실이고 요즈음 유행어로 맨붕이다.
그래서 이런 말이 또 요즈음 인구에 회자되며 굴러다닌다.
정직을 원한다면 문대성을 배워라, 박사 학위 논문 표절 인간으로 복사기 회사명을 따 ‘문도리코’라 부르는 이 인간에게서 정직을 배우라는 말이다. 강한 역설인 것이다.
사랑을 원한다면 김형태를 배워라, 이놈은 지놈 보다 먼저 죽은 동생과 조카들이 부끄럽지도 않을까? 이 써글놈이 조카 학비를 미끼로 제수를 오피스텔로 유인해 좋지도 않은 물건 흔들며 성폭행 일보 전의 성추행을 했다. 그런데 이 인간에게 사랑을 배우라니? 그래 맞다. 성누리당, 성추행당으로도 부르는 박근혜를 비롯한 잡것들이 히히덕 거리면서 이놈에게 부지런히 배우고 익혀 지놈들 끼리끼리 기꺼이 행동에 옮길 사랑이다.
우정을 원한다면 정준길을 배워라. ‘안철수 대통령 나오면 죽는다’는 협박공갈을 하고서는 친구 사이에 우정으로 했다느니, 술 취해서 택시 탄 것을 자가운전으로 착각했다느니, 횡성수설의 대가인 이 놈은 우정의 표본으로 역사책과 초중등 교과서에 실릴 놈이다. 에라이! 가문의 영광이겠다. 이 미친놈아!
민주를 원한다면 한기호를 배워라. 이놈은 깨어있는 지식인과 민초들이 박근혜의 인혁당 사건, 유신 등의 폐해와 잘못을 지적하자, 박근혜의 딸랑이가 되어 하는 말이 ‘역사를 쓰는 일에만 몰두해서 과거로 발목잡기를 하는 세작(細作)들이 있지만, 역사를 만들어온 사람들은 새역사를 만들기 위해서 오늘을 허비하지 않는다’ 고 궤변을 늘어놨다. 세작(細作)의 다른 말이 간첩이니 박근혜에게 바른 말을 하는 사람은 다 간첩이라는 거다. 더하여 29만원짜리 전두환이가 육사사열을 받은 것과 관련된 논란에는 ‘516 쿠데타는 결론적으로 구국의 혁명일 수 있다’고 했고, 통합진보당 부정경선 파문 때는 ‘천주교가 들어와 사화를 겪으며 십자가를 밟고 가게 한 것처럼 종북의원도 그렇게 김일성 사진을 밟아보게 해서 구별할 수 있다고 했다. 참으로 육시랄 놈이다. 이 놈 세작인간은 혓바닥을 꼬쟁이에 꿰어서 종로거리에 매달자. 그 혓바닥으로 말을 잘 하면 위의 발언을 진실로 인정하고, 그러지 못하면 헛소리로 인정 해 굶주린 돼지우리에 산채로 던져줄 일이다.
도덕을 원한다면 홍사덕이라 한다. 이 시궁창에 빠진 생쥐나 기생오라비처럼 미끄덕 멀끄덕하게 생긴 박근혜 경선캠프 공동 선대위원장 놈의 망언도 한 타래다. ‘박근혜 반경 5.5m 안에 55살 이상 들이지 말라. 나이 많아 도움 되는 사람 없다’는 말은 기본 안주다. ‘10월 유신이 있었기에 수출 100억불을 달성했다.’ ‘충청도는 핫바지다.’ 또 2012년 8월 18일, 수천만 원의 돈을 꿀꺼덕 삼킨 게 드러나자 ‘무혐의 밝혀질 때까지 활동 중단하겠다, 검찰 조속 수사 마쳐야 한다’고 마치 자신이 결백한 양 오리발을 내밀며 견찰(犬察)에게도 호통을 쳤다. 에이, 더럽고 추접스런 놈! 침을 탁 뱉고 다음 놈으로 넘어가자.
아차, 이번엔 놈이 아니라 년이다. 그러니까 청렴을 원한다면 송영선을 배워라다. 위에 이년의 녹취록을 옮겼으나 새로운 내용이 있어 덧붙인다.
다음은 송영선이 사업가 ㄱ씨에게 ‘박근혜 대통령 만들기용’ 금품을 요구하며 ‘정치자금’이 어떻게 쓰이는지에 대한 설명이다.
ㄱ씨 : 근디 말이요. 내가 못 받은 돈이 있는디 좀 받아주시오.
송 : 정치판 돈이라는 건, 대금을 받으면 70(%)은 이리저리 다 갈라주고, 30(%)은 자기 생활에 필요한 곳에 쓰지요. 조직이 수두룩하니까 돈을 써야해요. 그래서 (그 돈은) 이미 공중분해가 다 된 돈이예요. (ㄱ씨가) 돈을 돌려받으려는 건 잘못된 생각이예요. 포기하세요.’
그러니까 ㄱ씨가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친박계 ㅎ씨에게 25억원을 빌려줬다가 아직 돌려받지 못했다고 송영선에게 말했다. 그러자 송영선은 ‘그 사람은 돈 받아서 부정축재 하려는 게 아니고, 박근혜한테 잘 보이려고 모든 걸 다 하는 사람’이라고 두둔했다.
이어 ‘정치권에서 돈(정치자금) 받으려는 사람이 그걸로 부정축재 하고 집 사는 사람은 없다. 그 돈을 받아서 정치 돈으로 안 쓰고, 커피숍을 냈거나 아파트를 빌렸으면 원금 받은 것의 몇 십%라도 (돌려)주지만, 이건 이미 공중분해가 다 된 돈’이라고 했다. 또 ‘정치바닥에서 ㅎ씨 같은 사람은 바람잡이’라며 ‘아무리 짜 봐도 그 돈은 안 나온다. (정치자금을 받아 다른 사람들에게) 다 갈라줬다’고 자신들의 조직적 강탈과 도둑질, 부정, 비리에 대해 상세히 설명까지 했다.
ㄱ씨 : 그러면 ‘돈을 어디에 나눠 줘요?’
송 : 박근혜 밑에 조직이 수두룩하니까 돈을 써야 해요. 박근혜 이름으로 움직이는 조직이 어디 한 두 개겠어요? 그 사람들이 다 무슨 자원봉사를 하겠어요? 자기 포켓에서 돈 내서 할 수 있는 사람이 안 되는(없는) 데는 (ㅎ씨 같은 사람이) 돈을 보태줘야 해요.
ㄱ씨 : 대선 끝나고 12월에 돌려준다고 했는디요.
송 : ‘ㅎ’씨가 그 돈을 (대선이 끝난) 12월에 돌려주겠다고 한다면, 그건 다른 데서 받아서 주겠다는 거예요. 그래서 사고가 나게 되는 거예요.
그러니까 송영선의 말은 정치권 인사들이 주변 지인들을 통해 개인적으로 조달하는 정치자금뿐만 아니라, 제3의 ‘자금줄’이나 ‘이권개입’ 등을 통해 정치자금을 조달한다는 것이다.
그러고 보니 어찌 보면 시치미 떼고, 오리발 내밀고, 윽박지르는 박근혜에 비해 송영선은 착한 도둑년인지도 모른다. 자신의 수법을 자랑스럽게 여기고 숨기지 않고 까발리니까 말이다.
여기에 나오는 ‘ㅎ씨’는 2006년 8월 박 후보의 외곽 지지조직인 ‘한강포럼’을 만들어 활동했으며, 2007년 한나라당 대선후보 경선 당시 박 후보 비선조직으로 알려진 ‘마포팀’ 운영도 주도한 인물이라 한다. 이명박 당시 경선후보의 위장전입 의혹을 캐려고 이 후보와 친인척의 주민등록초본을 부정 발급받은 사건의 주인공이기도 하다. ㅎ씨는 2007년 ㄱ씨가 아닌, 또 다른 재력가에게 박 후보의 ‘경선자금을 빌려 달라’고 요구해 돈을 받았다가 정치자금법 위반 혐의로 기소돼, 지난 2월 징역 1년에 집행유예 2년, 추징금 1억4900만원을 선고받은 인물이다.
그런데 송영선 녹음 테입에 25억 돈 받았다고 나오는 사람 ㅎ은 17대 대통령 선거 때 박근혜 후보 홍보위원장을 맡았던 홍윤식이라고 한다. 한겨레신문은 녹취록에서 실명을 감추었는데, 외려 조선일보가 까발렸다고 한다.
ㅋ 이런걸 보고 지놈 도끼에 지놈 발등 찍힌 격!
아, 그러니까 이 사건은 욕보다도 불난 집에 부채질 해주듯 ‘잘한다, 잘한다, 물어뜯고 쑤시고 잘해봐라! 잘해봐!’ 응원가까지 불러주고 싶은 재미가 물씬 풍기는 사건이다. 재미를 느끼다니? 항시 우리에게 복장 터지는 울화통을 안겨주는 쥐새끼 명박이의 졸개들이 저지르는 저질, 악질 코메디가 이제는 만성이 되어 재미를 느끼게 하나 보다. 역시 명박이는 대단한 놈이다. 도둑적으로 완벽한 인간은 뭐가 달라도 다른 것이다.
그래서 이 모든 것(정직, 사랑, 우정, 민주, 도덕, 청렴)을 원한다면 박근혜를 배워라다. 모든 것을 바꾼다나 어쩐다나. 아무튼 발끈해라는 호칭에 맞게 얼마 전 민주당 이종걸 의원이 이년이라 했다고 발끈한 박근혜의 말 99%는 이렇게 귀결된다.
‘이 나라를 위해서, 이 나라를 책임지고, 이 나라를 살리려고, 국민의 말에 귀 기울여, 어려운 민생을 챙기고, 국민의 삶과 무관한 일로 시간과 열정을 낭비할 때가 아니다’ 등이다.
그러니까 박정희 옆에서 잘난 체나 했던 지년이 국민에게 한 일이 뭐란 말인가? 시중의 떠도는 말처럼 직장에서 급여를 받아봤어? 결혼해서 시장엘 가봤어? 술 취한 남편 주정을 들어봤어, 애기 똥걸레를 빨아봤어? 그러고도 초등학교 교과서에나 나올 막연한 아무런 핵심도 없는 단어의 나열로 국민을 찾으니, 바로 이것도 쥐새끼 명박에게 배운 유체이탈 사기언어다. 또 다른 별칭 닭그네의 유체이탈 사기언어의 결정타는 ‘병 걸리셨어요?’다. 곤란한 질문을 받으면 ‘내가 아니라고 말했으니 그걸로 끝’이라고 한 뒤, 더 캐물으면 바로 이 말 ‘병걸리셨어요?’다. 참으로 언어의 미학(黴嗀)이요, 도술적(盜術的) 이용이다.
민심은 천심이라 했다.
그래서 시중에 이런 노래가 불려진다.
혁명을 주장하니 장준하님 호통치고,
유신을 강변하니 인혁당이 살아나네
민주를 말하려니 김영삼도 눈홀기며,
지조를 말하려니 홍사덕이 나타나고,
역사를 말하려니 한기호가 악을 쓴다.
사생활을 따지려니 동생들이 곤란하고,
정직을 말하려니 문대성이 돌려차며,
재산환원 밝혀보니 최필립이 다릴 걸고,
사랑을 앞세우니 김형태가 눈물짓네.
우정을 말하려니 정준길이 아파하고,
경제를 살리려니 이한구가 토라지며,
청렴을 띄우려니 송영선이 춤을 추고
좌익 까대려니 부친집안 남로당원.
또 이런 노래도 있다
속지 말아요 바뀌지 않아요
남로당 빨치산 빨갱이가(家)
매국노 친일파 독재자 부정축재자
박정희 딸년 바뀌지 않아요 속지 말아요
대한민국 종북 좌빨 원조 삼형제
박동희 남로당 빨치산 출신 빨갱이
박상희 1946년 10월1일 대구폭동 사건 경찰서 습격 현장 사살
박정희 1948년 10월19일 여수 순천 반란 주동자 총살형 선고
당시 31사단 24연대 육군 중위
총살 약1달 남기고 6.25터져 장교부족 복귀했네
역사 교과서 사실대로 서술해 교육 시켜요
자손만대 처먹고 살기위해 부정축재 강탈한
mbc방송 영남대학 부산일보 경향신문 부지
등 등 등 도둑년이 따로 없네.
입으로만 반값등록금 서민복지
에라이, 장물년아!
속지말아요. 바뀌지 않아요.
“그네야 너도 병 결렸냐? 매국병(賣國病), 정사병(政詐病 이명박이 걸린 정치사기병政治詐欺病)말이다.
에이 추접스런 인간들 같으니라고….
침 한 번 탁 뱉은 뒤 이제 그만 각설하고 다시 나그네 길에 나선다.
<사자산의 운무. 장흥군청의 사진>
<사자의 등>
그렇게 억불산을 떠나 사자산(獅子山666m)으로 간다.
억불산이 장흥읍의 안산이면 바로 앞의 사자산은 호위산이다. 금세라도 뛰어오를 듯 사자앙천형(獅子仰天形) 형상으로 짙푸른 남해바다와 장흥 벌을 향해 고개를 쳐들고 있다. 어찌 보면 이집트의 스핑크스와도 같다. 일제강점기 때 왜인들은 장흥의 후지산이라며 좋아했다 한다. 제암산(778.5m), 억불산(518m)과 더불어 장흥 삼산으로 꼽히는 명산이다. 장흥읍쪽 봉이 머리로 두봉(560m), 제암산 방향 정상(666m)쪽의 암릉이 꼬리로 미봉이라 한다.
사자산 두봉에서 미봉까지는 2Km 남짓이다.
그곳에서 동쪽으로 방향을 바꿔 3.7Km쯤 가면 제암산(帝巖山807m)이다. 전라남도 보성군 웅치면과 장흥군 장동면의 경계로 그 지맥이 동쪽으로 고흥반도까지 이어진다. 웅치면으로 이어지는 남동사면은 완경사를 이루며, 나머지 사면은 비교적 급경사를 이룬다. 서쪽 기슭에서 흘러내리는 물은 탐진강(耽津江)으로 유입된다. 넓은 풀밭으로 이루어진 산정에는 3층 바위가 있는데, 주위의 낮은 산과 암석들이 이 바위를 쳐다보고 있는 듯한 형상을 하고 있어 제암(帝巖)이라 한다. 이곳에서 기우제를 지내기도 했다. 산의 북쪽으로 보성과 장흥을 연결하는 국도가 지난다.
<제암 임금바위다>
사자산을 두봉쪽으로 오르게 된다면 두봉 아래 마을에 맛있는 맛집이 있다. 그냥 손으로 만드는 두부집인데 값도 싸고 말만 잘하면 토속적인 반찬 두어 가지도 얻어먹을 수 있다.
아무튼 다시 사자산 미봉에서 남쪽으로 5Km를 걸으면 삼비산(三妃山664m)이다. 옥황상제의 세 황비가 내려왔다 하여 천비산(天妃山), 일년내내 마르지 않는 샘물에서 황비가 놀았다 하여 샘비산 혹은 천비산(泉妃山), 안개가 늘 자욱하다 하여 현무산(玄霧山) 등 여러 이름으로 불렸다.
삼비산 정상에 오르면 억불산, 사자산, 천관산, 수인산, 월출산, 그리고 멀리로 광주 무등산, 고흥 팔영산 까지 한눈에 들며, 동남쪽으로는 남해의 득량만이 시원스럽게 펼쳐져 가슴을 확 트이게 한다.
삼비산은 봄이면 온통 철쭉으로 아름답게 덮인다. 4월말에서 5월 중순까지가 꽃 색깔이 선명하고 절정이다. 남쪽의 회룡봉(640m)에서 삼비산을 거쳐 북쪽에 이웃한 일림산 능선까지 약 18만여 평의 산철쭉 군락의 모습은 마치 붉은 비단을 깔아 놓은 듯 장관이다. 장흥군에서는 매년 5월초에 철쭉 등반대회를 개최하고 보성군에서도 철쭉제 행사를 갖고 있다.
삼비산을 거쳐 일림산 동쪽기슭으로 내려오면 봇재 일원의 보성 녹차 밭을 가깝게 들릴 수가 있고 무지개골을 통해 안양면 수문리로 오면 청정해역 득량만의 신선한 활어나 바지락, 키조개를 맛 볼 수 있다.
또한 장흥의 장재도 해안에서 안양면 수문포를 거쳐 보성 회천면의 율포해수욕장까지 이어지는 해안도로는 득량만의 수려한 풍광을 즐길 수 있는 드라이브코스다 해 뜰 무렵이나 해질 무렵 해안도로를 달리면서 바다의 정취에 넋을 잃지 않도록 주의하여야 한다.
<삼비산의 철쭉>
<삼비산의 여름>
다시 장흥읍으로 내려와 이번엔 읍의 북서쪽으로 가본다.
강진군에도 대구가 있고, 장흥에는 부산이 있다. 웬 경상도의 대도시 이름이 이곳에? 그런데 고려의 청자도요지인 강진의 대구(大口面)는 경북 대구(大邱)와 글자가 다르고, 부산은 솥 부(釜)자가 아니라 지아비 부(夫), 뫼 산(山)자다. 직역하면 아버지 산이라는 말이다.
수인산 자락의 품에 안겨있는 부산면 내동마을에 먼저 들려본다.
이 장흥군 부산면(夫山面) 내안리(內安里) 내동(內洞)마을은 장흥읍에서 북서쪽으로 4km의 위치고 면 소재지에서는 3km 거리다.
북쪽으로 수인산 끝자락인 수리봉과 경계로 유치면 대리와 인접하고 서쪽으로는 수인산 허리를 넘어 장흥읍 성불리와 경계한다. 삼면을 산으로 두르고 트인 동쪽은 부산(夫山)평야인 해발 50m의 중산간 마을이다. 이 내동마을은 기러기가 내려앉은 비안낙지(飛雁落地), 또 승려가 예불을 드리는 호승예불(胡僧禮佛) 형국이라고도 한다. 특히 산세가 석봉(石峯), 석맥(石脈)이어서 마치 하늘을 향해 기치창검을 겨냥하는 듯 기가 강하며, 마을 뒷산 모습이 용이 하늘로 오르는 듯해서 흥룡동(興龍洞)이라 부르기도 한다.
내동마을은 고려말기 공(孔)씨와 장(張)씨가 살았다고 전해진다. 세종 때 평강현감(平康縣監)과 이조참판(吏曺參判)을 지낸 경의(敬義)와 의성현감(義城縣監)을 지낸 그의 큰아들 찬(瓚), 그리고 이조랑청(吏曺郞廳)및 사인(舍人)인 둘째 아들 필(筆)이 난세(亂世)를 피하여 이곳 장흥으로 낙남(落南), 이곳 흥룡동에 터를 잡아 영광김씨장흥파(靈光金氏長興派) 집성촌이 되었다. 또 조선조 단종 3년(1455년)에 단종의 숙부인 수양대군(世祖)이 계유정란(癸酉靖亂)후 집권할 무렵의 입향조(入鄕祖 어떤 마을에 맨 처음 들어와 터를 잡은 사람 또는 그 조상)라고 한다.
수인산이 내동마을 뒤로 수리봉으로 솟았다가 오르락내리락 하면서 필봉(筆峯), 탕건봉(宕巾峯), 가마봉과 부암(夫岩). 몰(말)탄바위, 호랑이바위, 두꺼비 바위 등을 만들고, 아래쪽 마을 뒤로 노적(露積)을 쌓은 듯 노적봉(露積峯)을 만들었다. 이 노적봉은 추석에 마을 아낙네들이 보름달맞이를 하는 곳이다.
특히 부암(夫岩)은 내동마을 서북쪽 반자골 뒤 산등성(해발 약 380m지점)에 약 15m 높이의 큰 바위로 생김새가 지아비 같아 ‘지애비 바우’ 부암(夫岩)이라 했다. 이곳의 부암(夫岩)을 바라보는 억불산의 며느리바위를 망부암(望婦岩)이라고도 한다. 어떤 이는 이 바위가 건강한 남성의 만근(滿根)형상이어서 부암(夫岩)이라고 한다. 남자라면, 아니지 여자도 무에 싫겠는가? 건강하고 든든한 남근(男根)을 뉘라서 마다하랴. 근이 약하거나 자신 없는 분들은 필히 이 반자골의 만근(滿根)의 기를 받아보시라 권해 드린다. ㅋ
아무튼 이렇게 뒷산에 부암(夫岩)이 있는 마을이라고 하여 내동을 부산리(夫山里)라고 하였다. 1914년 용계면의 일부가 합하여 부산면이 되기 전까지 부산방(夫山坊)의 치소(면소재지 격임)가 이곳이어서 부산면의 명칭이 유래되었다고 한다.
또 내동 마을에는 서당골과 반자골이 있다. 서당골은 몰탄바위 밑에 반야암(般若菴 부산면 내안리 산28-1번지)이라는 절이 있었는데 이절이 폐사 되자 영광김씨 서재로 운영되면서 서당골이라 불렸다 한다. 그 후 소실되어 우물과 주춧돌, 깨어진 기왓장이 세월을 반추하고 있다.
반야암(般若菴)이 있는 반자골은 원래 반야골이었으나 반자골로 되었다는 설이 있고, 어떤 이는 몇 십 년 전까지 천수답인 논다랑이에서 거둔 곡식이 반작(半作)이나 밖에 안 되어 반작(半作)골이었을 거라 말하기도 한다.
그렇게 이 내동마을을 감싸고 있는 산이 수인산(561m)이다. 장흥과 강진의 경계를 이루며 그 높지 않지만 웅장하고 오묘한 산세를 이루고 있다. 산 정상에는 산성이 있다. 이 산성은 고려 말부터 조선말까지 왜구가 침략할 때마다 주민들의 피난처로 이용되었다.
<수인산 병풍바위와 만근암)
<수인산과 노적봉>
<홈골의 적벽>
옛날 장흥군 용산면 억불산 골짜기에 금술 좋은 젊은 부부가 살고 있었다. 농사를 지으면서 평화롭게 살고 있었으나 남편은 늘 농부로서 만족하지 못하였다. 그러던 중 부인과 상의한 끝에 산에 올라가 10년 동안 공부하기로 결정하고 억불산의 북서쪽에 있는 수인산 중턱에 올랐다. 공부에 열중하던 남편은 옥녀봉에서 내려오는 선녀에게 반해버리고 말았다. 남편은 선녀를 꾀여 수리봉 밑에 살림을 차리고 부인 몰래 행복한 나날을 보냈다. 그러던 중 선녀가 임신을 하여 고기가 먹고 싶다고 했다.
남편은 공부를 까맣게 잊은 채 수리봉 아래 마을에 내려가서 닭을 훔쳤다. 닭을 들고 산에 오르던 젊은이는 신의 노여움을 받아 벼락을 맞고 돌이 되어 버렸다. 이 돌을 ‘부암(夫巖 반자골의 부암이다)’이라 부르게 되었다. 위에서도 부암 이야기를 잠깐 했는데, 이렇게 선녀를 홀딱 반하게 한 영험 있는 바위가 바로 부암이요, 만근(남근)바위인 것이다. 그러니 그 효험(效驗)을 의심해서는 결코 아니 될 것이다. 어쨌든 그 때 남편이 마을에서 훔쳤던 닭은 '계구암'이 되고, 젊은 남편과 선녀가 밀월을 즐기기 위해 둘러쳤던 병풍은 '병풍바위'가 되었다 한다 지금도 수인산 중턱에는 부암(남근석), 계구암, 병풍바위, 수리봉, 옥녀봉 등의 바위가 4Km, 10리 안팎에 널려있다.
또 수인사 부근 '홈골'이라 부르는 골짜기 밑에 ‘쌀남바위’가 있다. 이 바위에는 작은 구멍이 있어 수인사 승려들은 그 쌀이 충분하지는 못할지언정 식생활은 근근이 이어갈 수 있어서 오로지 수도에만 전념할 수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 게으르고 탐욕이 넘친 중이 쇠꼬챙이로 쌀바위의 구멍을 크게 뚫어 버렸다.
그러자 쌀이 한 톨도 나오지 않았고 빨간 피가 흘러내리게 되었다고 한다. 그 후 쌀바위를 비롯 부근의 모든 바위까지도 빨갛게 물들었으며, 이곳을 적벽(赤壁)이라 부르게 되었다 한다. 적벽은 흔히 볼 수 없는 붉은 바위벽으로 수인산의 으뜸가는 풍광이다.
한편 장흥 억불산에서 남편이 공부를 끝마치고 성공해 돌아오기를 기다리던 부인은 10년의 세월이 흘러도 소식이 없자 산위에 올라 수인산을 바라보다 그만 바위가 되었는데, 그게 또 하나 보태어진 망부암(며느리바위)설화다.
<가지산 보림사>
수인산에서 다시 북쪽으로 가면 인도와 중국의 가지산과 닮은 가지산((迦智山511m) 아래 보림사가 있다. 보림사가 중심이 됐던 가지산문은 고려조의 구산선문 가운데에서 가장 두드러진 산문이었다. 삼국유사를 쓴 일연국사도 가지산문의 문도였는데 오늘 날 조계종의 모태라고 한다.
이러한 역사로 국보와 보물 등 귀중한 문화재가 많다. 삼층석탑 및 석등은 국보 제44호다. 통일신라시대에 건립된 것으로, 남북 두 탑이 마주서 있고, 가운데에 석등이 있다. 두 탑의 구조 양식이 서로 같고 아름다운 신라식 일반형의 탑이다. 철조비로자나불 좌상은 국보 제117호로 대적광전에 모셔져 있으며, 신라 헌안왕 2년(858년) 장사현 부수 김언경이 사재로 쇠 2,500근을 사서 만들었다는 기록이 불상의 왼팔 뒤에 새겨져 있다. 동부도는 보물 제155호, 보조선사 창성탑은 보물 제157호로, 화강석이며 신라 헌강왕 10년(884년)에 세워졌다. 보조선사 창성탑비는 보물 제158호로 역시 화강석으로 884년에 세워졌고, 귀부 비신 이수가 모두 갖추어져 있다. 서부도는 보물 제156호로 통일신라시대에 만들어졌으며 화강석이다. 목조 사천왕상은 보물 제1254호다. 그밖에 대웅전(조선조 초)과 여러 점의 사천왕 복장도 귀중한 문화재다.
한국전쟁 때는 우뚝 솟은 다섯 봉우리의 이 가지산이 빨치산 전남도당의 활동무대이기도 했다. 또 이곳에 방랑시인 김삿갓의 시비가 있다. 삿갓 선생이 이곳을 지나 함평의 용천사로 간 흔적이다.
<부용산>
이번엔 장흥읍 소재지에서 남동쪽으로 가본다.
부용산(芙蓉山609m)은 장흥읍 소재지에서 억불산을 어깨로 보며 남동쪽으로 국도 23호선을 따라가다 14.6km 즈음에서 용산면사무소 왼쪽담장 쪽으로 우회전하여 운주마을에서 오른다. 부처가 솟을 산이라 하여 불용산(佛聳山), 약초가 많다하여 약다산(藥多山)이라고도 한다. 부용산은 1894년 갑오농민전쟁시 전봉준 장군과 쌍봉을 이루는 이방언 장군을 따르는 장흥인(長興人)들이 최후 격전지인 장흥석대들 전투에서 패한 뒤 이곳에서 끝까지 항거하다 일본군과 관군에 의해 전멸당한 피맺힌 한을 간직하고 있다. 그 이전 임진왜란으로 거슬러 가면 이맹(李孟)이란 장수가 골짜기 어귀에 서 있다가 들어오는 왜적을 모조리 활로 쏘아 죽여서 민초들의 안전을 지켜주었는데 이곳이 바로 지금의 장구목재다.
이 호국의 산 부용산은 골짜기마다 샘(감로수)이 솟아 만병에 효험이 있고, 온갖 약초에서 풍기는 향기로 수명이 늘어난다고 하는 신묘한 산이다.
<부용산 장구목재>
이 부용산의 이웃 산이 바로 천관산이다.
천관산(天冠山723m)은 지리산, 월출산, 내장산, 내변산과 함께 호남의 5대 명산중 하나다. 산이 기기묘묘한 바위로 이루어져 봉우리마다 그림처럼 솟아있다.
아기바위, 사자바위, 종봉, 천주봉, 관음봉, 선재봉, 대세봉, 석선봉, 돛대봉, 구룡, 갈대봉, 독성암, 양근암, 아육탑 등을 비롯 수십 개의 기암괴석과 기봉이 울긋불긋 비죽비죽 솟아 있는데, 그 모습이 주옥으로 장식된 천자의 면류관 같다하여 천관산이라 부른다.
정상에서 내려온 산자락이 남해안에 발을 담그는 다도해와 영암의 월출산, 장흥의 제암산, 광주의 무등산이 한눈에 들어온다. 정상의 억새밭이 5만여 평으로 장관이다. 월출산 보다 작지만 월출산에 버금가는 기암괴석의 산으로 매년 가을 산 정상 연대봉에서 ‘천관산억새제’가 열린다.
가끔 흰 연기와 같은 이상한 기운이 서린다고 하여 신산(神山)이라고도 하는데 천관사, 탑산사, 장안사를 비롯한 많은 절터와 석탑·석불 등의 유적이 남아 있다. 또 이곳의 장천재(長川齋1372년 창건)는 존재 위백규(存齋 魏伯珪)선생이 후배들을 가르치던 곳이다. 장천재 입구의 한 그루 소나무는 그 멋진 모습이 능히 학문에 매진하는 자들의 아름다운 모습에 겹친다.
<장천재의 소나무>
장흥의 산 이야기가 많이 길었다. 여기서 솔직히 고백하거니와 필자가 오른 산은 사자산, 제암산, 천관산 등 세 산뿐이다. 억불산은 너무 습하고 더운 날이어서 편백숲에서 헐렁헐렁 보내버렸다. 가지산은 보림사와 그 계곡으로 만족했고, 수인산 역시 아랫마을에서 눈과 맘만 올라갔다 내려왔다. 부용산, 삼비산 역시 그 어깨를 스쳐 지나는 것으로 만족했다. 하지만, 장흥의 산들을 앞으로 시간을 두고 다 둘러볼 셈이다.
억만년 세월을 내려다본 산이다. 언젠가 필자도 그곳으로 갈 것이다. 서두를 필요 뭐 있을까만, 장흥에 와서는 산만 보고 가도 큰 복을 받은 셈이다.
<천관산 양근암>
<천관산 억새>
그렇게 마음 다짐을 하며 이번엔 장흥읍을 가로 지르는 탐진천의 물축제를 떠올린다.
물 축제는 영암 금정과 장흥 유치의 경계에 솟은 국사봉(國師峰613m)에서 발원해 51.5Km를 흐르며 장흥과 강진의 들녘을 적셔준 뒤 남해로 흘러가는 탐진강 일원에서 이루어진다. 여름철 축제로는 최고의 잔치가 아닌가 싶다. 필자가 정남진 물축제 행사 때 방문했던 것은 2010년이었는데, 각종 놀거리, 볼거리가 풍부했다. 특히 토요시장에서 장흥의 특산물인 한우와 표고버섯을 맛보고, 여러 가지 생약초를 전시한 전시관을 둘러본 일 등이 인상 깊었다. 장흥 한우가 국내의 대표적 한우로 자리매김하는 계기가 된 것도 이 축제의 영향이 컸다고 여겨진다. 뜨거운 여름 날 정남진의 고을 장흥의 물축제에 아이들과 함께 가보기를 권유해 드리고 싶다.
<물축제>
<탐진강을 내려다보는 창랑정>
이어 장흥의 빼어난 몇 인물을 찾아뵌다.
먼저 기행서경가사의 효시를 이룬 관서별곡을 지으신 기봉(岐峯) 선생이시다. 사자산 기슭 장흥군 안양면 기산리 마을은 관서별곡의 기봉 백광홍 선생의 고향이고 선생을 모신 기양사(岐陽祠)가 있다. 사자산 아래 억불산을 바라보며 수문포 쪽으로 툭 트인 기양사가 있는 기산마을은 옛 정취가 지금도 남아있는 남도 땅의 전형적인 토속 마을이다. 기양사 들머리에 있는 안내판의 글을 그대로 옮겨 본다.
<기양사. 오른쪽 뒷산이 사자산>
<기양사>
<기양사>
기봉 백광홍(白光弘 1522-1556) 선생의 본관은 수원이고 자는 대유이며 호는 기봉이다.
1549년(명종4년)에 사마양시에 급제하고 1552년에 문과에 등재하여 홍문관 정자에 임명되었다. 그 해 성균관에서 문신들이 재주를 겨룰 때 ‘동지(冬至)’라는 부(賦)를 지어 장원을 하여 명종 임금으로부터 선시 10권을 하사받아 지금까지 전한다.
1555년(명종10년)에 평안도 평사가 되어 관서지방의 백성들의 폐해를 보살피면서 그곳 향촌의 서정과 자연풍물을 시문으로 노래하던 중 ‘관서별곡(關西別曲)’을 지었다.
가사는 당시 한문으로 사상과 감정을 표현하던 조선 중기의 일반적인 틀에서 벗어나 우리말과 우리 글로 그리고 우리 가락으로 표현된 문학예술 양식의 하나이다.
선생의 문집인 기봉집에 전하며 기봉선생이 왕명을 받들어 평안도 평사가 되어 임지로 떠나는 심정과 관서지방의 삶과 정취, 자연풍광의 아름다움을 174구의 한글가사로 표현한 작품으로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하나의 이정표를 세운 작품으로 평가되고 있다.
‘관서별곡’은 송강 정철이 지은 ‘관동별곡(關東別曲)’보다 무려 25년을 앞서 지은 작품으로 당시 문인들에 의해 많이 애송되었다.
특히 송강의 관동별곡은 구성형식과 표현기법이 기봉선생의 관서별곡을 모방한 작품으로 그대로 확인 되었다.
또한 관서별곡은 우리 장흥의 선비들에게도 많은 영향을 주어 ‘장흥가단(長興歌壇)’을 이루는 바탕이 되었다.
천관산 등산로 들머리의 장천재(長川齊)는 500여 년 전 장흥 위(魏)씨 문중이 골짜기 초입에 있던 암자를 헐어내고 지은 문중사우(門中祠宇)로, 존재(存齋) 위백규(魏伯珪1727∼1798) 선생을 비롯해 여러 학자들이 수학한 곳이다.
현재도 수령 600여년의 해송인 태고송이 수호신처럼 지키고 있는 장천재는 대나무숲이 무성하고 드문드문 짙은 암록색의 동백나무들이 봄을 그리고 있다.
존재 위백규 선생은 1727년(영조 3년)에 전라도 장흥부 천관산 기슭의 계향동(현재 관산읍 방촌리 계춘동)에서 진사 위문덕과 평해 오씨 사이에 장남으로 태어났다. 그의 부친의 흰 용이 뜰아래 우물로 내려온 태몽을 꾸었는데 그래서 어릴 적 이름이 룡이었다. 어려서부터 성인처럼 어진 사람이 되겠다며 마을에서 굿을 하거나 광대잡패가 와도 관심을 보이지 않았다 한다.
그가 1758년에 저술한 세계지리서이자 팔도지리서라 할 수 있는 환영지(寰瀛誌)는 김정호의 대동여지도(1861)보다 103년이나 앞선 저술이다. 지리서와 천문지도의 병합이라 할 수 있는 환영지는 산과 내, 군읍의 경계, 각 지방 특산물, 토양의 성질 등 광범위한 지지(地誌)이다
또 이곳 천관산의 인문지리서라 할 수 있는 지제지(支提誌)는 천관산의 오묘한 아름다움을 널리 알리는 데 크게 공헌했는데, 천관산의 6개 동천, 89암자를 포함해 등허리에 솟아 있는 자그마한 바위 하나에 이르기까지 그 이름과 유래를 밝혀 놓았다.
정약용의 목민심서보다 50년 앞서서 사회개혁을 부르짖은 정현신보(政絃新譜)는 국가와 사회가 버려야할 습성들에 대한 통렬한 지적이 담겼는데 32세에 시작하여 65세에 이르러 마침내 폐단을 고칠 방도 32조목을 제시하였다.
존재라는 호는 그가 37세에 중광시에 장원 합격하고 오는 길에 그의 스승인 병계 윤봉구(尹鳳九1683~1767)선생에게 들렸을 때 존존재(存存齋)라는 세 글자의 판액을 받은 것에서 기인했다고 한다.
또 한 가지 일화로는 선생의 생가 서실 앞에 옥련정이라는 연못이 있는데, 이곳의 개구리 울음소리가 어찌나 시끄럽던지 선생이 부적을 써서 던졌다 한다. 그러자 개구리 소리가 그쳤고, 지금도 개구리를 잡아넣으면 뛰쳐나온다고 한다.
그는 18세기 향촌사회에서 일생을 보낸 전형적인 향촌사림으로 사회현실의 모순을 비판하고 향촌사회의 자율성을 모색했다.
위백규는 18세기의 호남 3천재로 불린다. 순창의 실학자 여암 신경준(旅庵 申景濬 1712~1781), 고창의 이재 황윤석(頤齋 黃胤錫1729~1791)과 더불어 존재 위백규다. 이들 3대 천재 실학자들이 조선 후기의 실학이라는 학문을 찬란하게 꽃피운 것이다.
‘천관산의 절에 이르자
공중으로 사다리 놓으면 하늘 끝에 오르겠네
인간들이 사는 세상 굽어보니
3만리에 티끌이 끼었네.’
(發跡天冠寺 梯空上春昊 俯視人間世 塵埃三萬里)
위 시는 아홉 살의 어린 위백규가 어른들을 따라 천관산(天冠山)에 올라서 지은 시다. 어린이의 시로는 통이 크기 짝이 없다. 될성부른 나무는 떡잎부터 알아본다고 원대한 꿈과 뜻이 큰 사람이었음을 어린 시절부터 알 수 있다.
그의 문학관은 철저히 재도론적(載道論的) 입장이었다.
여기서 재도론은 ‘문(文)이란 도(道)를 싣는 도구일 뿐이다.’ 즉 도를 중시하고 문을 경시하는 경향을 말한다. 내용이 중요하면 형식은 크게 중시될 것이 없다는 주장이다. 이들을 도학가(道學家)라 한다. 이에 반해 ‘문은 반드시 도와 함께 갖춰져야 하며 문이란 것은 도를 관통하는 도구다.’며 문(文)을 도(道)와 함께 중시하여 내용도 내용이지만 글의 형식도 중시되어야 한다는 주장이 관도론(貫道論)이다. 관도론을 주장한 유명한 사람으로 소동파(蘇東坡) 시인이 있고 이들을 고문가(古文家)라 한다. 그러니까 재도론과 관도론은 글의 내용과 형식의 차이, 중요성을 논하는 이론들이다.
또 위백규는 현실비판적 문학을 높게 평가했고 그의 작품도 궤를 같이 한다.
‘보리’ 연작시와 ‘연년행(年年行)’ 연작, 구황식물 연작 등의 한시, ‘농가구장(農家九章)’의 시조 9수, 그리고 가사 ‘자회가自懷歌)’ 등은 모두 농촌사회의 현실을 반영한 시들이다.
문집으로는 ‘존재집’, 그의 글을 모두 모아놓은 ‘존재전서(存齋全書)가 있어 그의 문학적 향기에도 빠져볼 수 있다.
이밖에도 동학혁명사에 길이 빛나는 남도장군 이방언(李芳彦1838~1895)은 조선초기 대재학을 지낸 이문화(李文和)의 19대손으로 1838년 장흥군 용산면 묵촌리에서 태어났고 본명은 민석(民錫)이다.
장군은 동학에 들어가 교구장이 되어 포교하다가 1894년 동학혁명이 일어나자 이인환 이사경등과 장흥 거병을 상의하고 1,000여명을 이끌고 전남북 일대에서 활약하면서 장태장군(장성 황룡강 전투에서 닭장태를 방어무기로 고안하여 승리를 거둔 데에서 연유)이라는 별호와 동학군의 전남북 화합시 남군 대표로 활약하여 남도장군이라는 별호를 얻었다.
<김재계 선생>
항일투사 성암(聲菴) 김재계(金在桂1888~1942)는 장흥군 회진면 신상리에서 김규현의 장남으로 태어났다. 1938년 멸왜기도사건(滅倭祈禱事件)의 주모자로 몰려 모진 고문을 당하였다. 선생은 옥고로 인해 1942년 서울에서 52세의 나이로 조국의 광복을 보지 못하고 일생을 마친 분이다 평생을 천도교를 통해 민족정신을 일깨우고 민중의 교화와 민권의 신장에 헌신함은 물론 조국의 자주독립을 쟁취하기 위해 목숨을 바친 거룩한 분이다.
<이청준 생가>
<천년학 촬영지>
장흥은 문학의 고장이다. 특히 소설문학의 거장들이 이 고장 출신에 많다. 천년학으로 널리 알려진 소설가 이청준(李淸俊 1939.8.9~2008.7.31) 선생은 대덕면 진목리(현 회진면 진목리)에서 태어나 삶의 마지막 순간까지 펜을 놓지 않았던 한국 문학의 독보적인 인물이다.
녹두장군의 송기숙(宋基淑) 선생은 1935년 7월 4일 전남 장흥군 용산면 포곡리에서 아버지 송복도씨와 어머니 박복단씨 사이에서 태어났다.
선생은 유신정권 말기인 1978년 6월 27일 전남대 교수 10명과 함께 교육민주화선언인 ‘우리의 교육지표’를 발표했다가 긴급조치 위반으로 구속되어 징역 4년 자격정지 4년형을 선고 받고 광주와 청주교도소에 1년여 복역하였다. 이로 인해 교수직을 박탈당했고, 1980년 광주항쟁이 일어났을 때에는 직접 항쟁 중심에 뛰어들어 광주항쟁수습위원으로 나섰다가 구속되어 5년형을 선고받고 옥고를 치르기도 했다. 이 시대의 굴곡과 아픔을 함께한 살아있는 증인이요, 소설가라고 할 수 있다.
이밖에도 한승원, 이승우, 김녹촌 선생 등 현존하는 쟁쟁한 장흥출신 문인들이 창작에 몰두하고 있다.
<송기숙 선생과 생가>
장흥 나그네는 이제 발걸음을 회진항으로 향한다. 회진읍에 들어서면 오른편 산에 쌓여진 성벽이 눈길을 잡는다. 최근 복원된 ‘회령진성’(도 문화재자료 144호)이다. 포구를 내려다보는 높은 위치에 조성돼 있어 마을과 바다가 한눈에 시원스럽다.
회진은 조선시대에 회령포라 불렸다. 충무공 이순신 장군이 백의종군으로 임지에 가던 중 다시 삼도수군통제사를 제수 받았다.
장군은 1597년 8월 19일(음력) 장흥 회령포(회진)에 와서 전선(판옥선) 12척을 인수한다. 경상우수사 배설이 칠천량 전투초기 전장에서 도망하는 바람에 역설적으로 살아남은 전선들이었다. 배를 인수한 장군은 해남 이진(梨津)→해남 어란포→진도 벽파진으로 진영을 옮긴 뒤 9월 16일(음력) 해남, 진도사이 ‘울돌목’에서 서해로 진출하려던 일본 수군을 격파한다. 바로 판옥선 13척(회령포의 12척과 해남 우수영의 1척)으로 왜선 133척을 궤멸시킨 명랑대첩이다.
당연히 임진 정유왜란 당시 이곳 회진 고을의 많은 사람들이 참전하였다. 해안마을 주민들은 왜구를 피하기 위해 내륙으로 갔지만, 이곳 회진 분들은 중앙정부의 퇴거명령에도 응하지 않고 왜구와 싸웠다. 회진(회령포)의 용맹스런 민초들과 전선 12척이 왜란의 전세를 뒤집는 발판이 된 것이다.
그러고 보면 이곳 회진 사람들이 조선을 살렸다고 할 수 있는 것이다. 지금은 남해의 한적한 포구지만, 도탄에 빠진 나라를 구한 위대한 선열들이 살았던 고을이다.
<회진항과 노력도를 잇는 회진대교>
<회진항>
‘돌쇠, 마당쇠, 삼돌이, 바우, 갑돌이, 쇠돌이, 떡쇠….’ 이런 촌스런 이름의 우리의 할아버지들이, 그리고 그분들을 사랑하고 아들 딸을 낳아준 ‘삼월이, 춘심이, 달래, 월녀, 언년이, 부엌데기….’ 등 우리 할머니들이 바로 그 위대한 분들이다. 애비가 강탈한 장물로 호의호식으로 살아온 박근혜 같은 족속들이 감히 함부로 불러서는 안 될 고귀한 이름이다. 갈매기 끼룩거리는 회진항 바닷가를 거닐며 그날의 할아버지 할머니들을 위해 고개를 숙인다.
회진항의 보물섬이 노력도다. 노력도는 남해쪽에서 제주도를 가장 짧은 시간에 갈 수 있는 항구다. 이제 연륙이 되어 회진항의 외항이 된 노력도와 함께 회진항이 다시금 옛 영화를 되찾았으면 한다.
그렇게 기원하며 나그네는 다시 길을 떠난다. 호남가가 부르는 삼태육경의 고을 순천으로 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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