호남 기행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5
빛의 의미를 찾아서(2)
무등(無等)! 무등은 1등, 2등…. 등수가 없는 무등이다. 그런가하면 그 누구도 등급을 겨룰 자가 없는 무등이다. 따라서 무등은 평등이고, 절대평화다.
따라서 광주가 민주도시, 평화의 도시, 예술과 생명을 사랑하는 도시가 된 것은 우연이 아니다. 태고적부터, 무등 아래에 빛터, 빛고을을 꾸려 살아온 선조들의 삶에서 기인하는 것이다.
그 무등의 품안에 있는 빛고을 광주라는 이름은 언제, 어떻게 생긴 것일까?
(무등산 옛길 종점이다. 옛길 길이가 무등산 높이를 상징하는 11.87km다)
광주는 삼한시대에 마한의 영토였다. 백제 근초고왕(近肖古王, 346∼375)때 백제를 3주로 나누어 그 하나를 무진주(武珍州), 일명(一云) 노지(奴只)라 하였으니, 4세기에 이르러서는 백제에 속하게 되었다.
신라가 삼국 영토를 병합한 뒤 전국을 9주로 나누어 무진주(光州)와 완산주(全州)에 도독을 배치했다. 그러다 경덕왕(757년)16년 12월에 고을 이름을 중국식인 외자로 고치면서 무진주는 무주로 완산주는 완주로 바뀌었다.
광주(光州)라는 지금의 이름은 고려 태조 19년(918년)에 여러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의 명칭을 바꿀 때부터다. 그 뒤 고려 공민왕 11년(1362년)에는 다시 무진주(武珍州)라 하였다. 이때 ‘무(武)’를 ‘무(茂)’로 한 것은 고려 혜종(943∼945)의 이름에 ‘무(武)’자가 있어 이를 피하기 위한 것이었다. 조선시대에도 세종12년(1430년)부터 문종1년(1451년)까지 무진군(武珍郡)이라 했던 때가 있었다.
백제시대에 무진(武珍) 일명 노지(奴只)라 한 것은 미동부리현(未冬夫里縣)이란 옛 지명에서 연유한 것이다. 미동(未冬)은 습지를 뜻하는 우리 옛 말인 물들, 물둑(水堤), 무들, 무돌을 차자표기(次字表記)한 것이다. 그러니까 미동(未冬)이라고 적고 무돌이라 발음했을 것이다. 또 미동부리(未冬)의 부리(夫里)는 ‘벌’ 즉 벌판이라는 우리 옛말이다. 이것을 백제시대에 와서 무돌의 ‘무’는 한자음의 ‘무(武)’로 표기하고 무돌의 ‘돌’은 뜻으로 볼 때 보배롭다하여 ‘진(珍)’을 썼을 것이다. 그리고 부리(夫里)는 벌판이니 주(州)다. 따라서 지금의 광주를 무진주(武珍州)라 했으며 무등산을 무진악(武珍岳)이라 한 것이다.
‘무돌’은 또 ‘무지개를 뿜는 돌’이란 뜻을 지닌 순우리말의 조어(造語)로 보기도 한다. 갈대밭으로 이루어진 산을 ‘갈뫼’라 하듯 ‘무돌’의 무등산은 무지개처럼 곱고 아름다운 돌산이란 뜻이다. 그래서 무등산을 서석산(瑞石山)이라 하는 것은 ‘무돌’에서 비롯됐으리라 여겨진다. 옛 사람들이 돌을 신성시하고 신앙의 대상물로 섬겼던 것으로 미루어 서석산이란 글자 그대로 상서로운 돌산이란 뜻이다.
이 서석산은 고려사 지리지에 그 명칭의 유래를‘무등산이라 적고 혹은 무진악이라 하고 일명 서석산이라 한다(一云 武珍岳, 一云 瑞石山)’고 기록되어 있다. 이때부터 서석산이 무등산의 별칭 또는 애칭으로 함께 불려왔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동국여지승람’은 ‘고려사’의 기록에 따라, ‘이 산 서쪽 양지 바른 언덕에 돌기둥 수십 개가 즐비하게 서 있는데 높이가 가히 백 척이나 된다. 그래서 산 이름을 서석이라 한다.(山西陽崖 數十櫛立 高可百尺山名瑞石 以此)’ 서석의 유래를 밝히고 있다.
송강 정철은 성산별곡에서 ‘천변(天邊)에 뜨는 구름 서석을 집을 삼아’라 하였고 제봉 고경명의 ‘유서석록(遊瑞石錄)’은 서석산의 예찬기이기도 한다. 무등산에는 이렇듯 최고봉인 천왕, 지왕, 인왕의 3봉과 서석대, 입석대, 규봉, 의상봉, 새인봉, 중봉 등 직립형 돌무더기가 곳곳에 흩어져 있어 절경을 이루고 있다. 이러한 돌무더기를 우리 조상들은 ‘선돌’ 또는 ‘신돌’이라 불렀다. 뜻을 취하면 ‘입(立)’이 되고 음을 취하면 ‘서(瑞)’인 것이다.
우리 조상들은 천연의 석경(石景)을 상서롭고 신성한 뜻으로 받아들여 신체(神體)로 여기고 ‘서(瑞)’로 받아들였던 것이다. 따라서 서석의 절경이 곳곳에 있는 무등산은 곧 서석산인 것이다.
(구름 몰려오는 서석대 위에서 바라본 광주시가지)
또 여기서 ‘삼국사기’의 백제 시대에 광주를 이르는 또 하나의 지명 노지(奴只)의 유래를 살펴보면 다음과 같다.
서기 554년, 백제에는 위덕대왕이 즉위하고 568년 백제인으로 왜국에 간 민달(敏達)은 구주백제의 왕으로 있다가, 왜왕 흠명이 571년에 죽으니 민달(535~585)이 왕으로 즉위한다.
민달은 불교를 믿지 않았고, 즉위 후 15년에 역병(천연두)이 돌자 불교를 탓하고 불상을 강에 던져 버렸다고 한다. 그러나 역병이 더욱 창궐하여 그도 결국 역병으로 죽었다. 이 왜왕의 이름을 보건데, 민달(敏達)은 광주(光州) 무등산(無等山) 출신으로 여겨진다고 한다. 광주의 옛 이름이 무진주(武珍州)이고 무등산(無等山)은 광주의 진산이다.
민달(敏達)은 일본어로는 ‘비다쓰’라 읽는다. 우리말 뜻으로 빛땅이라는 말이다. 무진주는 빛산인 광산현(光山縣)이 되었고, 빛고을 광주가 되었다. 또 민달의 후손 법대왕은 백제 한왕(漢王)의 딸 대고왕(大股王)과 결혼하여 618년에 지노왕(知奴王)을 낳았다. 이 지노(知奴)왕은 광주의 옛 이름 노지(奴只)를 뒤집은 것이라 한다. 광주의 옛 이름은 그렇게 백제와 왜국과도 상관관계에 있다.
이처럼 ‘삼국사기’, ‘고려사 지리지와 악지(樂志)’, ‘세종실록 지리지’, ‘동국여지승람’ 등 많은 자료에서 무진악, 무악, 서석산 등 무등산의 이름과 유래를 알 수 있다. 또 무등산은 ‘무돌뫼, 무당산, 무덤산, 무정산’ 등의 입말 이름도 있다.
(무등의 자랑 입석대)
광주의 옛 사람들은 흔히 무등산을 ‘무돌뫼’라 했다. 습지를 뜻하는 ‘무돌’에 산을 일컫는 ‘뫼’가 더해진 이름이다.
‘무당산’ 이라고도 불렀다. 1970년대 무렵까지만 해도 증심사 뒤쪽 덕산골, 속칭 ‘무당촌’이란 곳이 있었고, 깃발을 나부끼는 무당의 움막이 듬성듬성 있었다. 이곳을 지나며 무당들의 내림굿을 보는 게 어렵지가 않았다.
이 무당촌은 1977년 4월 20일 이른바 ‘무등산 타잔’ 사건이 일어난 곳이다. 이곳 무당촌의 무허가 건물을 철거하러 온 철거반원 4명이 박흥숙에게 무참하게 살해된 것이다. 광주항쟁이 있었던 80년 12월 24일에 박흥숙은 형장의 이슬로 사라졌다. 살해된 철거반원과 사형 당한 박흥숙, 이들은 모두 번지르르한 외형을 추구하고 성장만을 일삼던 개발독재사회의 무원칙한 행정이 낳은 피해자이리라. 사형집행 다음 날인 12월 25일은 크리스마스다. 박흥숙의 주검은 지금의 광주시 운림동 무등산 증심사 가는 ‘배고픈 다리’ 근처 밭 한편에 천막을 치고 살았던 가족들에게 돌아왔다. 죽음 직전 박흥숙은 자신을 무등산에 묻어 달라고 부탁했다 한다. 하지만 묻힐 땅도 없었고, 무지막지한 전두환 정부가 허락할리도 없다. 가족들은 강신석(무진교회) 목사의 도움으로 간단한 장례를 치루고 지금의 광주대학교 뒤편 기독교 묘지에 묻었다.
이렇듯 무등산의 ‘무당’은 역사의 뒤안길로 사라졌지만, ‘무당산’은 무등산의 신령스러운 기운과 영험함을 믿는 믿음의 이름일 것이다. 불교가 우리나라에 전래되기 전의, 원시 종교인 ‘토속신앙’, ‘당산신앙’이 무등산을 ‘큰당산’, ‘신산(神山)’으로 여기게 했을 거라는 것이다.
또 ‘무덤산’이라 부르는 사람도 있다. 무등산은 동서남북 어디에서 보나 형상이 비슷하다. 홑산으로 이루어진 그 모습이 마치 무덤처럼 둥글넓적하게 생겨서 속칭 ‘무덤산’이라 했을 법하다. 또 언제 봐도 그저 늘 무덤덤한 심성을 상징하는 산이라는 것일 수도 있다. 그러나 육당(六堂)은 부정을 몹시 싫어하는 우리나라 풍속으로 봐서 이렇게 큼직한 신역(神域)에 ‘무덤산’이라는 흉측한 명칭을 썼을 것 같지 않다면서 ‘무당’이 와전된 것이라고 했다.
노산 이은상도 예부터 이 고을 사람들이 무등산에 무덤만 써도 부정 탄다고 여기며 신성시했던 점을 들어 ‘무등산’의 와전이라고 했다. 더하여 노산은 이 산이 불교적 가치를 설명한 이름일 것이라고 주장하기도 했다. 불교사전에 의하면 ‘무유등등(無有等等)’은 부처님은 세간의 모든 중생과 같지 않으므로 무등(無等)한 것이요, ‘무등등(無等等)’은 부처님은 가장 높은 자리에 있어서 견줄 이가 없다는 뜻이니 결국 무등산은 불교의 이 말을 빌려 그 가치를 더욱 높인 것이라 한다.
아무튼 무덤은 우리의 또 다른 집이다. 무등산만큼 넉넉하고 풍성한 내세의 집이 있다면 그보다 더한 복이 또 있을 것인가? 무덤산이란 이름도 평화로운 이름으로 다가온다.
무등산의 또 하나의 이름인 무정산(無情山)은 조선왕조를 창건한 태조(太祖) 이성계(李成桂, 1335~1408)가 왕명에 불복한 무정한 산이라 지칭한데서 연유했다고 전해진다.
이성계가 등극하기 전 여러 명산대천에 왕이 되게 해달라고 빌면서 소지(燒紙)를 태워 하늘로 올리는데, 무등산 산신이 그 소원을 거절했다는 것이다. 또 나라에 가뭄이 들자 남쪽의 명산 무등산에 기우제를 지내게 했으나, 무등산 산신이 이에 불복 비를 내리지 않았다고도 한다. 태조는 왕명에 불복한 무등산 산신을 지리산으로 귀양 보내고 이 산을 무정한 산이라 하여 무정산이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동국여지승람’의 ‘무등산신사 신라위소사 고려치국제본조춘추령 본읍치제(無等山神祠 新羅爲小祀 高麗致國祭本朝春秋令 本邑致祭)’라는 기록을 보면 고려까지는 나라의 제사를 모셨으나 조선조에 이르러 산신의 격을 낮추어 고을제(邑祭)로 지내게 했다. 이러한 사실을 두고 무정산의 전설이 생겼지 않았을까 여겨진다.
장불재를 내려오며 한동안 그렇게 광주와 무등산의 이름과 유래를 생각하다가 헛발을 내딛어 발을 삘 뻔했다. 무릎이 시큰거린다. 정신을 바짝 차린다.
또 자칫 놓칠 뻔 했다. 급히 걸음을 멈춘다. 바로 옆이 샘골이다. 물소리가 제법 노래가 되어 들린다.
장불재에서 중머릿재로 내려가는 길, 짙푸른 녹음이 우거진 골짜기도 계곡 모양을 갖추어 가고, 비가 내린 뒤라 수량이 불어나 바위를 만난 물줄기가 하얗게 부서진다.
그리고 바로 그곳에서 한줄기 샘물이 돌틈에서 콸콸 쏟아져 나온다. 흐르는 물이 아니라 솟구치는 물이다. 맑고 깨끗하다. 청량한 광주천의 첫물이 세상 여행을 처음 시작하는 거다. ‘광주목사 임훈과 함께 여기에 올라서 샘골의 물에 콩가루를 타서 마셨더니 그 맛이 세상에 어떠한 것과도 비길 수 없이 좋았다.’고경명 선생의 유서석록에 나오는 그 샘물이다.
(광주천의 시원지 샘골)
이제 이 물줄기가 바위를 감고, 휘돌고, 떨어지며 아래로 낮은 곳으로 흘러 광주천이 되는 것이다. 여기저기 작은 물줄기와 합하여 큰물줄기가 되는 것이다.
물줄기! 그렇다. 태초에 빛이 세상을 열었다하니, 이 세상 무어든 시작이 있고, 그 시작이 계속되며 줄기가 되는 것이다. 빛줄기, 물줄기, 사람 사는 삶의 줄기가 다 그렇게 생겨난 것이다.
비로소 아둔한 머리가 깨어난다. 빛의 의미가 바로 길이라는 생각을 한다.
산을 오를 땐 오르는 길만 보인다. 하지만 정상에 서면 내려가는 길이 여럿임을 알 수 있다.
바꾸어 말하면 오르는 길은 여럿이나, 내려가는 길은 하나라는 말이기도 하다. 어떻게 오르느냐는 과정이 중요하지만, 어떻게 내려가느냐는 결과일 뿐이다. 그래서 오를 때는 방향을 수정하고 되돌아보며 반성할 수 있는 여유가 있지만, 내리막길은 자칫 잘못 들면 평생에 한이 되는 것이다.
아무튼 무등에서 내려가는 물줄기는 많다. 그 수많은 물줄기가 모여 광주천이 되고 광주천이 또 여러 물줄기를 더해 바다에 이르는 것이다.
그리고 그 흐르는 물줄기들이 수많은 길을 만들고 그 길을 따라 우리들이 삶의 길을 걸어가는 것이다.
그런 저런 생각을 잠시 마무리하고 샘골을 떠난다. 이 샘골이 만드는 길을 따라 가보자. 빛의 의미를 생각하며 물길이 만드는 길을 따라 산을 내려가는 나그네의 마음은 가볍다.
중머릿재에 이른다. 더위를 피해온 몇몇 등산객이 나무 그늘에 앉아 환담을 나누고 있을 뿐, 쌓인 눈에 무릎까지 빠지는 한 겨울에도 복작대던 산이 조용하기만 하다.
잠시 헤어진 샘골물을 만나기 위해 용추계곡(龍湫溪谷) 쪽으로 방향을 잡는다. 키보다 더 자란 억새와 멍석딸기 줄기가 살갗을 할퀸다. 거미줄이 얼굴에 걸리고, 길도 미끄럽다.
용추계곡에서 중머릿재로 오르는 등산로는 휴식년제 때문에 한동안 등산로를 폐쇄했던 구간이다. 그래서인지 길의 흔적이 흐릿하다. 어림짐작으로 가파른 길을 한참 내려가다 갈림길을 만난다. 일단 편하리라는 생각에 내리막길을 선택한다. 하지만 편한 선택이 나중에 고생길이 될 줄이야….
(한 여름 염천에도 오싹 한기가 드는 용추폭포)
마침내 용추폭포다. 샘골에서 나와 장정 3~40명이 앉을 만한 치마바위를 지나와 떨어지는 물이다.
“야, 좋다!”
절로 감탄사가 나온다. 수량이 불어나, 폭포다운 위용을 본다. 혼자 보기 아까운 참으로 멋진 광경이다.
“좀 씻어보세요. 너무 좋습니다.”
혼자 인줄 알았는데, 어떤 사람이 등목을 하고 나온다.
“근데 이 폭포 이름이 뭐지요?”
“용추폭포지요. 예전에는 더 위용이 있고 아름다웠답니다. 저 아래 제 2수원지를 만들고 일본인들이 이 폭포를 폭파했답니다. 사람들이 여기 와서 목욕을 하고 어쩌고 하면 수원지 물이 오염된다고요. 아무리 그렇더라도 다이나마이트로 폭파까지 하다니.”
사대강(死大江) 공사나, 금년 비에 난리가 난 서울 우면산의 개발이나, 다 무지막지한 개발독재, 자본독재의 산물 아닌가? 일본인의 어이없는 만행을 욕하기가 부끄러워 더 이상 말을 줄였다.
“이쪽으로 내려가면 어디인가요?”
“제 2수원지가 나오지요. 시내버스도 있습니다.”
“오치에 사는데, 그럼 제 2수원지 쪽으로 가보겠습니다.”
“그러세요. 여기서 다시 중머릿재로 오르기보다 그게 더 편할지도 모르겠네요.”
정말 차고 깨끗한 물이다. 등목 대신 얼굴만 씻고, 사진을 찍은 다음 숲길로 들어섰다.
그런데 이상하다. 잠시 함께 하던 용추계곡물이 길에서 멀어진다. 예전 기억을 더듬어보면 이게 아닌데, 하면서도 길을 가늠하기 어렵다.
결국, 동행인은 동적골쪽으로 가겠다고 갈림길에서 헤어졌고, 서투른 나그네의 산행은 고행길이 되고 말았다. 그래도 높은 곳에서 내려다보는 길은 여럿이라 했다. 저 아래 제 2수원지가 보이기에 다짜고짜 방향을 잡았다. 가파르고, 가시넝쿨이 할퀴고, 구르다시피 산을 내려왔다. 다행히 제 2수원지에 다 달아 등산로로 들어설 수 있었다.
(새인봉의 또 다른 모습)
(제 2수원지)
(제 2수원지로 내려가며 바라 본 무등산)
(풀숲에 쌓인 호조판서의 무덤, 영웅호걸이 몇몇이냐?)
이제 제 2수원지 아래 용연 마을이다. 마을 앞 다리를 건너 용연마을 커다란 정자나무 그늘로 간다. 주저앉으니 다리가 쑤시고 발바닥이 뜨겁다. 뙤약볕에 강행군을 했으니 당연한 현상이다. 하지만 어려움을 극복했다는 게 대견스럽다.
‘그래, 너 오늘 잘했어.’
‘뭘요? 까짓 거. ㅋㅋㅋ.’
스스로 칭찬을 주고받는다.
샘골물은 용추계곡의 제 2수원지에서 잠시 쉬다가 용연정수장으로 가서 광주 시민의 식수가 될 것이다. 그러나 용추계곡은 다른 계곡의 물과 만나서 용연마을 앞으로 이어지며, 들과 논의 곡식을 키우고, 물 속 생명체들을 보듬을 것이다.
빛의 의미를 찾아서 무등을 올라 내려오는 길, 오늘은 여기서 쉼표를 찍는다.
빛의 의미, 그것은 길이다. 오늘은 그걸 깨달아 마음이 기쁘다.
(이제 용추계곡물이 계곡을 나선다)
(용연 마을의 들을 적셔주고)
(용연마을 이정표)
(나그네의 쉼터, 용연 마을 당산나무)
'호남기행' 카테고리의 다른 글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7 (0) | 2011.08.12 |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6 (0) | 2011.08.09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4 (0) | 2011.08.03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3 (1) | 2011.07.26 |
호남가(湖南歌), 호남시(湖南詩)를 따라서 – 2 (0) | 2011.07.20 |