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16
영원히 높이 번영하리라 고흥
흥양의 솟은 해는
보성을 비쳐있고
아침에 솟아오르는 해(興陽/흥양)가 보배의 땅(寶城/보성)을 비춘다. 흥양이 오늘의 고흥이고 이곳 높이 솟는 땅 고흥의 나로도에 우주선 발사기지가 있으니, 예사롭지 않은 선견지명이다.
이제 해 솟아오르는 고흥에서 그 햇살이 비춰주는 보배로운 땅 보성으로 들어갈 참이다.
먼저 해 높이 솟아오르는 고흥 땅의 풍광과 인심에 젖어본다.
<최근에 조성 된 오마도 간척지 한센인 추모공원>
고흥은 그동안 이런 저런 일로 여러 번 둘러본 곳이고, 어느 곳 하나 놓치고 싶지 않은 멋진 풍광과 멋을 갖춘 고을이지만, 오늘 기행에서는 맨 먼저 오마도 간척지 테마공원으로 간다.
공식 명칭인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을 찾은 때는 2012년 3월 15일, 아가씨의 살결을 거칠게 하는 부드러운 듯 꽃샘가시를 숨긴 봄바람이 부는 날이었다. 낮게 불어가는 그 봄바람에 제법 자란 보리 이파리들이 물결처럼 파도를 일구지만 아직 이삭은 패지 않았다.
고흥 땅 소록도에는 한센병원이 있어 일제강점기 때부터 유독 한센병과 관련된 사연이 많은 곳이다.
이곳 고흥군 도덕면 오마리의 오마간척지 역시 한센인들의 피와 눈물이 서린 곳이다. 간척지 제방을 사이로 남해의 푸른 바다와 간척지의 너른 들이 이제는 말없이 누워 있지만, 그들이 토했던 피눈물의 역사는 지울 수 없다.
이곳에 세워진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은 조성 된지 얼마 안 되어 시설물은 말끔하지만 찾는 이 별로 없어 한적하기만 하다. 규모 역시 작지만 공원 정상으로 향하는 언덕길을 급히 오른 탓인지 이마에 땀이 솟는다. 정상에 오르니 사방이 확 트여 오마 간척지는 물론 소록도와 거금도까지 한 눈에 들어온다.
이 오마도 간척지는 1962년 착공 당시 소록도에 있는 5천여 한센인을 동원하였고 이 간척지가 완공되면 한센인들의 정착지로 제공하기로 약속이 되어있었다 한다.
허나 인근 주민들의 반대로 공사 시작 2년여만에 손과 발이 성치 못한 한센인들의 숱한 인명피해와 노력은 그만 헛수고가 되고 말았다.
당시 개척단 김형주 부단장의 ‘세계적 대 사기극’이라는 피를 토하는 절규가 그곳 병풍처럼 생긴 기념비에 새겨져 그날을 증언하고 있었다. 당시는 516쿠테타로 정권을 잡은 박정희가 국토건설이라는 미명아래 대규모 간척사업을 무분별하게 벌리던 시절이다. 독립군 잡는 일본군 장교로 시작해 국군, 공산당프락치, 516쿠테타, 독재자로 변신을 거듭하다 결국 부하의 총에 비명횡사한 박정희가 한센인을 상대로 세계적인 대 사기극을 벌렸다고 할 수 있다.
<김형주 부단장의 피맺힌 절규-세계적 대사기극이 새겨진 비>
쥐 20(G 20), 死대강(4대강), 한미 FTA, 모두가 일자리 창출이요, 몇 백조의 경제유발 효과가 있다고 씨부렁거리는 쥐새끼 사기꾼 일당들이 이곳에 한 번 와봤으면 한다. ‘아, 내 선배가 저지른 짓이었구나. 이런 기막힌 사기 수법을 진즉 배울텐데’ 하고 무릎을 칠 것이다. 누구 코에서 마늘씨를 빼먹을 놈이란 욕이 있다. 세상에 한센인들을 속여 그들의 목숨을 담보로 사기를 치다니…. 에라이! 똥물에 튀길 년놈들…. 속으로 욕을 하고 남해의 푸른 바다에 그 욕을 씻는다.
추모공원에는 당시 한센인들의 고통스런 노역을 체험해볼 수 있는 체험장, 현장 모습을 알 수 있는 사진이 전시된 테마관, 그리고 성치 못한 몸으로 살인적인 노역을 하는 한센인들의 생생한 모습을 볼 수 있는 조형물이 그 날의 피맺힌 역사를 재현하고 있었다.
그 중 눈길을 끄는 사진 한 장, 앳된 얼굴의 젊은이들이 웃고 있는 모습은 가슴을 더욱 절절히 아프게 했다. 저 청년들, 당시 20대라면 지금은 70대의 노인이 되었으리라. 살고 있을까? 있을까….
<내가 정착할 땅이 생긴다는 생각에 꿈을 가졌던 젊은 환우들-누가 이들의 미소를 빼앗았을까?>
<추모공원에서 내려다 본 오마도 간척지>
고흥은 참 좋은 고장이다. 한마디로 천혜의 터다. 온화한 기후, 제주도며 남해의 주옥같은 섬들을 둘러볼 수 있는 해상교통로, 풍부한 수산자원, 무엇보다 아름다운 풍광과 넉넉한 인심, 그 맛에 흠뻑 취하는 먹거리 등, 꼭 한 번만이라도 일생에 찾아볼 곳이다.
그렇게 오마도 한센인 추모공원을 시작으로 봄나그네는 고흥을 둘러본다.
내친김에 간 곳이 소록도다. 소록도는 일제강점기에 세워진 한센인들의 치료 및 보호소였다. 그러나 그것은 말좋은 허울뿐이고 실제로는 한센인들의 강제노역장으로 자식을 못 낳게 하는 강제 단종시술, 시신유린 등 비인간적인 인권침해와 침탈이 무법으로 자행되던 지옥 같은 곳이었다.
새로 놓여진 소록대교를 건너 맨 먼저 만나는 곳이 수탄장이다. 1950~70년대에 소록도는 섬을 직원지대와 병사지대로 나누어 2km 이르는 철조망을 쳤다.
병사지대에 사는 한센병 원생의 자녀가 태어나면 직원지대에 있는 '미감아 보육소'로 격리시켰다.
한센병 부모와 자녀들의 만남은 한 달에 한 번의 면회뿐이었다. 부모와 아이들은 직원들의 통제하에 솔숲 양 옆으로 나뉘어져 일정한 거리를 두고 마주봐야 했다. 서로를 만질 수도, 안아볼 수도 없는 만남이었다. 거기다 전염을 우려해 자녀들은 바람을 등지고 부모는 바람을 안고 만나야 했다. 자신의 아이를 만질 수도, 안아볼 수도 없는 만남…. 천륜을 가르는 슬픔으로 인해 한센병 부모들의 탄식은 애간장 끊는 듯했다고 하여 수탄장(愁嘆場)이라 불렀던 곳이다.
<대교가 놓인 뒤 소록도의 들머리가 된 수탄장>
<환우와 가족들, 그들의 피끓는 심정을 아는 이 몇일까?>
환자와 가족의 애끓는 만남과 이별의 장소인 그곳에서 해안을 따라 들어가면 한센병원과 유령의 집처럼 을시년스런 일제강점기 때의 시설물들이 그날의 참상을 말없이 증언하고 있다.
소록도 공원의 각종 관상수는 잘 가꾸어졌기로 예부터 이름이 났다. 소록이라는 명칭이 사슴을 지칭하는 거여서 과거에는 사슴을 키우던 축사도 있었지만 지금은 없어졌다. 70년대 초 처음 소록도를 찾았을 때 ‘별유천지 비인간’이라며 스스로를 가리키면서 허탈하게 웃던 원생이자, 공원 사육사이던 사람의 모습이 희미하게 떠올랐다.
보리피리 불며 이곳을 찾았던 시인 한하운(韓何雲, 1919-1975)의 심정도 그러했으리라.
한하운은 보리가 이삭을 쏭긋쏭긋 올릴 무렵 남도 황톳길을 걸어 소록도를 찾았다. 영어로 한센병, 우리말로 나병(문둥병)이라 했던 그 악질 병균이 파먹어 손가락, 발가락이 한 도막씩 떨어져 가는 걸 무심히 바라보며 읊었을 그의 시 ‘보리피리’가 이곳 소록도공원에 남아있다.
그의 시 전라도길이 주마등처럼 스친다
<한하운 시인의 보리피리 시비>
<구라탑>
全羅道 길
― 소록도로 가는 길에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뿐이더라.
낯선 친구 만나면
우리들 문둥이끼리 반갑다.
천안 삼거리를 지나고
쑤세미 같은 해는 서산에 남는데
가도 가도 붉은 황톳길
숨막히는 더위 속으로 쩔름거리며
가는 길……
신을 벗으면
버드나무 밑에서 지까다비를 벗으면
발가락이 또 한 개 없다
앞으로 남은 두 개의 발가락이 잘릴 때까지
가도 가도 천리, 먼 전라도(全羅道) 길.
소록도를 나와 금산을 향한다. 금산은 거금도의 또 다른 이름이다.
소록도에서 그 거금도로도 자동차와 자전거가 위아래로 다닐 수 있는 멋진 2층 다리가 놓여졌다. 천혜의 절경을 자랑하는 거금도가 우리와 가까워진 것이다.
거금도 해안을 따라 돌면서 살아서 이런 절경을 보는 구나 감탄을 하고 녹동에 나와 이곳의 특미 통장어탕과 구이를 드셔보라고 권해 드리고 싶다. 이 세상에 살아 있음에 감사하는 마음이 들 거라고 확신을 한다.
이어 영남해안과 우주선발사기지가 있는 나로도로 향한다.
남해를 품고 있는 여덟봉우리 팔영산의 남쪽마을이라고 해서 영남면이다. 이 영남면의 해안과 우주발사 기지가 있는 나로도 해안은 고흥을 완성하는 또 하나의 절경이다.
고흥은 동남쪽으로 여수와 마주하는 여자만과 서북쪽으로는 보성과 마주하는 득량만을 거느리고 있는 반도형의 지형이다. 앞으로 여수와 영남해안은 다리로 이어질 것인데 지금 연결공사가 진행중이다.
그렇게 영남해안을 돌아 팔영산을 둘러본 뒤, 고흥의 들머리라 할 수 있는 남양면으로 가면 수수백년 오랜 역사를 품은 선정마을이 있다. 신선의 정자라는 이름처럼 이곳에선 누구나 신선이 되는 곳이다.
또 남양면의 남양산성은 이순신 장군이 올라 사방을 둘러보며 왜적을 무찌를 작전계획을 세운 유서 깊은 곳이기도 하다. 아뿔싸! 이런 소리 잘못하면 또 어떤 쥐새끼 같은 놈이 지 이름 박아 비를 세울지 모르니 남양산성에 올라 그림같이 아름다운 경치 구경만 한 걸로 글을 맺자.
또 이곳 남양산성에서 바라보는 일몰은 참으로 황홀하다. 물론 이곳에 오르기가 쉽지 않으니, 국도변에 있는 중산일몰관람대에서 즐기면 된다.
<남양산성에서 바라본 팔영산 방향>
그곳에서 해 지는 쪽 눈앞으로 바라보이는 곳에 우도라는 작은 섬이 있다. 물이 빠지면 들어가고 물이 차면 꼼짝없이 갇히는 득량만의 작은 섬이다.
그 우도로 가는 데, 난데없이 밭둑에서 커다란 개가 사납게 짖어댄다.
“아이고매, 미안하구만요. 저 놈의 개새끼가 사람을 몰라보고 무조건 짖는단 말이요. 야, 이놈의 개새끼야! 무조건 짖으면 어떡혀?”
밭을 매던 할머니 한 분이 컹컹 짖는 개를 야단친다.
“아따! 개가 도둑인지 아닌지? 어찌 알거요? 그냥 짖어서 도둑질 못하게 하려는 거지요. 아따! 그러닌께 우덜도 어떤 놈이 도둑놈인지 아닌지 쉽게 알것습디여? 도둑놈이 지보고 도둑적으로 완벽한 놈이라고 말할랍디여? 도덕적으로 완벽하다고 눙치겠지라. 흐흐흐.”
무슨 뜻인지 이해할지, 어떨지, 그런 말로 정 넘치는 고흥 남양땅 할머니께 인사하고 우도로 간다.
그곳 우도분교장에는 학생 한 명, 선생님 한 명이 있다. 그 학생 한 명이 짱뚱어랑, 게랑, 갈매기랑 공부하는 곳에서 온 세상 사람이 서로 어울려 살아가는 꿈을 꾼다. 우주선을 쏘아 올리는 고장에서 그런 꿈을 꾸는 게 제격 아니겠는가?
고흥! 아름다우면서 내일의 희망이 가득한 고장이다.
<우도분교장의 주인>
<우도에서 만난 일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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