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6

운당 2011. 8. 9. 09:19

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6

 

빛의 의미를 찾아서(3)

 

201183, 오늘도 염천이다. 어제 흘러간 물은 오늘 볼 수 없지만, 그 물을 흘려보낸 골짜기의 물길은 변함없이 그 자리에서 나그네를 반긴다. 6일 만에 다시 샘골에서 흘러 내려온 용추계곡 물길을 찾아간다.

무등산 장불재 아래 샘골에서 솟아나와 치마바위에서 잠시 노닐다 용추폭포가 되어 한바탕 큰 소리를 내지르고 제 2수원지로 들어갔던 물이다. 그러나 샘골물은 그만 그곳에 붙잡혀 광주 시민의 식수원이 되고 만다.

그러니까 엄밀히 따지면 광주천의 시원지 물은 곧바로 광주천으로 들어오지 못하는 셈이다. 하지만 그러거나 말거나 용추계곡은 용연마을 앞에서 곰적골 쪽에서 내려온 물을 받아서 광주와 화순을 오가는 큰 길로 나온다.

용추계곡에서 흘러온 물은 제 2수원지 들머리와 광주 화순간 큰길이 만나는 그 삼거리의 교동다리에서 오른쪽으로 크게 휘어지며 화순 너릿재에서 흘러온 물을 또 보탠다. 그리고 주욱 흘러 주남마을에 이른다.

주남마을은 광주 화순간 도로변에 위치한 평범한 농촌마을이다. 19805월 그 주남마을은 핏빛으로 얼룩이 진다.

(계엄군에 사살되어 암매장 되었던 두 젊은이의 위령비)

(산등성이 풀밭에서 그날의 참상을 증언하고 있다.)

 (그날의 아픔을 아는걸까? 모르는 걸까? 평화로운 주남마을 뒷산 계곡)

광주시 동구 월남동 주남마을의 김막님(76) 씨가 지난해인 2010, 광주민중항쟁 30년을 맞아 털어놓은 회고담이다.

김막님은 열일곱에 오빠 아는 사람의 중매로 떠밀리듯 결혼을 했다. 남편이 군()에 가더니 당신이 엄청 못생겨서 말뚝을 박는다.’고 핑계를 대며 8년을 더 머물렀다. 그 잘난 남편 덕분에 어린 새댁은 홀로 시부모 봉양하며 아이들을 키우느라, 억척 아줌마란 이름표를 달았다.

 

1980521일이다. 공수부대원들이 주남마을에 들어왔다. 그날 김막님은 마을 앞 하천 둑 공사장에서 시멘트를 나르는 일용 근로 작업을 하고 있었다. 갑자기 콩 볶듯 총소리가 울렸다. 그러자 누군가가 소리를 쳤다.

지금 난리가 났다. 하던 일 다 치우고 얼른 집으로 가라.”

광주에서 화순으로 나가는 길목에 자리한 주남마을은 피의 초파일(음력 48)’이라 불리는 518일부터 항쟁 기간 내내 계엄군과 시민군이 치열한 접전을 벌인 곳이다.

521일 낮 도청과 광주역 일대에서 계엄군의 발포가 시작되자, 맨손 저항의 한계를 느낀 시민들은 무기를 찾기 시작했다. 시민들은 화순광업소를 비롯해 화순 역전파출소와 동면 지서의 무기고를 접수해 무장을 했다. 그 날 오후 430분께 계엄군은 도청과 도경 상황실을 내주고 물러났고 공수특전단 11여단이 주남마을 뒷산에 본부 진지를 구축했다.

마을을 장악한 계엄군은 저녁 8시 이후 집 밖으로 나온 사람에게는 무조건 총을 쐈다. 주민들은 무서워 밤새 솜이불을 뒤집어쓰고 잠을 설치다 날이 밝은 뒤에도 맘 놓고 나가질 못했다. 모내기철이 막 지난 터라 못자리에 물을 충분히 줘야 했지만 무서워 나갈 수가 없었다. 결국 그해 농사를 망쳐 쌀을 꿔다 먹어야 했다. 김막님은 그 날의 광경이 지금도 엊그제처럼 눈에 선하다 했다.

그때 마을에 군인들이 걍 꺼맸어라, 꺼매. 바우(바위) 있는 데서 절 있는데 까정(까지) 꺼매. 헬리콥터가 가믄(가면) 시방(지금) 하우스 지어 놓은 곳에 가만히 떠가고. 가만히 안즈기만(앉으면) 하면 먼지 조깐(조금) 나고, 헬기 뜨는 데서.”

 

퇴각한 계엄군은 22일 새벽부터 광주시내로 진입하는 모든 외곽 길목을 봉쇄했다. 그런데 주남마을은 화순, 보성, 장흥쪽으로 가는 길목이어서, 고향집으로 가려는 피란민들이 ‘6·25’ 때처럼 몰려들었다. 시민군들도 무기와 실탄 보급을 위해 자주 오갔다. 그때마다 길목 곳곳에 매복한 계엄군이 도로를 향해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23일 마침내 끔찍한 집단학살 사건이 터졌다. 계엄군이 너릿재를 지나던 미니버스에 기관총과 M16으로 무차별 총격을 가했다. 타고 있던 18명 가운데 여고생 1명만 빼고 모두 죽고 말았다. 애초 부상만 당했던 2명도 계엄군에 의해 사살되어 주남마을 뒷산에 암매장됐다가 발굴됐다.

김막님은 당시 마을 당산나무 뒤에 숨어 있다가 마을 앞을 지나가는 사람들의 옷깃을 잡아당겨 산으로 가요, 신작로로 가면 죽소라고 말해주곤 했다. 멋모르고 마을 앞 버스길로 지나가던 시민 3명이 군인들 총에 맞아 죽은 뒤였다. 그 덕분에 무사히 피난 간 사람들이 적지 않아서, 그는 지금도 그 당산나무를 생명나무라고 믿고 있다.

 

(평화롭고 인심좋은 사람들이 사는 주남 마을 경로당)

그 아픈 기억도 30년이 됐으니, 이제 한 세대가 흘렀다. 하지만, 아직도 그 상처는 아물지 않았다. 잠시 주남마을에 들린다. 그 날 23일 미니버스에 탔다, 부상만 당했으나, 곧 사살되어 마을 뒷산에 암매장 됐던 두 청년의 기념비를 둘러본다. 기념비는 허리 넘게 자란 풀숲에 묻혀있다. 누가 그들을 기억할까? 사람일까? 역사일까?

바라보는 산은 푸르다. 그곳에서 한줄기 작은 물줄기가 흘러와 졸졸졸 소리를 낸다. 맑은 시냇물에 잠긴 흰구름을 잠시 바라보다 흘러내리는 땀방울 닦으며 마을을 나온다. 다시 광주천으로 간다.

광주천은 이제 광주광역시 지하철 녹동역사 앞을 지나 용산동 다리 밑에 다다른다. 이제 광주천은 이곳 용산동에서 광주 무등경기장을 거쳐 광주광역시청사 앞까지 탄탄대수(坦坦大水).

동구 용산동 용산다리 근처에서 천변 산책로로 내려간다. 천변 양쪽에 산책로가 잘 조성되어 있다. 백로라고도 부르는 흰색 깃털의 왜가리, 재색 왜가리가 유유히 날다가 내려와 엉금엉금 물속을 거닌다. 그러다 딱 멈춰 선다.

 

(주남마을, 지하철 역사, 광주 제 2순환도로를 지나온 광주천)

(소태계곡의 물을 보탠다.)

(증심사 계곡의 물도 더한다)

옛 이야기가 생각난다. 옛날 초가집에 봉창문이 있었다. 안방 여닫이 큰 문 옆에 달아놓은 작은 문이다. 그 봉창문에는 밖을 내다보기 위해 손바닥만한 쪽유리를 붙여 놓았다. 그 봉창문 쪽유리로 집주인이 밖을 내다보는데 집 앞 텃논에 백로 한 마리가 멋진 비행으로 내려앉더니 엉금엉금 걸었다.

엉금엉금 걷는다.”

그러더니 딱 멈춰 섰다.

딱 멈춰 섰다.”

이번엔 고개를 두리번두리번 거리며 먹잇감을 찾는다.

둘레 둘레 쳐다본다.”

주인이 그리 말하는데 마침 그 집에 도둑이 들었다. 엉금엉금 걷다가, 주인의 말에 깜짝 놀라 딱 멈췄다. 어디서 나는 소릴까? 두리번 두리번 거렸다.

사실은 집 주인이 먹잇감을 찾는 백로의 행동을 보고 얘기하는데 도둑은 자길 보고 하는 말이라 생각했던 것이다.

콱 찍어 먹는다.”

그 순간 백로가 먹잇감을 향해 잽싸게 부리로 내리찍었다. 역시 그 순간 도둑은 걸음아 나 살려라, 도망을 쳤다는 얘기다.

 

(콱 찍어버린다. 도둑놈의 그 설레발 치는 혓바닥을)

도둑이 제 발 저린다는 말이 그래서 생겼으리라. 하지만 그 옛 도둑놈은 순진하기라도 했다. 요즈음 도둑은 오히려 주인 잡으려 설레발친다.

국민과 소통한다고 라디오와 티비로 떠들어대는 소리를 들으면 가관이 아니다. 누가 무어라고를 했나? 나무라기를 했나? 제 먼저 나서서 실실 웃음 흘리며 매사가 변명이요, 자화자찬이다. 나쁜 것은 무조건 남의 탓, 잘 한 것은 모두 내 능력, 내가 해봐서 아는 데라고 설쳐대는 설치류 족들이 기세 등등이다.

그런가 하면 서울시장 오세훈은 학생 무상급식은 세금폭탄이요, 세금 도둑질이라고 손가락질 한다. 그건 망국의 길이라고 숨 넘어 가듯 난리를 친다. 그러면서 같은 편 황우여는 유아 무상보육을 주장한다. 무상보육에는 당연히 무상급식이 포함되는 것 아닌가? 도둑질도 손발이 맞아야 하는데, 요즘 도둑들은 그 손발이 따로 노나 보다. 아무튼 그들이 새겨봐야 할 옛 이야기다. 그리고 우리 민초들도 깨달아야 할 이야기다.

(버드내 쉼터) 

1970년대까지만 해도 흔히 낚시꾼을 볼 수 있던 천변이었다. 백로가 있다는 것은 먹잇감이 산다는 증거일 테다. 광주천이 많이 정화되었다는 생각에 기분이 좋았다. 더위도 잠시 잊는다.

평소에는 쳐다볼 틈도 없이 승용차로 스쳐 지나던 천변이다. 오늘 천천히 걸으며 보니 늘어진 능수버들, 왜가리 나는 모습이 한 폭의 그림처럼 아름답다.

소태골에서 흘러온 물이 광주천으로 들어오는 곳을 지난다. 이어 동적골과 증심사계곡에서 흘러와 배부른 다리, 배고픈 다리를 보고 온 물이 원지교 밑에서 광주천과 만나는 곳도 지난다.

여기도 나그네에겐 추억이 있는 곳이다. 1960년대다. 여름밤이면 이곳이 목욕 터였다. 여자들은 조금 위쪽에서, 남자들은 아래쪽에서 맑고 차가운 냇물에 하루의 더위를 식혔다. 컴컴하지만 맘만 먹으면 상대를 볼 수 있는 거리다. 그래서 꼬맹이들이 그 중간에서 목욕을 했다. 선녀를 나무꾼에게서 보호하는 역할이 꼬맹이들이었던 것이다. 그날 선녀들은, 또 그 선녀의 옷을 훔치고 싶었을 나무꾼들은 지금 어디서 살아갈까? 그 생각을 떠올리며 그날의 꼬맹이는 징검다리를 건너 천변 우로 쪽 산책길로 간다. 지금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진 남광주역을 둘러보기 위해서다.

남광주역은 남광주 시장과 더불어 광주 시민의 밥상을 책임지는 큰 시장이었다. 특히 여수, 순천의 싱싱한 해산물과 벌교의 꼬막 등이 완행열차에 실려져 왔다.

그러나 지금은 이곳이 옛 남광주역이었다는 이정표와, 도서관으로 사용하기 위해 남겨놓은 열차객실 두 칸, 남광주천에 달랑 남은 철교만이 그날의 이야기를 담고 있다. 도서실로 쓴다는 객실은 이제 폐쇄되어, 관리가 안 되니 흉물스럽기만 하다. 칠이 벗겨져 가는 객실 외벽에 붙어있는 남광주에서 파리, 남광주에서 암스테르담이란 이정표가 그나마 아련한 향수다. 하지만 씁쓸하고 쓸쓸할 뿐이다.

(남광주 역, 객차는 도서실이었으나 지금은 휴관 상태다)

(역은 사라졌지만, 시장은 살아있다.)

 (옛 철교가 다리 아래 숨어있다)

남광주역

 

기차가 꽥 소리를 지르고

남광주 철교를 건너오면

여수, 순천, 해삼, 장어, 어물장 보신 아버지

벌교 꼬막, 바지락조개 팔러오는 어머니

새벽밥 먹고 통학차 탄 언니 오빠

남광주역에 나가면 만날 수 있었다.

 

시커먼 연기 내뿜으며

남광주 철교를 건너오는

남광주 열차도 시장이고

남광주 시장도 시장이었다.

열차에서 보는 해산물이

시장에도 그대로 있었다.

 

아줌마! 제가 도와 드릴게요.

아침 통학차 타고 온 아주머니가

부탁하지 않아도 함지박을 머리에 얹어주고

학생은 비린내 묻은 손으로 공부하러 갔다.

학상! 이거 좀 먹어보소

저녁 통학차 탄 아주머니가

비린내 나는 손으로 떡 조각 내밀면

학생은 비린내 묻은 떡을 맛있게 먹었다.

 

지금도 남광주역에는 남광주 시장이 있다.

기차는 오가지 않아도 사람 북적대는 시장이 있다.

 

서툰 시 한 편 만든 다음 그 남광주 시장을 내려와 다시 광주천을 걷는다. 폭염주의보가 내렸다더니, 덥긴 덥다. 천변갓길을 복개해놓은 쪽으로 들어간다. 그늘이 지니 좀 살 것 같다. 지나치는 다리 교각 아래마다 사람들 몇 옹기종기 더위를 피하고 있다.


(다리 아래 사람들)

(광주 사직공원 들머리)

(광주공원 들머리)

사직공원 앞을 지나 서현교회 내리막길과 광주공원 앞에 이른다. 서현교회 내리막길은 805,18 항쟁 뒤, 학생시민과 전경이 잦은 전투를 치르던 곳이다. 80년대 오늘처럼 무덥던 어느 날 그 앞을 지나다, 난데없는 기습시위에 휘말렸다. 지랄탄(최류탄의 일종)이 이리저리 지랄하며 터지고, 그 지독한 연기에 싸여 그만 길가에 주저앉고 말았다. 그때 철커덕, 철커덕무서운 군화발자국 소리가 달려오고, 간신이 눈을 치켜떠 올려다보니, 전경이 방패로 내려찍으려 했다.

너는 형도 없냐? 찍기만 해봐. 물어뜯어버릴 테니까.”

소릴 질렀더니 슬그머니 물러나 최류 연기 자욱한 곳으로 사라졌다.

또 광주공원 광장은 돼지 머리고기와 순대 등을 파는 집이 즐비하게 있던 곳이다. 이제 그 집들은 다 어디로 가버리고 말끔하게 단장이 됐지만, 예전에 친근하던 그 광장은 아니다. 그 추억만 생각하며 그냥 지나친다.

그렇게 내쳐 걸어 광주의 또 하나의 큰 시장 양동시장을 지난다. 남광주 시장, 지금은 없어진 금동시장, 그리고 양동 시장은 광주천변에 자리한 큰 시장이었다.

대기업들이 콩나물장사, 두부장사까지 하려고 혈안이 되어있는, 강자독식의 사회에서 금동 시장은 도태되었고, 남광주 시장, 양동시장은 살아남기 위해 발버둥치고 있다. 우리 서민들이 힘을 합쳐 도우면 될 텐데, 세상일이란 게 그리 쉽지가 않다.

그러나 역사의 심판이라는 게 있다. 아무리 영구 득세할 듯해도 사람의 마음을 얻지 못한 국가는 망하고, 사랑을 잃은 기업도 언젠가는 쪽박을 차게 된다. 그게 믿음이다. 바로 무서운 역사라는 것이다.

 

하얀 빨래가 천변에 널려있던 풍경, 세탁기가 없던 시절, 부자들의 빨래를 해주고 입에 풀칠했던 천변의 가난한 사람들은 지금은 어떻게 살까? 양동시장을 지나 발산다리를 지나며, 지난 세월 천변에 가득 널려있던 하얀 빨래들을 떠올린다.

이제 광주천의 마지막 이름을 갖는 곳이다. 전남대학교를 지나 무등경기장을 돌아 나오는 용봉천이 합쳐지는 두물머리다. 맑은 물과 은빛 모래가 있던 곳이다. 그때의 모습에 비하면 지금은 쓰레기장에 가깝다. 앞으로 더욱 생태하천을 만드는 일에 노력해야하리라. 멀쩡한 4대강이 죽었다고 그 강을 살린다며 사()대강을 만들지는 않는지, 깊은 성찰이 있었으면 한다.

 

(양동 시장)

오늘은 이곳 두물머리에서 걸음을 멈춘다. 광주천은 이곳에서 3.7km를 더 흘러 광주시청사에 이른다. 그리고 그곳에서 광주천의 이름표를 떼고 극락강이란 이름표를 단다.

젊어서는 곡성 창평(昌平)과 순천의 낙안(樂安)에서 살다가, 나이 들면 무안의 일로(一老)에서 목포의 이로(二老), 그리고 나주 노안(老安)에 이르러, 마지막에 광주 극락(極樂)으로 가면 된다, 라는 우스개말이 있다.

광주천은 이제 그 좋은 이름 극락강이 되어 영산강을 향하리라.

 

(부처꽃)

(휴전선도 지나 가는 길이었으면 싶다)

문득 아침에 한겨레신문에서 읽었던 조계종 화쟁위원회 도법 스님의 82일자 기자회견 내용을 떠올린다.

기자회견은 한진중공업 크레인에서 고공 농성중인 김진숙 씨를 살리자는 내용이다. 도법 스님은 호소한다. ‘김씨의 생명이 살아 내려오게 하기 위해 교회 앞에서 엎드려 절하라면 하고, 김씨와 노동자를 만나라면 만나고, 회사와 조남호 한진중공업 회장에게 무릎 꿇고 빌라면 빌고, 청와대에 가서 읍소하라면 하겠다.’ ‘생명의 무게는 그 어떤 것보다 우선적이고 중요하다.’ ‘ 우리들의 어리석음, 겁많음, 게으름, 나약함, 이해타산, 무력함, 나아가 누군가가 해결하겠지 하는 마음 등의 핑계로 오늘까지 와 실로 부끄럽고 죄송하다그렇게 또 참회한다. 지금 우리 사회는 돈에 눈이 멀고, 기득권 유지에만 환장을 했다고 여겨진다. 도법 스님의 말을 외면한다면 정말 그렇다.

(광주천이 용봉천과 만나는 두물머리 나루)

(용봉천이 광주천으로 흘러 든다)

(두 천이 만나는 삼각주의 무등 경기장)

 (이제 극락으로 가는 광주천)

어릴 적 맑고 깨끗했던 물, 여기보다 더 아래 하류에서도 발가벗고 헤엄을 쳤던 물이다. 이 물도 살고 김진숙으로 표현되는 민초들도 사는 세상은 진정 없는 걸까?

광주의 빛! ‘그것은 길이다라고 믿는다. 그리고 그 길에는 주남마을 김막님 씨, 도법 스님 같은 사람이 있다. ‘광주의 빛은 또 사람이다.’ 그런 깨달음을 얻는다.

호남가가 보려하는 환한 세상(光州)은 세상을 열어가는 길이요, 그 길에서 살아가는 사람인 것이다.

그래서 이 땅에서 고통 받는 수많은 광주천을 살리고, 수많은 김진숙도 살려야 한다. 이 땅의 길을 함께 걷고, 그 길에서 살아가는 우리가 그들을 살려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