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1

운당 2012. 9. 30. 14:35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1

 

삼정승 육판서(三台六卿/삼태육경)는 하늘의 뜻(順天心/순천심)을 따르고, 지방의 모든 수령(方伯守令/방백수령) 들은 백성을 편안(鎭安/진안)하게 다스리는 구나.

 

삼태육경(三台六卿)은 순천심(順天心)이요

방백수령(方伯守令)은 진안민(鎭安民)이라.

 

높은 벼슬아치들은 하늘의 뜻을 따라 정치를 하고 지방의 낮은 벼슬아치들도 백성을 평안케 하는 구나.

 

그런 세상이면 오죽 좋을까? 순천은 그 하늘의 뜻과 백성의 평안을 기원하는 고을이다.

호남고속도로를 산나게 달려 순천으로 들어선다. 순천은 2003년부터 2년간 필자인 나그네가 살았던 고을이다. 호남가 가사처럼 순천은 하늘의 복을 받아 들이 넓고, 물이 좋으니 쳐다만 봐도 마음이 평안해지는 곳이다.

사람이 마치 살기 좋은 도시가 인구 2~3십만이라 하니, 순천이 또 딱 그런 도시다.

2년간 살면서 아름다운 경치에 취하고, 다양하고 맛있는 음식에 취하고, 좋은 사람들과 교류하며 취했으니 필자로서는 지금도 그 때가 그리운 3(三醉)의 고을이다.

 

<순천과 동천-시청에서 빌려온 사진>

사람이 항상 긴장하고만 살 수 없다. 때로는 맘을 풀어놓고 마음 가득 아름다움을 받아들이는 여유도 필요하지 않을까?

이따금 순천(順天)을 순()하게 흐르는 동천에 나갔다. 해질녘 동천을 거닐며 노을을 받은 물살에서 뛰노는 물고기들, 강안의 풀숲과 억새, 왜가리를 비롯한 물새들의 날개 짓, 동천 벽에 그려진 벽화를 보면서 객지생활의 외로움을 달래고 마음의 평화를 얻었다.

 

<순천만>

동천을 내려다보며 죽도봉이 솟아있다. 4백 년 전만 하더라도 전죽(箭竹화살대)밭이었고, 생김새가 마치 섬()과 같아 죽도(竹島)라고 했다 한다.

이곳 죽도봉 공원에는 소를 형상화한 특이한 탑이 있다. 바로 강필리(姜必履 1713~1967) 선생의 백우탑이다.

강필리 선생은 숙종 39(계사 1713) 충남 당진에서 출생하였다. 문과에 올라 교리, 청도군수, 순심어사(巡審御使) 부승지, 호조참의, 순천부사, 동래부사, 대사간 등을 역임하였다.

순천부사 때(1763) 연이은 흉년으로 기근이 심한데다가 우역(牛疫)이 유행하여 농우의 8할이 폐사(斃死)하여 농사를 짓지 못하게 되었다. 이에 선생은 자신의 녹봉(祿俸)과 사재를 털어서 농우 32마리를 사서 농가에 분배 사육케 했다. 부역(賦役)을 줄이고 세금을 감하는 등 선정(善政)을 펼쳤다.

수년 후 농우가 150마리로 늘어나니 순천 부민(府民)들이 백우비(百牛碑)를 세워 송덕(頌德)했으나 홍수로 비()가 유실(流失)되었다. 1991년 전남도와 순천시의 보조(補助)와 지방 유림(儒林) 유지(有志) 및 강()씨 문중 등의 헌성(獻誠)으로 순천시 죽도봉(竹島峰)공원 연자루(燕子樓) 옆에 백우비(百牛碑)와 백우탑동상(百牛塔銅像) 등을 복원하여 선생의 유덕(遺德)을 다시 기리게 되었고 강문(姜門)에서는 그 조형물(造形物) 일체를 순천시에 기증하였다.

또 선생이 동래부사(1764)일 때다. 조엄(趙曮)이 일본통신사로 갔다가 대마도에서 고구마를 가져와 동래지방에 심게 한 일이 있었는데 월동방법을 자세히 몰라 모두 동사(凍死)하고 말았다. 이에 선생은 대마도(對馬島) 사람에게 다시 종근(種根)을 구하여 동래와 절영도에 심게 하고 재배법을 기록한 감저보(甘藷譜고구마)’라는 책자를 발간함으로써 이후 널리 재배되었다.

이런 공로로 동래부사에서 대사간(大司諫조선시대의 사간원의 으뜸 벼슬. 품계는 정3품으로, 임금에게 정사의 잘못을 간()하는 일을 맡았음)으로 영전하였다. 영조 43(정해, 1767)55세로 별세하였다. 묘는 경기도 시흥군 군자면(현 시흥시 군자동) 백마산에 있다.

요즈음에도 이런 훌륭한 지방관이 있을까?

하늘의 뜻을 받들어 정치를 하는 순천심(順天心)의 고장에서 그런 생각을 한다는 것이 우습고, 이게 한국의 현실이다. 쥐새끼에 이어 닭그네로 그 작태가 이어지는 한 하늘에 별 따기처럼 요원한 희망일지도 모른다.

그 죽도봉도 자주 찾았다. 그리고 벚꽃 피는 봄 날 조곡동 쪽에서 만난 주택가 골목길의 능수벚나무의 화사함을 잊을 수가 없다. 바람이 불지도 않았는데 활짝 핀 늘어진 꽃가지를 살랑살랑 흔들던 모습은 마치 꿈속의 아름다움으로 이따금 마음까지 물들인다.

그 뒤로도 능수버드나무를 닮은 벚나무를 많이 봤지만, 그 조곡동 주택가 길에서 만난 능수벚나무처럼 완벽하게 아름다운 나무는 보질 못했다. 순천을 생각할 때 떠올리는 아름다운 추억이다.

 

<백우탑과 강필리 선생>

갈대숲과 철새, 그리고 갯벌 친구들의 순천만, 싱싱한 횟감이 좋은 와은해변과 그 해변을 품은 갯벌에서 잡아 올린 짱뚱어탕에 톡 쏘는 잰피(초피나무 껍질)가루를 넣어 소주 한 잔을 곁들이던 추억도 이따금 꺼내보는 즐거운 추억이다.

 

<순천만-시청에서 빌려온 사진>

어야! 순천에서는 인물자랑 말소.”

맞아. 순천하면 인물이제.”

6~70년대를 젊은 나이로 살았던 사람까지는 순천의 인물 자랑에 대해 대화가 통할 것이다.

 

요즈음은 개그맨들의 말이 전파를 타고 하루 이틀이면 유행어가 된다.

물론 예전에도 유행어가 있었다. 전파속도가 실시간인 지금에 비해 형편없이 늦긴 했겠지만 대갓집 사랑방이 그 유행어의 산실이었다. 그 대갓집 유행어가 다시 시골의 사랑방으로 옮겨지면서 인구에 회자되었다고 본다. 특히 대한제국말 대원군 사랑방에 들락거리는 전국의 유생, 나그네들이 온갖 유행어의 생산자이고 전달자였다고 한다.

 

당시 전라도에도 유생들 입에서 나온 전라도 팔불여(八不如)’가 인구(人口)에 회자(膾炙)되었다. 불여(不如)만한 것 없다, 이 제일이다란 뜻으로 빼어난 것이 많지만 그 가운데서도 돋보일 때 불여를 사용한다. 한 마디로 자랑하는 말이다.

그 팔불여는 문불여장성(文不如長城문장가는 장성만한 곳이 없다), 관불여전주(官不如全州관리는 전주 관찰사만한 것이 없다), 인불여남원(人不如南原인물은 남원만한 곳이 없다), 지불여김제(池不如金堤저수지는 김제 벽골제만한 것이 없다), 강불여곡성(江不如谷城강은 곡성만한 곳이 없다), 산불여구례(山不如求禮산은 구례만한 곳이 없다), 결불여나주(結不如羅州경지 면적은 나주만한 곳이 없다), 지불여순천(地不如順天지역이 넓기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 지주가 많기는 순천만한 곳이 없다)이다.

그러니까 순천은 지역이 넓고, 따라서 지주가 많았다.

그런데 이런 말도 있다. ‘여수에서 돈 자랑 말고, 벌교에서 주먹 자랑 말고, 순천에서 인물 자랑 말라.’고 했다.

 

 <동천>

<동천 벽화>

땅이 넓고 비옥하니 돈 많은 사람도 많고, 따라서 훌륭한 인재가 많이 배출되었을 거다. 또 잘 먹어 신체상태가 좋고 온화한 기후의 영향으로 훤칠하고 아리따운 선남선녀도 많았을 게 뻔한 이치다.

또 어떤 사람은 순천에서 옷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인물 자랑하지 말라는 말로 바뀐 거라고 한다. 돈이 많으니 옷을 잘 입었을 거고, 옷이 날개가 됐다는 부러움 반, 시기와 질투가 섞인 말일 것이다.

 

지불여 순천이 땅 자랑인데도 인물 자랑하지 말라고 했다.

그래서 겉으로 드러난 그 말에 우리는 좀 더 깊이를 더해 들여다 볼 필요가 있다.

기름진 땅이 넓어 지주들이 많아서 좋다는 말은 거꾸로 소작인인 백성들은 수탈과 착취에 시달린다는 말도 된다. 지주야 손 안대고 코 푸는 식으로 거둬들인 곡식으로 잘 먹고 잘 살지만, 소작인들의 삶이란 게 그 날이 그날이고, 작년 빚 올해 갚고 올해 빚 내년에 갚아야 하니 허리가 휘고 고픈 배 움켜쥐어야 하는 고달픈 삶의 연속인 것이다.

한 부자가 열 고을 사람을 주리게 한다는 말은 그래서 생긴 말이다.

 

일제강점기 때 순천에는 호남 삼대갑부로 이름 날린 김사천(金泗川)을 비롯하여 천석군(千石君)만도 열이 넘었다 한다. 그들이 좋은 옷을 입고 기름기 번질거리는 얼굴로 거리를 활보하면 누구든 그들의 처지가 부러웠을 것이다. 또 인물 자랑 하지 말라는 말이 그 지주 자녀들의 호의호식과 으스대는 행동에서 나왔을 지도 모른다.

인물 났어!’ 라는 말은 아이고 이 인간아! 인간아!’와 같이 비아냥 거리는 말로도 쓰인 것이다. 더하여 음식 사치와 옷 사치가 많았다고 순천을 사치골이라 불렀다고도 한다.

 

<순천 왜성-시청 사진>

또 다른 해석은 이곳의 지리적 이유를 든다. 전라선과 경전선 철도가 교차하고 호남과 남해 고속도로의 시발지인 순천은 교통과 교육의 중심지였다. 순천 인근의 성적이 우수한 학생들은 예외 없이 순천으로 유학을 왔다. 여수, 여천, 광양, 구례, 곡성, 보성, 고흥 등 각자의 고향에서 내로라하는 우등생들이 순천에 모였으니 웬만해선 공부 자랑 인물 자랑을 하기 힘들었을 게다. 그들이 사회적으로도 출세가도를 달려 이 사회의 지도자들이 됐을 테니, 순천에서 인물자랑 말라는 말은 맞는 말인 것이다.

 

1960년대에 순천여고 졸업생이 미스코리아 진에 뽑힌 적이 있다.

그 때야 진짜 자연산 미인으로 순천의 큰 자랑거리였으리라. 하지만 요즈음에는 미남, 미인 아닌 사람이 없다. 그래서 부모의 본모습 얼굴을 알려면 태어난 자식의 얼굴을 봐야한다는 우스개 말이 있다. 뱃속에서 막 나온 자식을 성형할 수는 없을 테니 말이다. 성형 만연, 그러니까 인조미남, 인공미인이 자연산보다 많음을 비꼬는 말이다.

 

그렇게 한말, 현대초인 1920년대부터 1960대까지는 지역과 사회를 풍자하는 말들이 만들어지고 은근히 자랑거리가 되기도 했다. 하지만 요즈음은 어떤가? 빌어먹을 망국적 지역감정, 캐캐묵은 이념논쟁인 빨갱이 타령으로 지역과 사회를 매도하는 말만 난무하니, 어제보다 못한 오늘이라 아니할 수가 없다.

 

<팔마비> 

순천에서 꼭 한군데 가볼 곳, 반드시 봐야할 것이 있다.

바로 팔마비다. 이 팔마비는 정약용의 목민심서를 행동으로 보여준 목민관의 표상이기도 하다.

노동자 하루 시급도 모르는 정치인, 유아 무상보육을 약속한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 번복하는 행정가들이 본받아야 할 비이기도 하다.

있는 사람이 더한다는 개그맨의 한탄어린 하소연이 실소를 짓게 한다. 왜냐하면 그게 사실이기 때문이다. 어려운 이웃돕기 성금을 내는 사람들은 부자들이 아니라, 가난한 사람들이 대부분이라고 한다.

아무튼 순천의 팔마비는 어떤 유래가 있을까?

 

비석은 순천시 영동 우리은행(옛 승주군청) 앞 도로변에 위치하고 있다. 비의 전면에는 팔마비(八馬碑)라는 글자가 양각되어 있으며, 비의 후면에는 팔마비의 건립내역을 적은 내용이 음각되어 있지만, 마모되어 내용 판독은 힘들다. 건립 배경은 고려사신증동국여지승람에 나와 있다.

고려사34의 열전 최석(崔碩)’의 사료에 다음과 같이 기술되어 있다. ‘승평부에서는 태수(太守)가 바뀌어 돌아가면 말 8필을 주고, 부사(副使)에게는 7필을, 그리고 법조에게는 6필을 주되 마음대로 고르게 하였다. ()이 임지를 떠남에 읍인들이 말을 가져와 좋은 것 고르기를 청했다.

이에 석이 웃으며 말하기를 능히 서울에만 이르면 족할 것인데 말을 골라서 무엇 하겠는가.’라고 하였다.

이윽고 집에 돌아간 석이 타고 간 그 말들을 되돌려 보냈으나, 고을사람들이 받지 않았다.

석이 다시 말했다. ‘내가 그대들 고을에 수령으로 가서 말이 망아지를 낳은 것을 데리고 온 것도 나의 탐욕이다. 그대들이 말을 받지 않는 것은 아마 내가 탐을 내서 겉으로만 사양하는 줄로 알고 그러는 것 아니겠는가.’하고 망아지까지 모두 9필의 말을 돌려주었다.

이로부터 증마(贈馬)의 폐단이 마침내 끊어졌으므로 고을사람들이 그 덕을 칭송하여 비석을 세우고 팔마비라 이름하였다.

이것이 곧 오늘날까지 널리 알려진 팔마비의 유래다. 최석의 목민관으로서의 올바른 처신도 본받을 일이지만, 이 비가 지방관의 선정 겸 청덕비의 효시라는 점에서 더욱 큰 의의가 있다 하겠다.

 

오늘도 쥐꼬리 만한 하루 일당에 목숨 걸고, 주야 교대의 노동으로 개인의 즐겁고 편리한 생활은 꿈에도 못 꾸며 젊음을 먼지투성이의 협소한 공장에서 보내는 노동자가 부지기수다.

그럼에도 자신의 사저건립 등 재산증식에 온갖 꼼수를 부리는 소위 대통령이라는 이명박과 그의 졸개들, 수억을 꿀꺽 삼키고도 떡값이니, 뭐니 하며 기름기 줄줄 흐르는 얼굴로 한 가닥 미안함도 모르는 뻔뻔한 인간들은 꼭 이곳 팔마비를 와서 봤으면 한다. 선출직이건 임명직이건 국민의 재산과 생명에 관계되는 위정자들은 필수로 이곳 팔마비를 다녀가도록, 그리고 그 앞에서 청렴을 서약하도록 제도적 장치가 마련됐으면 싶다.

 

<금전산-집들이 옹기종기 있는 곳이 낙안읍성이다. 낙안은 따로 들려볼 곳이다> 

이어 이번에는 순천의 명산 하나를 올라보기로 하자. 바로 금전산이다.

금전산은 승보고찰 송광사(松廣寺)와 태고종의 큰 절집 선암사(仙巖寺), 그리고 쌍향수로 유명한 천자암(天子庵)이 있는 조계산에서 한 지맥이 남쪽으로 뻗어서 일어난 바위산이다. 이 금전산의 옛이름은 쇠산이었으나 100여 년 전 금전산으로 바뀌었다고 한다.

한자의 뜻을 그대로 번역하면 금으로 된 돈 산이다. 그러나 불가에서 유래한 금전산은 부처의 뛰어난 제자들인 오백비구(혹은 오백나한)중 금전비구에서 산 이름을 따왔다고 한다.

금전산은 낙안읍성 뒤에 낙안의 큰 바위얼굴로 우뚝 서 있다. 그래서 정상에 서면 저 아래로 낙안의 들판이 물결치는 비단처럼 펼쳐진다.

 

<천자암 쌍향수>  

하늘의 뜻에 따라 흐르는 물이 역수하지 않고 순리대로 흘러가는 지형을 사람이 살기 좋은 땅이라 일컫는다. 그런 면에서 삼태육경(三台六卿)의 고을 순천은 그 중에서도 가장 살기 좋은 지형인 것이다.

삼태육경(三台六卿)에서 삼태(三台)는 자미궁(紫微宮큰곰자리를 중심으로 170개의 별로 이루어진 별자리)의 주위에 있는 상태(上台), 중태(中台), 하태(下台)의 각각 두 별씩 모두 여섯 개의 별을 가리킨다. 또 삼태는 하늘의 황제인 옥황상제의 궁궐을 말한다. 뜻은 그러하나 사람들은 이 삼태육경을 영의정 좌의정, 우의정의 삼정승과, 이조, 호조, 예조 병조, 형조 공조의 육판서를 가리켰다. 다시 말하여 임금을 빼고 인간이 이룰 수 있는 가장 높은 지위와 영화를 가리킴이다. 그러니까 하늘의 귀한 별들의 명예와 자리를 순리대로 받아들인 땅 순천은 고을 중에서도 가장 고귀한 고을인 것이다.

 

<순천 별량면 대곡리 일대-향토지 사진>

그러기에 기대 또한 크다. 이곳 순천에서, 한국을 나아가서는 세계의 인민에게 평화와 행복을 줄 그런 지도자가 나왔으면 한다.

삼태육경은 순천심이요, 방백수령은 진안민이라. 마음 가득 하늘의 고귀하고 높은 뜻을 받들어 실천하며 순하게 사는 사람들의 순천을 뒤로하고 백성을 평안케 하는 진안으로 발길을 잡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